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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Life]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



"식민사관 바로잡으려 겸재·추사 연구… 이젠 '인생 반려자' 됐죠"
우리 문화재 반백년간 가꾸며 진경화풍·추사체 가치 재조명
한국 미술에 빠져 결혼도 안해… 휴대폰 없이 서가에 묻힌 삶 행복
조선 문화 우수성 알리기 위한 500년 왕릉 연구서도 내놓을 것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우리 문화재를 지켰고 가헌 최완수(72·사진)는 그 문화를 가꿨다. 간송은 일제 치하의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면서 도래할 문화 부흥기를 꿈꿨고 가헌은 그 꿈을 이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간송미술관의 학예실 격인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가헌 최완수 소장이 간송미술관에 처음 들어온 게 1966년 봄이었으니 올해로 49년째, 우리 문화 연구에만 반백년 일생을 바쳤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화풍'이 갖는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서체를 체계적으로 분석·연구해 문화 자부심을 일으켜 세운 이다. 관람 대기자가 수백m 줄을 서 3시간은 기다려야 볼 수 있다는 혜원 신윤복(1758~?) 신드롬이나 단원 김홍도(1745~1806) 열풍을 일으킨 전시들도 그에게서 나왔다. 결혼 대신 겸재와 추사가 인생의 반려자였다. 풀 먹인 하얀 모시 한복에 정갈한 옥색 두루마기를 입고 휴대폰도 없이 해외여행도 안 해본 21세기 선비인 그는 영락없이 '별에서 온 그대'다. 세속적 즐거움은 덜할지언정 서가에 묻혀 사는 게 마냥 행복해 늙지도 않는다.

6·25전쟁이 발발한 그 이듬해 초파일(석가탄신일)이었다. 부친은 열 살이던 어린 완수에게 "할머니를 모시고 절(보덕사)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극락전으로 따라 들어가 시키는 대로 절하고 일어났더니 눈앞에 '잘 생긴 사람'이 앉아 있었다. 처음 본 불상이었다. 인물과 풍채가 수려했으나 한 군데, 머리가 이상했다.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고 소라고동 같은 게 다닥다닥 붙어 있던' 부처상을 두고 왜 저런 머리를 하고 있느냐고 할머니께 물었고 큰 스님께도 여쭸다. 당황했는지 스님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6년간 수행하는 동안 보리수 열매가 떨어져 쌓였다더라"고 얼버무렸다. 아이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고 "내가 꼭 그 이유를 알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최 소장이 미술사학자가 된 계기다. 어려서는 미술사가 뭔지도 몰랐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게 천성인지 꽃길을 찾아다니고 기이한 새를 즐겨 길렀을 뿐. 옛 것에 대한 애정과 존중은 고풍스러운 집안 분위기에서 체득했다.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는 고향 예산에서 서울로 유학해 경복고에 진학했죠. 1학년 때 만난 김창현 선생이 한문을 가르쳐주셨고 고3 담임도 맡아주셨습니다. 그때 스승께 배운 것은 고문뿐 아니라 조선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었어요. 덕분에 1961년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하면서 '식민사관을 바로잡고 말겠다'는 포부를 갖게 됐죠."

그러나 일제가 정책적으로 구축한 식민사관을 깨부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에게 인문대학 신설학과인 고고미술사학과가 눈에 들어왔다. 금세 빠져들었다. 관련 강의를 모조리 듣고 졸업 무렵에는 미술사를 부전공으로 택했다.

"미술사를 통하면 식민사관 극복의 지름길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문헌 기록으로 갑론을박할 일도 미술작품은 눈으로 금방 확인해주니까요. 일제가 사료를 조작한 것은 아닙니다. 해석의 문제를 통해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싸움질의 연속으로 기록된 당쟁의 역사는 일제의 (망국논리를 전개하기에) 좋은 먹잇감이었죠. 일제는 이를 식민사관적 해석으로 왜곡했지만 당쟁이 치열했던 것은 그만큼 시대가 건전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일당독재가 사회부패를 불러오는 것이죠."

당쟁을 근거로 우리 민족성을 폄하하며 국력약화의 원인으로 지적한 식민사관에 정면으로 맞서 최 소장은 당파싸움이 극에 달했던 숙종 이후 18세기를 조선 문화의 절정기인 '진경(眞景)시대'로 규정했다. 진경은 겸재 정선의 화풍에서 유래한 말로 중국을 넘어선 우리 고유의 주체적 풍경과 문화를 일컫는다. "이념이 뿌리라면 예술은 꽃"이라는 그의 지론이 맞았다. 조선 문화가 형편 없었다던 일제 사관에 반박할 근거가 됐다.

대학을 졸업한 최 소장은 196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급선무는 열 살 때부터 품었던 '부처 머리'의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방 국립박물관 순환 근무를 자청해 경주박물관으로 내려갔다. 불교미술의 보고인 경주 전역을 샅샅이 답사했다. 안 밟아 본 경주 땅이 없을 정도라 지금도 경주는 제2의 고향이다.

"그해 5월 초 선덕사(당시 중생사) 마당에 묻혀 있는 목 떨어진 보살상을 조사하고 있었어요. 종일 일하노라면 나를 구경하는 그림자 떼가 모여들었다가 별 재미 없으니 이내 흩어지고는 했는데 하루는 해거름까지 긴 그림자 하나가 옆에 있더군요. 고개를 드니 중년 신사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 최순우야, 미술과장이라고" 하시는데 세상에, 나는 제 상관도 모르는 괴짜였던 겁니다. 소문을 듣고 4㎞ 산길을 걸어 찾아오셨더라고요."

각별한 인연이 된 스승과의 첫 만남이었다. 최순우는 김원룡·진홍섭 등 학자들과 경주 지역의 흩어진 문화재를 발굴·정리하는 '오악조사단'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내 최 소장은 복원조사에 불려다녔다. 신임을 얻었던 것이다.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된 최순우는 1966년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전신)이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준비하는 일에 관여했고 간송의 장남 전영우 간송문화재단 이사장에게 최 소장을 소개했다. 두 '문화지킴이'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 최 소장은 1966년 5월부터 간송미술관 보화각 연구실에 둥지를 틀었다.

간송 전형필 집안과의 인연은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간송 소장품을 정리하던 중 추사와 겸재의 작품을 접하고는 무릎을 쳤다. "이것으로 식민사관을 극복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습니다. 1971년 10월에 간송미술관 첫 전시를 겸재 작품으로 꾸렸죠. 이전까지 우리 서화는 중국 남종화나 북종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겸재는 남북 화법을 주역의 원리를 통해 음양원리로 조화를 이루며 독자적이면서도 우수한 '진경산수'를 완성했습니다. 그 시기를 전후해 조선 문화는 최고 황금기를 누렸고요."

이듬해 봄 전시는 추사 김정희를 주인공으로 세웠다. 제대로 된 추사 연구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사 '금석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고향 삽교천 건너편에 추사 생가가 있는 것도 인연이라 여겼다.

"서체는 시대마다 바뀝니다. 추사는 중국 역대 서화 변천을 정리하고 서체 특징들을 종합했죠. 거기다 왕희지·구양순·한석봉 같은 개인의 글씨버릇까지 익혀서 혼합했습니다. 모든 서체를 종합하고 융합해 '추사체'로 종결한 것이죠."

어릴 적 의문에서 시작한 불상연구는 저서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로 집대성했고 겸재 연구는 3권짜리 '겸재 정선'으로, 30대 때 처음 완당전집(완당은 김정희의 다른 호) 번역에 도전해 '추사집'을 냈던 것은 그간의 추가 연구를 더해 올해 안에 2,000쪽짜리 개정증보판으로 나올 예정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평생 매달린 조선왕릉에 관한 연구서도 내놓을 계획이다.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는, 일정한 주제가 중단 없이 지속된 미술품이 뭐였나 따져보니 '왕릉'이더군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왕릉이 제작되지 않은 때는 없었으니까요. 1977년부터 왕릉조사를 시작해 관련 예술품 변천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조선의 문화를 긍정적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나의 가설을 왕릉 조사로 확인할 수 있었고 이것을 500년 통사로 엮어 변천사 정리를 마무리 중이지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얘기하는 그의 눈은 소년처럼 반짝인다. 연애도 결혼도 끼어들 틈 없이 치열한 삶을 산 그 역시 간송미술관의 보물 중 하나다.

He is…

△1942년 충남 예산

△1961년 서울 경복고 졸업

△1965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

△1965~66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1966년~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



△1975년~서울대·연세대·이화여대 등 출강

△2010년 우현학술상 미술상 부문 수상

△2010년 위암 장지연상 한국학 부문 수상

△2012년 일민문화상 수상

◇ 주요 저서

'겸재 정선(전3권·현암사)'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전3권·대원사)' '명찰순례(전3권·대원사)' 외 다수







"한민족은 유라시아의 문화 종결자"

대륙문화서 핵심만 받아들여 우리의 고유색 입혀
독립성 잃지 않고 우수하게 발전시킬 방법 찾아야


"우리나라는 지정학상 대륙의 종착역입니다. 유라시아의 모든 문화가 종착역을 향해 달려왔고 우리는 그 모든 문화를 다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방대한 문화에 깔려 죽을 수도 있으나 우리 조상은 현명했기에 밀려드는 문화의 핵심만 받아들인거죠. 조선의 전기 문화는 주자성리학을 받아들였기에 중국풍을 띠지만 조선 후기 문화는 조선성리학 이념을 기반으로 우리 고유색이 드러나면서 기존 중국문화를 우리 고유의 것으로 완결 처리한 결과물이죠. 통일신라는 석굴암에서, 고려는 팔만대장경과 상감청자에서 유라시아 문화의 집대성을 보여줬다면 조선시대는 겸재의 진경산수화에서 중국 남종·북종화의 이상적 조화를 볼 수 있고 추사체에서 중국 서체 변천사를 융합한 종결처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민족입니다."

최완수 소장은 우리 민족을 유라시아의 '문화 종결자'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과제로 내건 '문화융성'이나 '창조경제'에 대해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를 묻는다면 최 소장의 이 같은 주장이 해답이 될 수 있겠다. 우리 안에 저력이 있다는 뜻이다. 역사는 현재를 반추하는 거울인 만큼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외교적 갈등 상황에서도 우리 '줏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최 소장은 조언한다.

"우리가 유라시아의 종착역이자 대륙문화라면 일본은 대륙문화와 격리된 해양문화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대륙문화가 우위에 있었는데 근대 이후 서구 문명이 해양문화의 경로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해양문화가 우리를 압도하는 역전이 일어나기 시작해 우리가 함몰된 것이고 식민지 지경까지 이른 것이죠. 따지자면 우리는 일본이 아닌 서구에 의해 식민지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독자성을 지키던 조상들의 태도를 상기해야 합니다. '진경문화'는 대륙문화의 종결체로 우리 독자성을 형성하면서 한 차원 높게 발전시켰던 문화입니다. 아무리 독립성 강해도 수준이 낮으면 타 문화에 잠식당합니다. 지금 해양문화에 압도당하는 상태에서 우리의 독자성을 잃지 않고 더 우수하게 발전시킬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우수한 독자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한국 미술의 정수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9월28일까지 '간송문화전'의 '보화각' 전시에서 선보이고 있다.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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