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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국제화의 고통…콜레라





1832년 2월13일, 런던 병원마다 구토와 설사, 탈수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런던은 공포에 떨었다. 전형적인 콜레라 감염 증상이었기 때문이다. 콜레라가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를 휩쓸 때도 영국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섬나라인 영국까지 콜레라균이 바다 건너 전염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831년 말 잉글랜드 북동부 선덜랜드에 발틱해에서 출항한 선박 편으로 콜레라균이 들어왔다고 보고됐지만 런던은 안전하다고 믿었다. 겨울철에는 균이 전염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믿음은 바로 부서졌다. 런던에서만 6,536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에서는 콜레라를 ‘호열자(虎列刺)’라고 불렀다.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고통을 준다’는 뜻의 무시무시한 이 질병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편 순조 21년(1821년) 8월22일자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 이름도 모를 괴질이 서쪽 변방에서 발생하여 도성에 번지고 여러 도에 만연하였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먼저 심하게 설사를 하고 이어 오한(惡寒)이 발생하는데, 발에서 뱃속으로 치밀어 들어 경각 간에 10명 중 한두 사람도 살지 못하였다. 이 병은 집집마다 전염되어 불똥 튀는 것보다 더 빨리 유행되었는데, 옛날의 처방에도 없어 의원들이 증세를 알 수 없다.”

영어 단어 ‘콜레라(Cholera)’는 ‘서양 의학의 아버지’라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가 처음으로 언급한 용어라고 한다. 2,500여 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얘기다. 16세기께 인도에서도 발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도를 점령하면서 콜레라의 실체를 알게 된 유럽인들은 갠지스강 유역에서 발생하는 풍토병으로 여겼다. ‘유럽인은 인종적으로 강인해 콜레라에 걸리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왔다. 콜레라가 국제적 전염병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시기는 1817년. 불과 일주일 사이에 인도 캘커타 주둔 영국군 5,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공포와 병원균이 국경을 넘었다.

콜레라균은 인도와 중동, 오스만튀르크를 지나 러시아, 동유럽, 독일, 프랑스 등 서쪽으로 퍼졌다.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25만 명이 감염돼 10만 명이 죽었다. 프랑스에서도 1831년 10만 명이 콜레라로 숨을 거뒀다. 치명적인 전염병에 노출된 영국에서도 한 겨울에 2만여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도 번졌다. 막 시작된 아일랜드인들의 미국행 열풍을 타고 콜레라균도 대서양을 건넜다. 북미 대륙과 유럽을 출항한 선박 편으로 콜레라균이 전이된 중남미 지역에서는 아예 풍토병으로 자리 잡았다. 동쪽으로도 번졌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남은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병원균에 직면해서도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외출을 삼가거나 죽은 시신을 빨리 수습하는 게 고작. 병원균의 원인에 대한 치료 방법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콜레라균은 주기적으로 활개쳤다. 사라졌다 싶으면 다시 나타났다. 1838년 영국에서 재발한 콜레라는 1만 4,13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5만여 명이 사망했다는 추정도 있다. 지구촌 역시 20세기 중후반까지 콜레라에 시달 렸다.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콜레라 대유행기는 모두 7차례에 이른다.

1차는 1816년부터 1826년까지. 영국은 여기에서는 비켜갔다. 1차와 2차(1829~1851)· 3차(1852~1860) 콜레라 유행기의 사망자 누계는 약 1,500만 명. 4차(1863~1875)·5차(1881~1896)·6차(1899~1913)·7차(1961~1975) 유행기에는 2,3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과 인종을 불문하고 퍼져 나간 콜레라 감염 지도에서 영국 사례가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어느 나라보다 전염 속도가 빨랐으며 치료방법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왜 빨리 퍼졌을까.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도시 빈민의 생활 여건이 크게 나빠진 탓이다. 1849년의 사망자 5만 명도 주로 도시 지역에서 나왔다. 매연이 심한 도시에서 사망자가 속출하자 의사들의 고정 관념은 더욱 굳어졌다. 공기를 통해 퍼지는 독 기운이 콜레라의 원인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의사, 존 스노(John Snow)는 다르게 생각했다. 선덜랜드에서 살 때 영국에서 최초 발병한 콜레라를 지켜봤던 그는 오염된 물을 의심했다.



감염 지역과 상수도 공급원을 점검하던 스노 박사는 하수를 버리는 곳과 인접한 상수도 시설에서 공급하는 물을 먹은 사람들이 콜레라에 걸렸다는 점을 밝혀냈다. 백과사전 편집자인 존 클라크를 비롯해 6인 이 공저한 ‘지도 박물관-역사상 가장 주목할지도 100가지’에 따르면 스노 박사가 ‘콜레라 지도’를 발표한 뒤 런던의 발병률이 뚝 떨어졌다. 스노 박사는 콜레라 지도 발표 이듬해인 1855년 ‘콜레라의 전염 방식에 대하여’란 책자를 발간, ‘상수도를 비롯한 생활 환경을 깨끗하게 개선해야 콜레라를 퇴치할 수 있다’며 보건 위생의 중요성을 알렸다.



빅토리아 여왕이 출산할 때 부분 마취를 했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던 스노 박사가 제시한 해법은 영국 사회에 바로 먹혔다. 도시 빈민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고 상수도원 정화에 나섰다. 가장 먼저 템스 강변에 석축을 쌓았다. 석축 내부에는 벽돌로 하수로를 만들어 각종 생활 하수와 공업용 폐수를 바다로 흘려보냈다. 세계 최초로 건설된 720㎞짜리 ‘분류 하수관’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런던 시민에게 보다 안전하고 깨끗한 물이 공급되고 강물도 맑아졌다.

영국 총리를 지낸 정치가이며 문필가 디즈레일리가 ‘강변의 의사당에서 숨 쉴 수도, 견딜 수도 없게 만드는 지옥의 웅덩이’라고 한탄했던 템스강의 악취도 없어졌다. 콜레라의 공포 역시 사라졌다. 콜레라에 대한 대응은 목욕 문화와 개인위생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상수도와 하수도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부자들의 전유물이던 실내 욕조가 자리 잡았다. 집집마다 욕조가 들어섬에 따라 사회 전체의 위생 의식과 수준 역시 크게 높아졌다.

콜레라에 대한 스노 박사와 영국 사회의 대응은 반(反) 기업적이었을까. 콜레라의 원인을 조사하던 스노 박사는 상수도 회사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오염원 근처에 상수도원을 운영하던 회사는 스노 박사가 ‘콜레라 지도’를 과장해서 작성했다는 헛소문까지 퍼트렸다. 상수도 회사들의 주장이 먹혔다면 영국 사회는 발전했을까. 콜레라 창궐의 참상은 인구론을 주창한 경제학자이며 목사이자 신자유주의의 뿌리 격인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가 사회 발전을 위한답시고 제시한 처방과 일치한다. 맬서스는 ‘인구 억제를 위해 빈민층의 결혼과 출산을 억제하고 빈민가를 더 좁고 더럽게 만들어 질병이 창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호랑이에게 물어뜯기는 것처럼 아픈 치명적인 질병 콜레라 퇴치 과정은 지속적 경제 성장과도 맥락이 닿는다. 도시 빈민을 콜레라에서 구원하고 환경을 깨끗하게 만든 스노 박사와 빈민굴에 질병이 창궐하도록 내버려 두자던 맬서스 목사. 둘 중 누가 자본주의 경제에 이로운 인물일까. 자연환경 보호 역시 마찬가지다. 템스강이 죽어갈 때마다 영국은 강을 자연상태로 돌리려고 애썼다. 템스 강이 죽음의 강에서 생명의 강으로 악취가 진동하는 웅덩이에서 시민들이 수영하고 물고기가 돌아오는 하천으로 돌아오면서 영국 경제도 활력을 얻고 있다. 질병과 환경, 경제는 별개가 아니라 함께 간다. 국제 경제가 어려워서 그런지 콜레라가 다시 고개를 든단다. 대유행기가 지났을 뿐 아프리카와 중남미에서는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한국에서도 매년 환자가 발생한다.

/권홍우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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