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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 사건과 '거문도 점령'





1885년 3월29일 밤 11시, 아프가니스탄 북부 판데(Panjdeh). 아프가니스탄군이 러시아군에 총을 쐈다. 영국제 무기로 무장한 인도 세포이 병사 250명과 뱅갈 기마 창병 200명을 포함해 병력 1,800여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군은 승리를 자신했으나 결과는 딴판. 학살에 가까울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아프가니스탄군은 전사자 600명이 발생한 반면 러시아군 전사자는 40명. 아프가니스탄군은 900명이 죽고 러시아군은 11명만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력 차이가 애초부터 컸다지만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아프가니스탄군이 러시아측의 계략에 말려 들었기 때문이다. 싸움이 발생한 판데는 사막 지대인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작은 오아시스.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하 정책을 펼쳐온 러시아의 군대는 국경의 완충지대인 판데를 점령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 경쟁을 다룬 저작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쓴 피터 홉커크(1930~2014)에 따르면 러시아는 양동 전략을 구사했다. 우선 영국을 속였다. 영국에 ‘영토 욕심이 없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뒤로는 병력을 보냈다. 러시아는 인도와 페르시아 일부를 점거해 동양함대를 키울 심산이었다.

인도를 대영제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지역으로 여기던 영국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러시아가 6개월 전 북부의 전략적 요충인 메르프를 교묘하게 합병한 뒤끝. 영국의 경계심이 극에 오른 상황이었다. 영국은 직접 대응할 생각이었으나 능력이 없었다. 1885년 새해 들자마자 수단 카르툼에서 원주민들의 봉기를 진압하던 찰스 고든 장군이 참수 당한 마당에 아프가니스탄까지 병력을 증파할 여유가 없었던 것.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에 직접 상대하지는 못해도 아프가니스탄의 유럽식 군대가 러시아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조심스럽게 대응했다. 판데에 러시아군이 나타났다는 정보에도 바로 대응하지 않았다. 러시아군의 코마로프 장군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방법을 썼다. 아프가니스탄군 사령관에게 ‘겁쟁이’라는 모욕적인 편지를 보내도 반응이 없자 병사들을 조롱했다. 코마로프의 계획대로 자존심 강하고 성정이 급한 아프가니스탄 군은 계략에 걸려들었다. 아프가니스탄 군 진영에서 총알 몇 발이 우발적으로 발사되자 러시아군은 기다렸다 듯이 전투에 임했다. 선제 공격 당했다는 명분을 앞세운 러시아군은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러시아가 판데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일주일 뒤 런던에 전해지고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런던 증시가 폭락하고 야당인 보수당은 자유당 내각의 나약한 대응을 질타하고 나섰다. 의회가 1,100만파운드의 전시예산을 편성한 뒤 영국 본토는 물론 식민지 곳곳에서도 전쟁 상황에 들어갔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리던 영국의 전성기, 지구촌 전역이 긴장상태에 접어든 가운데 판데 사건의 유탄은 엉뚱하게도 조선으로 튀었다. 영국 극동함대는 전시 비상계획대로 조선의 거문도를 무단 점령(4월15일)해 버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포진한 러시아 극동함대와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판데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영국과 러시아는 길고 긴 협상에 들어갔다. 영국 주요 언론들이 연일 러시아와 전면전이 불가피하다고 보도하는 가운데 영국과 러시아는 1887년 여름, 판데를 중립 지대로 남겨 둔다는 데 합의하며 판데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조선 거문도를 점령하고 제멋대로 ‘해밀턴 항구(Port Hamilton)’라고 부르던 영국군이 이때에야 물러났다. 판데 사건의 파장은 여기서 끝났을까. 그렇지 않다. 러시아의 남진에 골머리를 앓던 영국은 1902년 일본과 전략적 동맹을 맺었다. 영국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판데 중립지대화 합의로 사건은 종결됐으나 영국 국민들은 강경론을 부르짖던 보수당에게 몰표를 던져 정권이 뒤바뀌었다.

북극곰 러시아와 지구촌의 사자 영국이 한판 붙을 것 같았던 판데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판데에서 멈췄던 러시아군의 남진은 94년이 지난 뒤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저항으로 소련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난 지금이라고 다를까.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러시아 대신 미국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본질적으로 강대국과 강대국 사이의 알력으로 제 3국이 피해를 입은 행태도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강한 자가 먼저 주먹을 휘두른다는 싸움의 법칙도 변하지 않았다.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놓고 맞섰던 19세기 말의 패권 경쟁 구도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선수가 미국과 중국으로 변했을 뿐이다. 바뀌지 않은 것도 있는 것 같다. 판데 사건 132주년. 19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무려 3세기에 걸친 시차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간 알력의 틈바구니에서 일본이 반사이익을 누리는 구조는 동일해 보인다. 내 나라와 우리 민족이 엉뚱하게 피해를 뒤집어 쓰는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면 좋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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