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대자보, 문화혁명의 불을 붙이다.





1966년 5월 25일, 중국 베이징대학교 구내식당 동쪽 벽. 학생과 교직원들이 웅성거렸다.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내용을 담은 벽보(壁報)가 나붙었기 때문이다. 벽보는 말 그대로 벽에 견해나 주장을 붙이는 의사 표현의 방식으로 춘추전국시대부터 내려온 중국 특유의 관습. 벽보의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지식인들은 위선의 탈을 벗어라. 학장과 교수는 물론이고 수정주의의 탈을 쓴 공산당 베이징시 위원회도 봉건시대와 자본주의의 폐습에 젖어 있다.’ 마오쩌둥 (毛澤東)이 9일 전에 문화혁명을 주창, 중국 공산당 핵심부의 권력 다툼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나온 벽보에 대학 당국이 뒤집혔다. 벽보에는 학장 등을 처벌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철학과 주임이던 녜위안츠(여·당시 42세)를 비롯한 7명의 공동명의로 발표된 벽보에 놀란 대학 당국의 대응 수단도 벽보. 이튿날 녜위안츠의 주장 반박하는 벽보를 1,000장 넘게 작성해 캠퍼스 곳곳에 붙였다. 대학 당국과 베이징시를 싸잡아 비판한 녜위안츠는 분열주의자로 공격받을 위기에 빠졌다. 다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벽보를 쓰라고 사주한 인물이 마오쩌둥의 비서인 캉성(康生)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달이 바뀌자마자(6월 1일) 중앙인민방송국 뉴스에서 녜위안츠의 벽보를 호의적으로 보도하고 이튿날 인민일보는 ‘환호를 보낸다’는 논평과 함께 벽보 전문을 실었다.

신문과 방송에 보도가 나오는 데도 마오저뚱의 입김이 먹혔다. 녜위안츠의 대자보(벽보)를 보고받은 마오는 ‘20세기 중국판 파리 코뮌 선언서’라고 극찬하며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전국에 배포하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다. 대자보의 내용이 알려지며 중국의 각급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흥분한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교실에서 뛰쳐나와 홍위병(紅衛兵) 완장을 차고 거리와 광장에서 외쳤다.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에 도전하는 반당분자들을 타도하자!’ 6월 중순 베이징 대학에 난입한 홍위병들은 학장과 교수 60여 명을 끌어내 얼굴에 먹물을 뿌리고 몽둥이찜질을 퍼부었다. 다른 학교와 지방에서도 비슷한 일이 잇따랐다.

무정부 상태의 소요가 계속되자 국가 주석 류사오치(劉少奇)는 권좌에서 한발 물러나 당 주석 지위만 유지한 채 지방을 돌던 마오쩌둥에 매달렸다. ‘급히 돌아와 해결 방향과 방안을 지시해달라’는 간청을 마오는 물리쳤다.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류사오치와 공산당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은 ‘공작조(工作組)’를 투입했으나 혼란만 키웠다. 학생들은 두 파로 갈라져 피 흘리며 싸웠다.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마오쩌둥은 서서히 움직였다. 먼저 심복인 국방장관 린뱌오(林彪)를 시켜 베이징 인근을 무력으로 장악했다.

몸이 아프다며 류사오치의 구원 요청을 거절했던 마오는 우창(武昌)에서 장강(양쯔 강) 물에 몸을 담았다. 73세 나이가 무색하게 무려 30리(12㎞)를 유유히 헤엄쳤다. 중병설도 싹 들어갔다. 건강을 과시한 뒤 베이징에 돌아온 마오는 연타를 날렸다. ‘학생들에게 공작조를 투입한 결정은 오류다. 학교에 군대를 보내는 행위는 북양군벌이나 하던 짓이다’는 마오의 발언에 홍위병들의 기가 살았다. 결정적으로 8월 초에는 직접 대자보 문구를 섰다. 마오가 작성한 대자보는 제목부터 섬뜩했다. ‘사령부를 포격하라(砲打司令部).’ 류사오치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를 갈아치우자는 뜻이었다. 마오는 ‘홍색(紅色) 공포가 백색 공포를 제압해야 한다’는 구절도 남겼다.

마오는 왜 직접 후계자로 지목했던 류사오치를 치려고 했을까. 노선 차이가 컸다. 류사오치는 중국 공산화 직후부터 자본가 옹호 정책을 펼쳤다. ‘자본가들의 착취가 봉건시대보다는 낫고 착취를 당해야 실업을 면할 수 있다’며 ‘착취유공론(搾取有功論)’을 펼쳐 마오의 눈 밖에 난 적도 있다. 당장 자본의 챙겨 떠나려는 자본가들의 이탈을 막고 협조를 구하려는 궁여지책이었으나 마오와는 사이가 틀어졌다. 류사오치는 마오의 노여움을 알고도 ‘일하는 방법이 다를 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일’이라며 불협화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마오는 칼을 갈았다.



결정적으로 경제 정책에서 마오는 실패한 반면 류사오치는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는 점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마오는 1958년부터 철강 생산 독려 등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을 펼쳤으나 대기근 등이 겹치며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기근으로 인구도 4,000만 명이나 줄어들었다. 류사오치는 2년 반 만에 실패가 확인된 대약진운동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부어 마오의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 소련에서 스탈린이 후계자로 키웠던 흐루초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펼쳤던 상황. 마오는 눈부신 경제 성적을 거둔 류사오치가 자신을 배반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마오는 한 걸음 물러나 수도를 떠나 지방을 돌았다. 건강을 돌본다는 핑계를 내세웠으나 신경은 늘 중앙 권력에 쏠려 있었다. 문화혁명과 대자보 사건을 적절히 활용하며 마오는 권력의 핵심으로 다시 돌아왔다. 류사오치는 마오에게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연금 당한 채 1969년 지병으로 죽었다. 류사오치와 함께 권좌에서 쫓겨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사후 복권돼 중국의 개방과 개혁, 현대화를 이끌었다. 홍위병들은 어떻게 됐을까. 마오의 권력을 다져준 홍위병들은 류사오치가 죽기 전에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했다. 마오가 1968년 ‘그대들은 나와 조국, 노동자·농민·병사들을 실망시켰다’고 말한 직후부터 2,100만 명 홍위병들이 고향에 내려가거나 군에 입대하며 모두 흩어졌다.

대자보가 촉발한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얼마나 희생됐을까. 당 간부와 자본가, 지식인, 학생의 희생에 대한 통계 역시 중구난방이다. 수십만에서 수백만명을 헤아린다.대약진 운동에서 아사한 숫자까지 포함하면 희생자는 수천만 명선을 넘어간다. 문화혁명 자체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이다.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은 반 인류적, 반 문명적 친위 쿠데타이자 이념적 광풍이라는 해석의 이면에 문화혁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의 사회적 안정과 고성장도 불가능했다는 평가가 상존한다.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역사가 긴 호흡을 갖게 될 때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대자보’는 국제적인 유명세를 탔다. 영어사전에는 ‘다치바우(dazibao)’라는 단어가 올라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하다. 3공과 5공 군사 독재정권 시절, 대학생들은 종이와 매직 펜으로 대자보를 만들고 붙이며 억압에 맞섰다. 대자보와 유인물을 작성하는 행위만으로 체포돼 감옥에 가면서도 수 많은 젊은이들이 진실을 알리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려 피땀 흘렸다. 하지만 당시보다 세상이 좋아졌는지는 의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도권 언론의 악의적 왜곡 보도와 정체를 알 수 업는 가짜 뉴스가 판치는 현상은 일시적 아이러니일까, 역사의 역행일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