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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책읽는 소년의 이름

조은정 한남대 교수





예기치 않은 순간, 오래전의 사소한 사건과 마주할 때가 있다. 어느 장소, 물체나 소리, 심지어 냄새와 함께 문득 현재로 소환된 이 기억을 가리켜 ‘마들렌 효과’라고 한다. 프루스트의 문학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부드러운 과자 마들렌의 냄새를 맡았을 때 느낀 무한한 행복감이 실은 유년의 기억이 일깨워진 것이라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목소리를 들뜨게 하고 시간을 어느 시점으로 되돌리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 같은 타임머신을 만나는 것은 그동안 알아오던 이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간에도 초등학교 시절을 얘기할 때 교실 정면에 붙어 있던 태극기처럼 유독 일치된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들이 있다. 운동장 한편에 서 있던 ‘지게 지고 책을 읽는 소년 동상’과 같은 것이 그렇다. 누구는 교장 선생님의 어린 시절 모습이라 하고 누구는 대통령의 어린 시절이라고도 했다. 그것이 누구든 이 아이는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됐고 그 이유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공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땔나무 가득한 지게를 지고 걸어가며 책 읽는 소년은 일본 가나가와시의 한 신사(神社)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 자랑스러운 소년의 이름은 니노미야 손토쿠다. 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모습은 농촌운동, 책을 읽는 것은 노력의 상징이었다. 그는 하급 무사였지만 열심히 공부해 근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유연한 방식을 제시했고 일본정권은 이 사회운동가를 정치에 이용했던 것이다. 일제는 1m 크기로 1,000개의 동상을 제작해 전국의 소학교에 배치했는데 도량형을 서구식 미터법으로 바꾸고 이를 유포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다. 이 동상은 가난한 집에서라도 계속 노력하면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며 마을을 위한, 나라를 위하는 일을 철저하게 가르치자는 이른바 지방개량운동을 확산시킨 계기도 제공했다. 개인의 성공담과 함께 국가에 대한 충성을 보여준 니노미야야말로 식민지 운영에도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국민학교’ 교정에도 이 소년의 동상을 세웠고 등하교 때 인사를 할 정도로 한국인에게 본받아야 할 인물로 각인됐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일제는 금속회수령을 내렸고 동상들도 공출했다. 하지만 존경하는 모습이라 세워놓은 니노미야 동상을 녹여 없앤다는 것은 명분이 부족했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을 대신해 동상이 싸우러 나가는 ‘출정식’을 치르게 했다. 식민지의 어린이에게서 ‘니노미야 선생님, 전선에 나가서 큰 공훈을 세워주십시오. 우리도 장래 군인이 돼서 나라를 지키겠습니다’라는 선서를 받아낼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상징으로 이해된 소년의 동상은 한복 입은 모습으로 초등학교 교정에 복원됐다. 물론 소년의 이름이 시간이 지났으니 바뀌리라 생각할 이는 없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로 구성된다는데 과거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현재가 미아(迷兒)를 양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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