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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안경신과 조마리아

박창명 병무청장

박창명 병무청장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일제의 식민지배 야욕이 본격화하던 1909년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중근 의사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죽음의 문턱에 선 아들에게 자신을 염려하지 말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을 당부한다. ‘과연 범이 범을 낳았다’는 혹자의 탁견대로 여걸다운 일갈이었다.

사실 안 의사의 조국애와 결연한 기개는 많은 부분이 어머니의 추상같은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망명을 결심한 안 의사가 대의와 효도 사이에서 망설일 때 “집안일도 생각하지 말고 남자답게 싸우라”고 독려한 것도 조 여사였다. 안 의사 서거 이후에도 조 여사는 66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주며 정신적 지주로 불렸던 그는 안중근의 어머니이기 전에 또 하나의 독립운동가였다.

안경신의 삶 또한 굴곡의 시대를 온몸으로 헤쳐 간 위대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3·1만세의거에 참여했다가 구금되었던 안경신은 여성독립운동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에 합류해 모금한 군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해 활동하다 1920년 결사대의 일원으로 평양경찰서 폭파에 가담한 뒤 일경에 체포돼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당시 결사대원 중 여성은 안경신이 유일했다. 거사를 결행할 때 이미 임신한 상태였던 그녀는 도피과정에서 가까스로 출산했지만 투옥되는 바람에 아이는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선생의 어머니 역시 충격으로 얼마 못 가 세상을 떴다. 무장항일투쟁의 최전선에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삶을 살았으나 이후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을 만큼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1962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식민지배와 봉건적 인습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어둠의 시대를 밝힌 여성은 이들 외에도 많다.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와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등 수많은 여성들이 항일의 선봉에서 남성 동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오랫동안 남성 독립운동가들에 가려 제대로 조명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 불의에 맞서는 실천하는 양심으로 시대의 표상이 돼준 우리의 자랑스러운 어머니, 위대한 여성 선각자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박창명 병무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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