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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늙어야 사람이 산다…실비오 게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이 사람이 등장한다. 우파와 좌파를 가리지 않고 대안으로 생각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실비오 게젤(Silvio Gegell). 독일 혈통이고 평생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지만 그는 국적도, 사상도 불명확한 사람이다. 게젤의 생각은 간단하다. ‘세상 모든 게 늙는 데 돈은 왜 안 썩나. 돈에도 생명이 있어야 경제가 살고 인간들의 세상이 산다.’

게젤이 돈의 힘과 생명에 주목한 계기는 1890년 발생한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 나이 28살 때였다. 1862년 3월17일 독일계 부모의 9남매 중 일곱째로 벨기에에서 태어난 그는 이렇다 할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대학에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대학 진학을 마다한 그는 우체국과 상점을 거쳐 25세 때 아르헨티나로 이주, 수입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돈의 속성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890년 발생한 베어링 위기.*

자신은 물론 주변의 상공인들이 도산하는 원인을 찾던 그는 독학으로 경제학 공부에 매달렸다. 찾은 대안이 ‘늙는 돈(aging money)’. 화폐 발행 이듬해부터 일정 비율씩 가치를 깎는 ‘자유 화폐’를 발행하자는 주장을 1906년에 내놓았다. ‘역(-)이자’로 돈의 축재 기능을 없애고 교환 기능을 극대화한 것이다. 오늘날의 마이너스 금리와 비슷한 발상이다. 게젤이 제시한 늙는 돈의 원리는 간단하다. 돈이 발행된 일정 시점 이후부터는 액면가 이하의 가치를 갖게 하는 것. 시간이 많이 흐르면 돈의 가치는 완전히 없어진다. 돈의 죽음!

사업가로, 재야경제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게젤은 1919년 비상과 추락을 동시에 맛봤다. 세계 1차 대전에 패한 독일에서 단명했던 바바리안 소비에트공화국의 재무장관에 임명됐으나 불과 6일 뒤 유혈 쿠데타로 쫓겨났다. 1930년 68세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뜻을 펼치지 못했지만 자유 화폐는 결코 죽지 않았다. 대공황기에 ‘자유 화폐’를 도입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지에서는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돈을 사용하려는 수요로 화폐 유통속도가 빨라지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경제위기를 맞은 오늘날 게젤의 ‘늙는 돈’은 일자리 창출과 지역공동체 발전을 위한 최고의 처방전이자 ‘탐욕을 배제한 시장경제’라는 평가 속에 급속히 퍼지고 있다.



지역화폐와 대안화폐의 뿌리인 게젤의 이름은 갈수록 빛난다. 미국 재무부 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맨큐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 ‘화폐의 종말’을 지은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 등 쟁쟁한 경제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들먹인다. 게젤에게 가장 후한 점수를 준 사람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서문에서 케인스는 이렇게 썼다. ‘마르크스보다 게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시대가 올 것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역사적으로 베어링 위기는 두 번 일어났다. 두 번째 위기가 발생한 시점은 1995년 2월. 세계가 몸살을 앓았다. 233년 전통을 가진 베어링브러더스은행을 비롯, 증권사와 투자신탁 등 계열사가 모두 망했기 때문이다. 망조는 어이없게도 싱가포르 지점의 한 직원으로부터 비롯됐다. 실수로 선물 계약에서 큰 돈을 번 행원 한 사람의 욕심과 회계 조작이 거대 금융그룹을 망가뜨렸다.

첫 번째 위기는 1890년 11월 터졌다. 아르헨티나의 밀 농사 흉작과 정변으로 외채 상환이 불투명해지면서 영국 최대은행이던 베어링 브라더스도 위기에 빠졌다. 잉글랜드 은행과 영국 내 2위 은행이던 로스차일드의 지원으로 베어링 브라더스는 위기를 극복했으나 아르헨티나 경제는 곤두박질쳤다. 경제사가 찰스 킨들버거가 명저 ‘광기, 패닉, 붕괴-금융 위기의 역사’에서 국제 공조의 우수 사례로 꼽은 베어링 위기를 직접 경험한 게젤은 새로운 세상을 그렸다. 그 결과가 바로 늙은 돈. 게젤은 ‘돈이 썩어야 인간 세상이 산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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