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과학이 발달하며 과거 불치병이라 여겼던 여러 질병들을 간단히 극복할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여전히 많은 질병들이 희귀병이라는 이름하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방심은 금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도 이들의 공격을 받게 될지 모른다.
박소란 기자 psr@sed.co.kr
1. 무고통의 고통 : 선천성무통증무한증
평생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떨까. 얼핏 영웅들의 '초능력'처럼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부상을 알아차리지 못해 화상을 입거나 손가락을 베이는 등 극히 사소한(?) 부상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천성무통증무한증(Congenital Insensitivity to Pain with Anhidrosis, CIAP)'이 바로 그런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고통은 물론 극단적인 고온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느낄 수 있는 신체적 감각은 배고픔 정도밖에 없다.
이 병을 앓았던 미국의 열 살 소녀 애쉬린 블로커는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고도 상처를 빤히 쳐다보고 있거나 피부가 벗겨질 때까지 손가락을 물어뜯는 등의 행동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14개월 된 여아에게서 이와 유사한 사례가 나타난 바 있다. 지난 1997년 삼성서울병원 소아과학교실 이문향 박사팀의 자료에 따르면 이 아이는 생후 7개월경 치아가 자란 후부터 습관적으로 혀를 조금씩 잘라냈지만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CIAP는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고통을 뇌로 전달하는 신경섬유가 발달하지 못해 나타나는 질병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확한 유전형태 등은 밝혀진 바 없다. 환자수 역시 미국에 약 100명 정도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통계치가 집계되지 않은 상태다.
2. 갈증이 두려워 : 수성 두드러기
물은 생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물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희귀 알레르기성 질환인 '수성 두드러기(Aquagenic Urticaria)'환자들이다. 이들은 물의 온도나 체온 변화 등에 관계없이 피부에 물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마치 벌에 쏘인 것과 같이 그 부위가 빨갛게 부풀에 오르거나 물집이 잡힌다. 몸통을 비롯해 목, 팔 등에 흔히 발병하며 한 번 발병하면 그 증상은 30분에서 1시간가량이나 지속된다.
땀이나 눈물에 의해서도 발진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들에게 수영을 하거나 비를 맞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으며 샤워도 단 몇 초 내에 끝내야 한다. 갈증 해소를 위해 물을 마시는 일 역시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위험한 일이다. 의학계에서는 전 세계 약 30명 정도의 극소수가 이 같은 수성 두드러기에 고통 받고 있다고 추산한다. 물론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해 특별한 치료법도 마련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 영국의 두드러기 전문의 아드리안 모리스 박사는 한 언론을 통해 "출산 시기와 두드러기 시기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이 시기에 갑자기 병에 걸리거나 상태가 호전되는 경우가 많다"고 밝힌 바 있다.
3. 잠꾸러기 기생충 : 아프리카 수면
현대인에게 수면장애는 흔한 질환이다. 하지만 모든 수면장애가 정신적 문제에서 기인하지는 않는다. 한 마리 기생충 때문에 치명적 수면병에 걸릴 수도 있다. '기면성 뇌염'이라고도 불리는 '아프리카 수면병(African Trypanosomiasis)'이 그렇다. 이 병은 '트리파노소마 브루케이'라는 아프리카 토착 기생충에 의해 신경학적 손상을 입어 발병한다. 처음 기생충에 물리면 두통, 발진 등 비교적 가벼운 증상이 나타나지만 이내 기생충이 뇌혈관 벽을 통과해 중앙 신경조직에 침입, 수면주기에 혼란을 겪게 된다.
그 결과,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 있는 신기한 증상이 나타나며 이후 갖가지 합병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끝내 치명적 코마상태에 이르러 사망한다. 놀랍게도 지난 2008년에만 무려 4만8,000명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하라사막 이남의 몇몇 국가에서는 그 발병률이 특히 높으며 현재 5~7만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체체파리에 의해 병원체가 옮겨지기 때문에 감염률과 치사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직 효과적 예방약은 개발되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차적으로 에플로리니틴(Eflornithine)이라는 약제를 권하고 있지만 모든 환자에게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4.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 : 신생아 조로증
먹는 족족 살이 쪄서 고민이라고? 어쩌면 이는 행복한 고민일지 모른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매 10~20분마다 음식을 섭취해야만 겨우 목숨을 구제할 수 있다.
'신생아 조로증(Neonatal Progeroid Syndrome)'은 결코 살이 찌지 않는 질병이다. 최근 이 질병 때문에 화제가 된 미국의 여대생 리지 벨라스케스의 경우 157㎝의 키에 몸무게는 고작 25㎏이며 지방은 0%에 가깝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하루 60끼를 먹지만 치킨, 도넛, 초콜릿 등 어떤 고열량식품도 무용지물이다. 게다가 이 질병에 걸린 환자들은 출생 직후부터 급격한 노화현상이 나타난다. 정확히 말하면 태아 시기부터 노화가 일어나 출생 후에는 그 증상이 더 명확해진다. 마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말이다.
만약 신생아가 노쇠한 생김새, 가령 얼굴은 유난히 작고 피부는 탄력을 잃었으며 코는 꼬집힌 듯 찌그러진 모양을 하고 있다면 신생아 조로증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3%인 약 2억명이 이 병을 앓고 있지만 유전자 돌연변이 때문에 나타나는 조로증의 일종으로 추정되는 것 외에는 정확한 원인과 치료법을 찾아내지 못한 상태다.
5. 간이 10개라도 모자라 : 병적 놀람증
작은 장난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새가슴'으로 불리며 놀림을 받기 일쑤지만 이것이 질병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병적 놀람증(Hyperekplexia)'은 신경계 질환의 하나로 갑작스러운 외부 자극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며 쓰러지는 등 과도한 증상을 보이는 질병이다. 미스터리 한 점은 이때의 뇌파 소견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 증상은 대부분 출생 직후부터 발생하며 발병 순간에는 호흡이 정지하면서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일반인이라면 아무리 갑작스러운 자극이라도 수차례 반복되면 놀람의 정도가 줄어들기 마련이지만 병적놀람증 환자들은 수차례 동일 자극을 반복해도 계속해서 과도한 반응을 보인다. 학계에서는 이 병의 원인을 유전적 요인에서 찾는다.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연구원에 따르면 병적 놀람증 환자들은 5번 염색체 장완(긴 부분) 일부에서 유전성 동질성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때문에 가족력을 가지는 경우가 많고 아주 드물게는 돌연변이로 인해 산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 약 100명이 이 질병을 앓고 있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음주를 자제하면 증상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전해지지만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직 없다.
6. 얼굴이 자라난다 : 말단비대증
어느 날 거울을 볼 때 느닷없이 얼굴이 커진 것을 발견한다면? 늘 끼던 장갑과 늘 신던 신발이 맞지 않다면? 그때는 '말단비대증(Acromegaly)'을 의심해 봐야 한다. 이 병은 뇌하수체 선종에서 성장호르몬의 과잉 분비에 의해 생긴다.
몇 년 혹은 몇 십년간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환자들은 질병에 걸린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다가 30, 40대 이후에야 진단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일단 말단비대증에 걸리면 신체 말단의 뼈가 과도하게 증식해 손, 발, 턱, 코, 입 등이 비대해진다. 이에 따라 얼굴의 생김새가 다소 특이하게 변하며 당뇨병, 고혈압, 심장비대증, 직장암 등의 합병증이 발병한다. 그만큼 사망률은 일반인보다 약 2~3배나 높다.
다행스러운 점은 조기치료를 하면 완치가 가능하다는 것. 치료는 주로 뇌하수체 선종 제거술이나 소마토스타틴(somatostatin), 페그비소만트(pegvisomant) 등의 성장호르몬 억제제를 투여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약물은 주사제만 있어 환자 스스로 투여하기 힘들고 값이 비싸다는 게 단점이다. 또한 성공적인 치료 후에도 이미 변화가 일어난 뼈는 이전 상태로 회복되지 않는다. 현재 100만명당 약 40~60명꼴로 이 질환을 앓고 있으며 통계상 남성보다 여성 환자가 조금 더 많다.
7. 늑대 인간의 부활?! : 선천적 전신 다모증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외화의 주인공 '바야바'를 기억하는가. 몸 전체가 수북한 털로 뒤덮인 바야바처럼 과다한 털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선천적 전신 다모증(Congenital Generalized Hypertrichosis)'을 앓고 있는 이들이다.
이 질병은 털의 양이 기이하게 많은 증상을 가리킨다. 이 병에 걸리면 얼굴 등 일반적으로 털이 나지 않는 부위까지 몸 전체가 온통 새카만 털로 뒤덮이게 된다. 이는 내분비선 질환이나 호르몬제 복용 등의 부작용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신체의 은밀한 일부 부위에 털이 증가하는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인종, 성별, 연령과 무관하게 나타나며 털을 아무리 제거해도 더 많이 자라난다.
때에 따라 입이 돌출되거나 입술이 두꺼워지는 증상이 함께 일어나 얼굴 생김새가 마치 늑대와 흡사해져 '늑대 인간 증후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까지 이 질병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난해 비로소 중국의학과학원과 베이징연합의과대학 연구진에 의해 17번 염색체의 결함 때문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염색체의 결함이 DNA 복제 때 유전자 4~8개에 영향을 미쳐 이런 증상을 일으킨다는 것. 현재 이 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은 전 세계 약 50~100명 정도로 집계됐으며 치료법은 아직 연구 단계에 있다.
8. 현실 세계의 엄지공주 : 원발성 왜소증
최근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의 주인공은 10㎝의 소녀다. 실제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원발성 왜소증(Primordial Dwarfism)'에 걸렸다면 가능하다.
총 200여 종류의 왜소증 가운데 가장 가혹한 병이라 칭해지는 원발성 왜소증은 출생 시부터 키와 몸무게가 평균치를 훨씬 밑돌고, 성장은 하지만 그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질병이다. 왜소한 모습이 마치 창백한 인형과 같다하여 종종 '인형소녀', '인형소년'으로 불린다.
전문의들은 환자들이 대체로 1살을 전후해 목숨을 잃게 된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얼마 전 인형소녀로 유명세를 떨친 캐나다의 쥬르댕 브롬리는 당초 예상을 뒤엎고 여섯 살인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다. 하지만 현재 그녀의 키는 66cm, 몸무게는 4.5㎏에 불과하다.
이 질병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성장호르몬 결핍이나 영양 부족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유전적 요인을 언급하고 있다. 정상 부모라도 원발성 왜소증과 관련한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면 이 유전자들이 서로 결합해 원발성 왜소증의 아이를 출산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외 자세한 사항은 아직 불분명하다. 치료법도 아직은 없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100명 정도가 이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 돌처럼 굳어지는 병 : 진행성 골화성 섬유이형성증
뼈는 몸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 지지조직이다. 뼈가 없다면 사람은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 바닥을 기어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온몸이 뼈라면? '진행성 골화성 섬유이형성증(Fibrodysplasia Ossificans Progressiva, FOP)'은 온몸의 근육과 힘줄이 점점 뼈로 바뀌어 결국 모든 관절이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질병이다. 일명 '뼈의 감옥'으로도 불린다.
이 병에 걸리면 얼굴까지 기형적으로 변해 코로 숨을 쉬거나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뼈와 뼈가 붙어 심각한 통증을 동반하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그 통증을 감당할 수 없으며 자칫하면 하루아침에 팔이나 다리를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병의 조기진단은 매우 어렵다. 태어났을 때는 단지 엄지발가락이 휘어진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 증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자라면서 서서히 심각한 장애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FOP에 걸려 얼굴이 기이하게 돌출된 모습이 마치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과 같다하여 '아바타걸'로 불리며 최근 전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중국의 우샤오엔이라는 여성은 9살이 되어서야 겨우 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그녀는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코나 입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합병증으로 실명상태에까지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이 극단적 질병은 최근까지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난 200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아서 카플란 교수가 이끈 8개국 공동연구팀에 의해 골 형성 단백질 수용체의 일종인 ACRV1유전자의 돌연변이 때문임이 밝혀졌다. 이제 막 원인이 밝혀진 만큼 치료법은 아직 연구 단계다.
FOP는 200만명당 1명꼴로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국내에는 약 20.30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0. 약이 병을 부른다 : 중독성 표피괴사증
한 알의 약이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지만 온갖 불행을 몰고 올수도 있다. '중독성 표피괴사증(Lyell syndrome)'은 대부분의 의약품이 원인이 돼 발병하는 중증 약진(藥疹)의 하나다. 발열과 함께 온몸에 광범위한 붉은 반점이 나타난 후 급속히 수포를 형성, 종국에는 온몸이 짓무르게 되는 끔찍한 질병이다.
이식편대숙주병 등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여러 질병들이 있지만 그 강도에서 중동성 표피괴사증을 따라올 질병은 없다. 한번 발병하면 예후가 좋지 않아 설령 피부에 나타난 증상이 완쾌되더라도 눈이나 신장, 호흡기, 소화기 등에 치명적인 장애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한 보고에 따르면 사망률이 20~30%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100만명당 1명이 이 질병을 앓고 있으며 이중 90% 이상이 의약품에 대한 이상반응으로 발병했다. 그중에서도 항경련제, 항류마티스제, 페니실린계 항생제, 해열진통제 등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상은 보통 약물이 투여된 후 몇 시간 내로 바로 나타난다. 극소수지만 바이러스 감염 등에 의해 발병하기도 한다.
이 외 발병 원인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의약품 투여에 앞서 발병을 예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방도 쉽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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