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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외교관 어디 없소?

이런 외교관 어디 없소?





반반(半半). 스웨덴 사람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는 크게 두 가지로 기억된다. 재벌 가문의 기대주이자 휴머니즘에 빛나는 외교관. 불과 33년 세월을 살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으나 그는 세계 곳곳에서 추앙받고 있다. 윈스턴 처칠에 이은 2번째 미국 명예시민이며 이스라엘과 독일, 미국, 헝가리 등 세계 12개국의 동상과 기념관 등에는 추모객이 몰린다.

라울이 추앙받는 이유는 숭고한 희생 정신 때문. 나치가 학살하려던 유대인들을 목숨 걸고 구출해냈다. 스웨덴판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으로 불리지만 구출한 인원으로 따지면 쉰들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오스카 쉰들러의 구출 명단에 오른 사람은 1,200여명. 라울이 구출한 유대인은 쉰들러보다 최소한 10 배 이상 많다. 10만명 이상의 유대인이 라울 덕분에 살아났다는 추정도 있다.

라울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스웨덴 최대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에서 태어나 그룹 전체를 상속받을 수도 있었다. 사회 생활의 출발도 은행원으로 시작했다. 1912년 태어나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가 은행에 발을 들일 때는 누구나 가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여겼다.

라울이 인생 항로를 바꾼 계기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감시할 중립국 외교관이 필요하다는 소식에 주저 없이 직업을 바꾸고 부다페스트를 찾았다. 스웨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가 부다페스트에 부임한 시기는 1944년 7월. 승승장구하다 기세가 꺾인 나치 독일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Nazi’s Final Solution)’이 기승을 부리던 때다. 더욱이 부다페스트에는 악명높은 실무 총책인 아돌프 아이히만(여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당사자)이 눈에 불을 켜고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라울은 우선 스웨덴 정부 명의의 여권을 유대인들에게 발급했다.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지 않은 가짜 여권이었지만 스웨덴 여권을 지닌 유대인에게 독일은 손도댈 수 없었다. 스웨덴인 대우를 받았으니까. 라울은 자기 돈을 털어 부다페스트 시내에 건물 23채도 사들여 스웨덴 정부 건물로 선포하고 유대인들을 불러 모았다. 독일군은 이 곳에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여권 발행과 안전 가옥 수용으로 라울이 직접 구출한 유대인은 1만3,000명~3만3,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라울은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등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려던 독일군 사령관에게 ‘전범으로 고발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라울 덕분에 수용소행을 모면한 헝가리 유대인이 약 7만여명. 아돌프 아이히만을 비롯한 독일군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으나 방법이 없었다. 독일 정부가 중립국인 스웨덴과 관계 악화를 우려해 라울에 대해 어떤 적대행위나 압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위기는 해방과 함께 찾아왔다.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주한 직후인 1945년1월17일, 라울 발렌베리 가 갑자기 사라졌다. 납치 의혹을 받던 소련은 침묵으로 일관하다 1957년에야 ‘라울은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던 중 1947년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소련 당국의 발표가 맞다면 체포된지 2년 6개월 만에 35세 나이로 죽은 셈이다. 그러나 진상은 확실치 않다. 1980년대에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라울을 봤다는 사람부터 처형설까지 나돌았다.

진상이 불분명한 것은 또 있다. 소련은 왜 비밀리에 체포하고 감금했을까. ‘악의 제국’인 소련이 행한 악행이라고만 생각했으나 1996년 비밀에서 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보전문서에 따르면 라울 발렌베리는 CIA의 전신인 OSS의 비밀 첩보원으로 활동했다. 소련은 독일 스파이가 아니라 미국의 스파이로 여기고 라울을 체포한 셈인데 여기에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다. 미국과 공식적인 동맹이던 소련이 왜 중립국 외교관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체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헝가리 우익 저항세력을 견제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는 해석이 나오는 정도다.

라울의 죽음은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그 고귀한 삶은 ‘발렌베리 그룹’의 명성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스웨덴 국부(GDP)의 30%를 생산한다는 발레베리 가문은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회 복지를 위한 고율의 세금 회피를 위해 본사를 외국으로 옮겼던 다른 재벌과 달리 발렌베리는 ‘기업은 국민과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며 끝까지 스웨덴에 남았다.

7대째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의 원칙도 명확하고 투명하다. 직계의 6촌 이내에서 가업의 승계자를 찾되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대학까지는 학비를 대주지만 자력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스웨덴 해군의 장교로 복무해야만 가업의 승계자 자격을 얻는다. 핏줄로 이어지는 경영권이 국민의 존경과 사랑 속에 존속되는 비결에는 희생과 솔선수범, 라울로 대표되는 숭고한 인간애가 깔려 있다.

라울 발렌베리와 그의 가문을 보며 우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 그룹이 발렌베리를 벤치마킹하려다 포기한 적이 있다. 가문 승계의 비법에만 관심을 가졌던 탓으로 보인다. 반쪽의 권리만 생각하고 다른 반쪽의 의무는 소홀히 하는 몰염치는 비단 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라울 같은 외교관이 있는가. 칠푼이 가니 반푼이가 오는가. 인간에 대한 사랑은커녕 의리마저 저버린 뺀질이가 대놓고 고개를 드는 세상이라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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