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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맥락을 팔아라] 영화 '옥자'의 악덕사업가 미란도는 마케팅 귀재?

■정지원·유지은·원충열 지음, 미래의창 펴냄

"고객·브랜드 조화 이뤄야 성공"

전문가 3명 제품 홍보 비법 제시

태슬라 전기차 '기술' 과시 아닌

'환경·미래' 관점으로 접근 성공

홍콩 레스토랑 '쿠오레 프라이빗'

영화 주제 맞춘 메뉴 이벤트 인기

브랜드 탄생 배경 무시한 지포는

라이터 모양 여성용 향수로 실패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옥자’의 오프닝 시퀀스로 말문을 열어보자. 암전이 걷히면 미란도 기업의 신임 최고경영자(CEO)인 루시 미란도가 하이힐 소리를 또각또각 울리며 단상에 오른다. 확 도드라지는 치아 교정기 탓에 위축될 법도 한데 위풍당당한 자신감으로 슈퍼돼지 사업을 설명한다.

“식량 부족으로 전 세계 8억500만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미란도의 새로운 핵심 가치는 ‘환경’ 그리고 ‘생명’입니다. 끝내주지 않나요? 우리는 마침내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봉준호는 미란도를 우스꽝스러운 악덕 사업가로 묘사하지만 ‘맥락을 팔아라’의 저자가 봤다면 미란도야말로 브랜드 정체성을 단단히 정립할 줄 아는 1급 CEO라고 칭찬할지 모르겠다.

이제 눈치채셨는지. 소비자가 상품 정보를 훤히 꿰고 있는 시대, 제품 간 기술 격차가 무의미한 시대, ‘맥락을 팔아라’는 적자생존의 징글징글한 전쟁터에서 기업이 마케팅으로 살아남는 비법을 설파하는 지침서다. 공동 저자인 정지원·유지은·원충열은 브랜드 마케팅 분야에서 오랜 기간 실력을 연마한 전문가들이다.

글로벌 혁신 기업 테슬라의 창업자인 앨런 머스크 /사진제공=미래의창


제목이 노골적으로 암시하듯 이 책은 맥락(context)이 마케팅의 처음이자 끝이며 맥락을 벗어난 마케팅은 쓸모없는 휴지 조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context’라는 영단어의 어원이 가리키는 것처럼 씨실과 날실을 함께(con) 엮어 직물(texture)을 짜듯 고객의 지향과 브랜드의 맥락이 행복한 조화를 이룰 때 기업의 수명도 길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압도적인 성실함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국내외 온갖 기업들의 마케팅 사례가 본받아야 할 전범(典範) 또는 피해야 할 반면교사로 줄기차게 제시된다.

먼저 모범 사례. 미국의 테슬라가 혁신기업으로 우뚝 선 것은 전기자동차의 기술력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회사 창업자인 앨런 머스크는 상품이 넘쳐나는 오늘날 상품의 본래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옥자’의 미란도가 그랬듯 머스크 역시 전기차를 인류의 ‘환경과 미래’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브랜드의 위상을 제대로 구축했다.



홍콩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쿠오레 프라이빗 키친’에서 고객들이 영화를 감상하며 식사를 즐기고 있다. /사진제공=미래의창


홍콩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쿠오레 프라이빗 키친’도 저자의 이목을 잡아 끈 재미난 케이스다. 레스토랑 운영자이자 셰프인 안드레아 오세티는 2009년부터 가끔 영화와 다이닝을 조합하는 이벤트를 열고 있다. 그는 미리 상영할 영화를 공지하고 예약을 받는다. 고객은 영화 제목만 알 수 있을 뿐 어떤 메뉴가 식사로 나올지는 모르는 채로 레스토랑에 입장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디카프리오와 데인즈가 달콤한 입맞춤을 할 때 ‘첫 번째 키스’라는 라벨이 붙은 요리가 나오는 식이다. 저자는 “맛이 아닌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고객의 수요를 간파했다”며 이 레스토랑을 추어올린다.

실패 사례는 더 흥미롭다. 라이터 브랜드인 지포는 수년 전 여성용 향수를 출시했다. 제품 형태도 라이터 모양을 그대로 본떴다. 향기를 뿜으려고 향수를 샀는데 기름 냄새만 진동할 것 같은 불안 때문인지 판매량은 신통치 않다. 브랜드의 기원(起源), 즉 맥락을 파생시킨 출발점을 무시하면 처참한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이다.

라이터 브랜드 지포가 출시한 여성용 향수 /사진제공=미래의 창


프로야구 구단인 LG트윈스도 역사를 함께 일궈 온 팬들을 가벼이 여겼다가 혼쭐났다. 올해 3월 LG트윈스는 새로운 BI(Brand Identity)를 발표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웬걸, 팬들은 당장 야구장에 불이라도 지를 태세로 분개했다. 로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마디 상의 없이 로고를 바꿨다는 사실에 팬들은 화가 났다. LG트윈스는 맥락과 역사를 공유하며 함께 성장하는 이들이 고객이자 팬이라는 근본 명제를 간과한 것이다.

쉴새 없이 이어지는 사례에 지루할 틈은 없지만 꼬집을 만한 흠결도 있다. 저자들이 공들여 채집한 케이스들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결정(結晶)을 이룬다기보다 그저 병렬식으로 나열되는 인상이 짙다. 한 호흡에 읽는 것보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원하는 챕터를 펼치면 더 좋을 책이다. 마케팅 전문가를 꿈꾸는 독자에겐 어느 저자가 어떤 장(章)을 썼는지 알려주면 요긴할 텐데 챕터별로 저자 이름이 명시가 안 돼 있다는 점도 아쉽다. 1만7,000원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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