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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록호 "쿠팡, 위험 다루는 방식 원진레이온 닮아…플랫폼·물류 등 비극 막아야"

◆김록호 세계보건기구(WHO) 자문관(20년간 WHO 재직)

대통령 지적에도 산재 사망 안줄어

다단계 하청 등 구조적 문제 여전

38년전 원진레이온처럼 안전 불감

책임 분산 사각지대 놔두면 비극 반복

정책 의지·현장 집행 '산재왕국' 벗어야

김록호 세계보건기구 자문관은 7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여전히 제조·물류·건설 현장에서 안전을 비용으로 취급하는 후진국형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1988년 세상에 처음 알려진 원진레이온 사태는 국내 최악의 산업재해로 꼽힌다. 경기 남양주의 원진레이온 인조 견사 공장에서 이황화탄소가 지속적으로 누출돼 당시 직업병 판정을 받은 피해자 915명 중 현재까지 230명 이상이 숨졌다. 이황화탄소에 오래 노출되면 뇌경색이나 말초신경 손상, 콩팥 기능 저하, 언어 장애, 우울증, 자살 등이 초래될 수 있다. 당시 노동자의 편에서 과학적인 피해 원인 규명과 직업병 판정을 이끌어내는 데 헌신한 이들 중 한 명이 김록호 세계보건기구(WHO) 아시아태평양환경보건센터 자문관이다.

김 자문관은 7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38년 전 원진레이온 사태가 처음 보도됐을 때 계속 터져나왔던 여러 힘든 상황과 지난 수년간 계속 발생한 쿠팡의 물류 현장 노동자 사망 사건 등을 보면 산업 재해의 규모와 형태는 달라도 위험을 다루는 방식은 놀랍게도 닮아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쿠팡 사건도 과도한 속도 경쟁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보이지 않는 위험’의 문제가 근본 원인”이라며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여전히 제조·물류·건설 현장에서 안전을 비용으로 취급하는 후진국형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 자문관은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보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교수,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겸임조교수를 거쳤다. 독일의 WHO 유럽환경보건센터 과학자 활동에 이어 피지의 WHO 남태평양사무소에서 섬나라들의 기후변화와 건강에 관한 보고서를 처음 작성했으며 필리핀의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소에서 환경·보건 코디네이터로 활약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스위스의 WHO 본부 과학부 표준국장으로서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권고·가이드라인·국제표준이 각국 보건 정책에 활용될 수 있도로고 했다. 그는 20년 간 재직한 WHO에서 은퇴한 뒤 서울대와 연세대, 중국 베이징대에서 강의하는 한편 WHO 자문관으로서 남태평양의 섬나라인 키리바스에 기후변화에 따른 보건 대응을 조언하는 등 그동안의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김 자문관은 “원진레이온 사태 당시 한국은 세계노동기구(ILO) 통계상 산업재해와 직업병으로 매년 수천 명이 숨지고 십수만 명이 영구장애를 입는 것으로 나와 ‘산재왕국’이라는 오명을 들었다”며 “당시 보고되지 않았거나 회사가 자체 보상한 공상 처리까지 감안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당시 핀란드·이탈리아·일본의 레이온 노동자들에게 이황화탄소 중독이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한국 피해자들의 경우 법적으로 인정받고 보상받기까지는 참으로 힘들고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김 자문관은 의학적 의견을 솔직히 피력해 피해자들의 입장을 대변했을 뿐인데 1991년 출국금지에 이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밀실 조사와 사상 검증까지 받는 등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당시 직업병 피해자들이 보상금을 모아 비영리 공익법인인 녹색병원과 직업환경건강연구소를 만든 것은 대단히 평가할만하다는 게 그의 회고다. 그는 녹색병원 초대 원장으로 재직하며 직업병 진료·재활치료와 산재 피해자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김록호 세계보건기구 자문관이 감염병 대응을 위한 국제 공조를 강조하고 있다.


김 자문관은 이재명 대통령의 산업안전에 대한 높은 관심과 관련해 “기업의 비용 부담이나 규제 문제로 취급돼온 산업안전 이슈를 대통령이 나서 유럽연합(EU)처럼 국가 운영의 기본 인프라로 재정의한 것은 의미가 크다”며 “산업재해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의지와 지속성, 제도 개편, 현장의 집행력이 관건”이라고 짚었다. 다만 소년공이자 산재 피해자였던 이 대통령이 산업안전 문제를 노동 시간과 강도, 다단계 하청 등 구조적으로 잘 인식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지난해 하반기 국내 산업재해 사망률이 증가한 통계를 직시해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플랫폼·물류·하청 노동처럼 책임이 분산된 영역이 사각지대로 남는 한 비극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어 정부와 기업이 구조적 예방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김 자문관은 보건의료 분야 역시 사회적 안전 측면에서 산업재해 못지 않게 중요하다며 국제 공조를 강조했다. 그는 “대부분의 감염병, 환경 오염, 기후변화 문제는 국경을 초월한다"며 “국제 보건 협력은 외교적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 공공재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이어 “WHO는 지난해 초 미국의 탈퇴에 따른 재정 공백을 메우면서 미래의 팬데믹에 대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한국이 코로나19 팬데믹 때 국제 공조에서 저력을 발휘했던 것처럼 WHO와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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