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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 티키호의 모험과 반전





1947년 8월 7일 밤,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제도의 작은 무인도 라로이아(Raronia) 해안. 뗏목 하나가 뭍에 닿으려 사투를 벌였다. 자칫 잘못하면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 날 상황. 집채만 한 파도에 수없이 휩쓸려 돛대가 부러지고 선실이 찌그러졌지만 뗏목은 무사히 섬에 닿았다. 남아메리카 페루 칼라오(Callao) 항구를 떠난 지 101일 만이다. 태평양 6,980㎞를 건넌 뗏목의 이름은 ‘콘 티키(Kon-Tiki)’ 호. 남미 원주민과 페루에서 태양신, 폴리네시아 섬들에서는 태양을 콘 티키 또는 티키라고 불렀다.

콘 티키호의 탐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남미와 폴리네시아 제도 사이에 유사점이 적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혈연적 유사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탐험대장인 토르 헤위에르달(Thor Heyerdahl·당시 32세)은 이런 의문을 품었다. 어릴 적부터 동식물학과 생물학에 관심이 컸던 그는 신혼여행지로 택한 남태평양에 눌러앉았다. 어떤 섬이나 글자는 없었어도 조상의 이름과 특징을 기록한 매듭이 페루 지역의 원주민 전승(傳承) 설화와 닮았다는 점을 찾아냈다.

헤위에르달은 그때부터 남태평양과 남아메리카의 연관성이 높다는 확신을 갖고 연구에 매달렸다. 2차 세계대전이 터져 연구를 중단하고 노르웨이 저항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그는 전쟁이 끝나자 연구 결과를 발표했으나 비웃음만 샀다. 동남아시아 이주민들이 폴리네시아로 건너왔다는 기존 학설을 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학위도 없고 경험도 일천했기 때문인지, 아무리 그럴싸한 논리를 제시해도 불신의 벽에 막혔다. 결정적으로 ‘그 옛날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뗏목을 타고 남태평양으로 이동했다’는 추론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헤위에르달은 ‘그렇다면 직접 고대 항해를 재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옛날 방식으로 뜰 것을 제작해 태평양으로 가겠다는 구상에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왔다. 먼저 ‘미쳤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학계는 그를 아마추어 정신 이상자쯤으로 취급했다. 탐험을 후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기업들은 ‘노르웨이인이 자살하려는데 돈을 낼 수는 없다’며 손을 저였다. 다행인 것은 탐험에 동참하겠다는 20~30대 지원자가 적지 않았다는 점. 우연히 만난 지인부터 탐험가 클럽 회원까지 헤위에르달과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가까스로 페루 정부의 후원을 확보한 뒤에도 헤위에르달은 비난에 시달렸다. 무모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뗏목이 태평양의 험한 파도를 견딜 수 있을지에 의구심을 품었다. 헤위에르달은 잉카제국을 정복했던 스페인 병사들이 남긴 전통 배의 그림을 보고 뗏목을 만들었다. 가벼운 발사 나무 9개를 대마 끈 밧줄로 300군데 묶은 뗏목의 크기는 가로 7.5m, 세로 15m, 바람을 받을 돛대 두 개도 세웠다. 선실은 대나무를 쪼개 펴서 만들고 대나무 통에 구멍을 뚫어 마실 식수를 실었다.

함께 탐험할 대원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가장 연장자(36세)인 엔지니어 헤르만이 가장 먼저 탐험대에 들어왔다. 헤위에르달과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인 그는 뗏목의 설계와 제작에 참여하고 항해 시에는 모든 기록을 맡았다. 최연소자(25세)는 유일한 스웨덴인이었던 벵구. 사회학을 공부하던 그는 인류의 이동에 관심이 많아 탐험에 참가해 식량 조달과 스페인어 통역을 담당했다. 헤위에르달과 동갑(32세)인 화가 에릭은 항해 과정을 그림으로 남겼다. 1949년 그가 어린이용으로 출간한 그림책 ‘나와 콘티기호’는 15개국 이상 언어로 번역되는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나머지 대원 두 명은 헤위에르달처럼 나치 독일과 싸웠던 노르웨이 저항군 출신. 28세인 돌슈타인은 콘 티기 호와 문명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인 무선 기기를 맡았다. 노르웨이 저항군으로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과 자매함인 테르피츠 함을 연합국이 공습으로 침몰시킬 때 비밀 무선으로 위치를 알려준 전쟁 영웅이었다. 크너트(29세) 역시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생산하기 위해 가동한 노르웨이 중수(重水) 공장을 영국군 특공대가 폭파할 때 안내 및 호위를 맡았던 전쟁 영웅 출신. 항해 도중 헤르만이 상어가 우글거리는 바다에 빠져 바람을 탄 콘 티기호와 점점 멀어질 때 몸에 밧줄을 감고 뛰어들어 구출해낸 적도 있다. 선행 덕분인지 탐험대원 가장 장수(92세)해 2009년까지 살았다.

페루인들의 환송 속에 탐험대는 1947년 4월 28일 칼라오 항을 떠났다. 출항과 동시에 모든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연습을 거쳤다고 하지만 콘 티키 호를 다루기조차 어려웠다. 방향이 제멋대로 움직여 같은 장소를 맴돌았다. 바람이나 해류를 타지 않으면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처음 사흘 동안의 걱정은 뗏목이 조금씩 가라 앉았다는 점. ‘발사 나무의 방수 처리가 안돼 가라 앉을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며칠이 지나자 발사나무 안의 수액이 해수의 유입을 막았다. 크면서고 가벼운 발사 나무 뗏목은 해류에 적응한 듯 순조롭게 서쪽으로 나아갔다.



파도와 폭풍우가 치면 바로 끊어질 것이라던 대마 밧줄도 불어난 발사나무 안으로 깊이 박혀 끊어지기는커녕 점점 견고해졌다. 바닷물이 폭풍우 때는 하루 1만톤, 바다가 잔잔할 때도 200톤씩 뗏목을 덮쳤어도 바닥 틈새로 빠져나갔다. 식량은 거의 공짜로 얻었다. 수많은 물고기가 콘티키 호를 따라다녀 식량 구하기가 쉬었다. 탐험대는 미 육군이 각별히 후원한 비상용 군용식량(레이션)과 음료수 캔에 거의 손대지 않고 전통 방식으로 식수와 식량을 해결해 나갔다. 항해 도중에 상어 밥이 될 위험도 수차례 겪었지만 콘 티키 호 탐험대는 7월 말 육지와 만났다.

문제는 상륙이 쉽지 않았다는 점. 당초 도착 예정으로 생각했던 항해 97일째에는 카누 4척에 분승한 원주민들이 콘 티키를 묶어 접안을 시도했으나 해류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 이윽고 항해 100일을 넘어서던 날부터 탐험대원들은 암초로 가득한 라로이나 제도의 산호를 넘고 넘어 고생 끝에 상륙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몸을 실어 태평양을 건넌 탐험대에는 세계의 찬사가 쏟아졌다. 학계도 헤위에르달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위에르달은 1971년에는 파피루스의 원료인 갈대로 만든 고대형 선박 ‘라 2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이집트 문명과 잉카 문명과의 연관성도 증명해냈다. 그의 연이은 항해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할 때는 실증이 뒤따라야 한다’는 불문율을 세우며 학문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도 헤위에르달 못지않은 모험가들이 있었다. 발해와 일본의 무역관계를 실증하기 위해 뗏목 ‘발해 1300호’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동해를 건너 일본에 도착하려던 탐사대(대원 4명)가 1998년 1월 말 탐험 성공 직전 폭풍우를 만나 실패한 적이 있다. 그들은 차디찬 겨울바다에서 숨졌지만 과거를 통해 미래를 빛내려던 뜻은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쉰다.

콘 티키호의 탐험 얘기는 조금 더 남았다. 반전(反轉)이 일어난 것이다. 브라이언 사이크스 옥스퍼드 대학 인류학과 교수의 유전자(DNA) 조사 분석을 통해 폴리네시아 제도의 조상은 동남아시아 인들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브라이언 교수는 2002년 발간한 ‘이브의 일곱 딸들(The Seven Daughters of Eve)’을 통해 헤위에르달의 연구와 실증 결과를 뒤집었다. 헤위에르달은 고대 남미인 가운데 의문의 종족인 백인족의 항해술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보다 뛰어났던 고대 아시아인들의 역량은 간과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헤위에르달의 항해 이후에 자연과 해류의 힘으로 대륙 간 인류 이동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으며 요트로 세계를 일주하는 모험가도 늘어났다. 헤위에르달 탐험은 또한 먼 바다의 항해에 나서는 모험 정신이란 서구 세계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가 바다를 경외하면서도 길로 여겼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학문적 성과와 연구 결과를 떠나 헤위에르달의 항해는 불가능의 벽에 맞섰던 위대한 도전의 하나로 인류가 공유할 가치로 남았다. 우리도 도전하는 나라와 사회가 되면 좋겠다.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의 뼈 아픈 일침이 귓속을 맴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공무원, 공사를 선호한다는 소식에 그는 ‘도전 목표가 공무원인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로저스가 누구인가. 세계적인 갑부, 주식이나 채권보다는 지하자원 등에 대한 투자의 귀재, 나이 50줄에 접어들어 오토바이 하나에 달랑 매달려 세계를 일주했던 모험가인 그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모험에 나서라고 충고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가슴이 쓰린 이유는 따로 있다. 짐 로저스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통일 한국이야말로 최고의 투자 기회’라고 공언했던 인물이다. 통일 비용이 너무 클 것이라는 국내 일각의 우려를 듣고는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비용보다 편익이 훨씬 클 것이다. 그래도 의심스러운가. 한국이 통일된다면 나의 전 재산을 투자할 테니 비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긴 도전하지 않는 청년에게 뭐라 할 것도 없다. 경제가 활력을 잃어버린 마당에 새로운 투자 기회 통인일 또는 남북 협력을 애써 무시해온 기성세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기대를 받으며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전망은 밝아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노릇이다. 남북관계, 국제 협력에서도 콘 티키 호로 상징되는 새롭고 창조적인 발상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한국은 언제까지나 종속 변수여야 하나. 도전이란 불가능한 것인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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