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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TUNE 500]화이자와 미국의 치명적 의약품 부족 사태

▲화이자 프로파일: 순위 57위, 매출 525억 달러, 이익 213억 달러, 직원 수 9만 200명, 주주 총수익률(2007~2017년 연평균) 9.3%

화이자의 실패한 인수합병이 미국을 괴롭히던 만성적 의약품 품귀 현상을 어떻게 전면적 위기 상황으로 악화시키고 있는지 알아보자. By Erika Fry

지난 2월, 뉴욕시에 위치한 컬럼비아대 의료센터(Columbia University Medical Center) 소속 산과마취의 루스 랜도 Ruth Landau는 회진 중 병원 약사로부터 당혹스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출산 때 필수 약물이나 다름없는 국부마취제 부피바카인의 재고가 떨어질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부피바카인은 산모의 경막외 마취제나 제왕절개 수술 때 사용되는 척추 마취제로 예전부터 애용되어 왔다. 시럽과 비슷한 포도당 용액 형태의 마취 주사는 특히 응급분만 때 필수적이다.

랜도는 “아기나 산모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땐 단 1분도 소중하다”며 “부피바카인만큼 사용 시 안전성, 신뢰도, 편리성이 검증된 대안은 없다”고 강조했다. 평소대로 부피바카인을 사용한다면, 3주 안에 재고가 바닥날 상황이었다. 제조사인 화이자는 다음 배송 시기를 6월로 예측하고 있었다.랜도는 산과마취의로 20년간 일하며 온갖 약품의 품귀 현상을 경험했지만, 이 정도 상황은 처음이었다. 예고 조치도 너무나 미흡했다. “우리는 부피바카인을 수십 년간 써왔다. 눈 감고도 주사할 수 있을 만큼 투약법이나 작용 속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런 약이 갑자기 없다는 거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북미 전역 마취의들이 SNS 상에서 같은 문제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 중 상당수는 본인 재량으로 임시 대처에 나선 상황이었다. 산모에게 일반 마취제를 투여하는 등 위험이 따르는 선택이었다. 랜도가 보기엔 미국 의료계에서 수십 년 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위급한 상황이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의료 보건에 돈을 아끼지 않는 미국(2016년 지출액만 3조 3,000억 달러)은 정밀의학 *역주: 환자 개인의 유전형질·환경 분석에 기반한 맞춤형 의학을 꿈꾸는 나라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과 야심이 공존하는 미국 의료계에서, 부피바카인 품귀는 결코 특수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현실이다. 부피바카인은 제네릭 무균주사제(generic sterile injectable drugs)에 속한다. 사용한 역사가 길고, 필수적이며, 저렴한 약품 군이다. 하지만 의약계의 ’기초양식(bread and butter)‘으로 인식되는 이런 약들이 공급 위기에 처해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로키 마운트 공장에서 무균 주사제 주입 과정을 감독하는 화이자 직원들.




최신 집계에 따르면, 현재 품귀 상태인 약품은 총 202종이다. 놀랍게도 에피네프린, 모르핀, 멸균수 등 다양한 필수 의료용품이 거기에 포함돼 있다. 식염수(정맥으로 약을 주사할 때 사용되는 소금물 용액)도 가뜩이나 부족했던 재고가 허리케인 마리아 Maria 이후 위험 수준으로 악화됐다. 푸에르토리코에서 제조한 식염수와 빈 팩을 해외로 운송하는 주요 생산업체들의 작업이 허리케인으로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필수품목으로, 심장수술과 신장질환 환자에게 사용하는 중탄산나트륨(베이킹소다 용액)도 작년 여름 부족 사태가 예상됐다(호주에서 수입한 물량이 도움이 됐지만,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병원과 호스피스 시설에서 중증 외상, 수술, 불치병 통증 완화에 사용하는 아편 주사제 공급도 올해 들어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다.

오하이오 주 데이턴 Dayton에 위치한 1급 트라우마 전문 의료기관인 마이애미 밸리 병원(Miami Valley Hospital)도 예전부터 사용해 온 약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구역질의 1차 치료 약물인 온단세트론이 부족해지자, 의료진은 부작용과 혈관 자극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약으로 대체해 일부 환자에게 투약했다. 부정맥 치료에 필수적인 딜티아젬의 공급도 중단됐다(대체품으로 사용하는 메토프로롤은 일부 환자에겐 안전하지 않다).

마이애미 밸리의 병동에서 38년간 근무한 캐런 피어슨 Karen Pearson은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환자가 사용 가능한 약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하면, 응급의료 전문의인 랜디 매리엇 Randy Marriott은 예전보다 좀 더 자세히 캐묻곤 한다. “진짜 알레르기인가, 아니면 그냥 민감성인가?” 그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요즘 우린 이런 대화를 자주 한다. ‘환자분, 끔찍한 부작용이 있겠지만, 통증 완화를 위해 이 약을 쓰시겠습니까? 왜냐면 오늘은 다른 약이 없거든요.’”

큰 병원도 작은 병원도 모두 고민에 빠져있다. 클리블랜드 클리닉 Cleveland Clinic의 베테랑 약품부족 전문가(drug shortage specialist) 크리스 스나이더 Chris Snyder도 그 어느 때보다 상황이 나쁘다고 증언했다. 최첨단 병원인 이 곳에서도 평일에 평균 매일 1회 약품 부족이 발생하고 있다. 안전의약업무연구소(Institute for Safe Medication Practices)가 작년 10월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약품 부족 탓에 의사의 71%가 추천된 약을 제공하지 못하거나 치료를 자주 연기했다. 루이지애나에 위치한 옥스너 헬스 시스템 Ochsner Health System의 데비 사이먼슨 Debbie Simonson 약품서비스 담당 부사장은 “환자를 돌보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며 분노했다. “필요한 약을 구하는 게 일이 돼 버리면, 그 책임을 다하기 어려워진다.”

이 약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대부분 화이자(올해 포춘 500대 기업 57위)에서 생산된다는 점이다. 이 회사는 미국 최대 무균 주사제 제조업체다. 5월 11일 기준으로 화이자에서 재고가 고갈됐거나 부족해진 약품은 370종에 달한다. 회사 발표에 따르면, 이 중 102종은 2019년까지 공급을 할 수 없다.

미국 의료계에 제네릭 무균주사제가 이토록 부족한 이유를 한 줄로 정리한다면, 업계 1위 제조업체가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월가는 2015년 2월 화이자에 환호했다. 시카고 인근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제네릭 무균주사제 제조사 호스피라 Hospira를 17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을 때였다. 당시 거래는 화이자의 급박한 구애로 이뤄졌다. 이언 리드 Ian Read CEO는 호스피라의 마이크 볼 Mike Ball CEO에게 2014년 12월 중순 처음으로 연락을 취했다. 6일 후 이뤄진 면담에서, 리드는 30% 프리미엄(주당 82달러)으로 호스피라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1월 중순, 호스피라가 인수가를 주당 90달러로 올렸다. 그 2주 후 두 회사는 인수 계약에 서명했다.

이 발표는 제네릭 무균주사제 시장을 점령하겠다는 화이자의 야망을 드러냈다. 전세계 제네릭 무균주사제 시장은 2020년까지 7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 전망되고 있었다. 게다가 호스피라가 막 움트는 바이오시밀러 시장의 강자였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바이오시밀러는 대형 분자로 구성된 ’생물의약품(biological medicine)‘의 복제약이다. 지난 수십 년간 약 개발을 주도했던 초고가 신약들 중 상당수가 생물의약품에 속하는데, 비아그라 등 소형 분자 약물보다 복제가 훨씬 어렵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화이자는 이 시장이 향후 몇 년간 200억 달러로 성장할 것이라 전망했다. 2014년 당시 호스피라가 두 분야에서 거두고 있던 순매출은 30억 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화이자의 리드 CEO는 업계 판도를 완전히 바꿀 인수를 희망했다. 회사는 현금이 풍부했고, 당시엔 법인세 개혁 전망도 없었다. 따라서 당시 유행했던 회사 ‘바꿔치기(inversion)’, 즉 법인세율이 낮은 국가로 본사 이전을 하기 위해 해외 기업을 인수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화이자는 2014년 초, 영국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 AstraZeneca를 대상으로 1,180억 달러 규모의 적대적 인수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 성급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2년 후에는 아일랜드 제약사 앨러건 Allergan을 1,600억 달러에 인수하려 했지만, 미 재무부가 세금 바꿔치기 관련 규정을 변경하면서 그 역시 백지화됐다.

화이자의 목표는 세금 부담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규모 확장을 통해 궁극적으론 오히려 규모를 축소하려 했다. 기업을 혁신적 신약개발에 전담하는 회사와 제네릭·주사제·의료용품 등을 생산하는 회사, 둘로 나누는 전략을 오랫동안 논의했다. 그러나 2016년에 이르자 그 아이디어도 흐지부지됐다. 골드먼삭스의 제이미 루빈 Jami Rubin 등 여러 외부 전문가들은 (대형 제약사들의 상징적 리더인) 화이자가 ‘전략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졌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루빈은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화이자는 지난 3~4년간 이도 저도 아닌 상태였다”고 말했다. “더 이상 동원할 금융공학적 수단이 없었고, 성장도 상당히 정체되어 있었다.”

화이자의 의료용품 사업은 더 심각한 하강 궤적을 그려왔다. 이상하게도 의약 혁신보다 운영비용이 더 들어간 이 부문의 2017년 매출은 전년 대비 14억 달러 감소했는데, 호스피라의 부진 여파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회사 측 설명에 따르면, 호스피라라는 이름은 병원(hospital)과 영감(inspire), 그리고 희망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spero’의 합성어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호스피라에는 희망아 없는 듯했다. 회사는 원래 애보트 래버러토리 Abbott Laboratories의 병원용품 사업부였다. 2004년 분사한 이후, 설비 노후화로 인해 점점 더 많은 경영 혼선을 겪어왔다. 미국 경기침체가 절정일 무렵, 호스피라는 ‘연료 프로젝트(Project Fuel)’라는 공격적 효율화 운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400개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 회사 전 직원 여러 명의 증언과 2011년 주주 소송(3년 후 6,000만 달러로 합의) 당시 문서에 따르면, 이 같은 감축 노력은 회사의 질과 기술직 직원의 수준에 타격을 입혔다.

상황의 다음 전개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2009~2015년 호스피라는 미 식품의약국(Food and Drug Administration)의 경고장을 8회 받았고, 리콜 발표도 이어졌다. 경영진이 회사의 ’가장 소중한 보석(crown jewel)‘이라 불렀던 노스캐롤라이나 주 로키 마운트 Rocky Mount 공장이 적절한 검사 및 통제 절차 부재, 부적절한 직원 교육, 건물·제조설비의 설계불량 등 각종 문제로 FDA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2011년, 호스피라는 경영진 교체를 단행했다. 투자자의 날 행사에서 새 경영진은 솔직한 태도를 보였다. 짐 하디 Jim Hardy 운영담당 수석부사장은 투자자들에게 “현실적으로 말하겠다”고 운을 뗀 뒤 “고쳐야 할 문제가 있다는 점은 우리도 알고 있다”고 머리를 숙였다.

재정비는 쉽지 않았다. 구원투수로 영입된 새 경영진은 로키 마운트 공장 정상화에만 3년이 소요된다고 판단했다. 한 관계자는 이 공장을 “재앙”이라 표현했다. 시험을 기다리는 약물 양이 너무 많아서 오로지 이를 보관하기 위해 새로 창고를 빌려야 할 정도였다. 리콜도 엄청났다(FDA 자료에 따르면, 2012~2015년 초까지 239건의 리콜이 진행됐다). 시장에 유통 중인 무균

컬럼비아 대학교 의료센터 산과 마취의 루스 랜도는 핵심 약품의 전국적 품귀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


제품에서 사람 머리카락, 유리, ’오렌지 분자물질‘ 등 온갖 불순물이 발견됐다. 의료계 전문매체들이 호스피라의 리콜과 자구 노력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 이 사태는 제법 자극적인 기삿거리가 됐다.

그럼에도 호스피라는 뭔가 변화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인재를 영입하고, 공장을 개선하고, FDA와의 긴장관계도 해소했다. FDA와의 면담에 마이크 볼 CEO가 직접 참석했다. 볼은 실적 발표에서 호스피라의 제조 관련 우려를 “악어(gator)”라 부르곤 했다. 2014년 2월, 한 애널리스트가 ‘악어의 최근 진행 상황’에 대해 질문하자, 볼은 ‘목표 달성’ 정도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악어에 관해 ‘절대’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의 늪이 이젠 해결됐다고 보고 있다. 남은 진흙 속 깊숙한 곳에 한두가지 문제가 숨어 있을진 모르지만, 늪 자체는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화이자가 인수할 무렵, 호스피라 경영진은 회사가 통제 가능한 상황이라 확신했다. 정리를 담당한 주요 경영진 중 상당수가 회사를 떠났다. 화이자는 호스피라에 투자를 했지만, 로키 마운트 공장에서만 수백 명을 정리해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리콜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2015년 9월 화이자에 인수된 이후, 호스피라는 최소 45건의 리콜을 진행했다. 41년 전 설립된 호스피라의 캔자스 주 맥퍼슨 McPherson 공장-로키 마운트 공장과 함께 미국 무균 주사제 공급량의 대부분을 담당한다-에 대한 당국의 평가도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2016년 6월, FDA는 현장 점검을 실시한 후, 문서 483/*역주: 경고성 내용을 담은 점검보고서 양식/을 발행했다. 21페이지 분량의 이 보고서는 쓰디 쓴 비판을 담고 있었다. 접수된 항의에 대한 조사가 부적절했던 사례, 이상적인 무균 주사제와는 거리가 먼 제품들이 차례로 열거되어 있었다.

심장의 혈액 펌프질을 돕는 약물인 도부타민의 경우, 투명해야 할 약이 ’1주일이 지나자 어두운 분홍색으로 (…) 빠르게 변했다‘거나, ’우중충한 샴페인 색‘, 혹은 ’지우개 가루처럼 작은 가루‘가 있는 ’복숭아색‘으로 변했다는 항의가 여러 병원으로부터 들어왔다.

그러다 옛 철로변 마을 경계에 위치한 맥퍼슨 공장이 8개월 후인 2017년 2월, FDA의 경고장을 받았다.

2,500단어 분량의 경고장은 공장 운영 전반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항생제인 반코마이신 주사제에서 이물질(훗날 화이자는 판지가 혼입됐던 것으로 평가했다)이 발견됐다는 항의 사례가 특히 자세히 언급되어 있었다. 추가 항의가 들어왔음에도, 화이자는 균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주사제를 5개월간 전량 리콜하지 않았다. FDA 경고장의 결론 부분은 총체적 비판의 연속이었다. ‘복수의 사업장에서 문제가 반복됐다는 사실은 의약품 제조에 대한 귀사의 관리감독 능력이 불충분함을 증명함.’

화이자는 미국에서 사용되는 아편성 진통제 주사제의 75%를 공급하고 있다. 이 물량의 절대 다수가 맥퍼슨 공장에서 생산된다. 그곳은 앞서 언급한 컬럼비아대 의료센터 산과마취의 루스 랜도가 매일 사용하던 부피바카인 등 마취제의 주요 생산기지이기도 하다.



랜도 등 컬럼비아 클리닉의 의료진은 제한된 공급량으로 몇 달이라도 버티기 위해 절감 조치를 마련했다. 병원 전역에서 수술 종류를 막론하고 국소마취제로 사용되고 있는 부피바카인이지만, 이제는 응급 분만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복잡한 경우에만 투약을 하고 있다. 랜도 등이 만든 안내 지침에 따라,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병원이 보통 1인용이었던 약병을 여러 번으로 나눠 쓰고 있다.

의약품 품귀를 흘러간 옛일 혹은 사회주의 경제의 기능 장애 현상 정도로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의료계의 의약품 수급 부족은 몇 년째 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품귀 사태는 2010년대 초부터 매우 잦아졌다. 유타대학교의 공신력 있는 수급부족약품 목록에 따르면, 2011년에 257종의 약품이 당시 이미 부족했던 약품 184종 목록에 추가됐다. 그 결과 의회 청문회가 열렸고, 미 회계감사원(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 · GAO)도 잇따라 보고서를 발간했다. 관계자 다수의 말처럼, 수급부족 사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위태로웠던 미국 의료 공급망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품귀 위험이 가장 큰 약물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제약사의 수익성을 개선하는 최신 특수약품이 아닌 제네릭 약품이고, 물량이 많으며, 이익률이 낮다는 점이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필수 의약품이지만, 제약사에겐 약품 제조 인센티브가 적다는 것이다.

의회는 지난 2012년 ‘수급 부족이 예상될 경우 사전 예고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하지만 핵심을 벗어난 대처였다. 의약품 품귀는 천천히 진행 중인 시장 붕괴에 기인한다. 그 핵심 원인은 경제적 인센티브의 부재이다.

일상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저가 약품은 제조사 이익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이런 약물의 가격은 병원의 약값 협상을 대행하는 단체구매조직(group purchasing organization · GPO)과 제약사 간 계약 협상을 통해 대체로 결정된다. 이런 과정에서 대량 구매를 통해 가격이 낮아지고, 시장이 안정된다. 규제가 심하고 비용도 비교적 높다는 특성 때문에 일부 기업들이 이 시장을 포기했다. 업계의 이런 특성으로 인해, 신규 사업 투자나 이중 공급망 구축이 쉽지 않있다. 약물 공급이 부족해질 경우, 기업의 재정적 손실은 일시적이고 미미한 수준이 된다. 또한, 소비자 수에 비해 비상시 대체자로 나설 수 있는 기업 수가 지나치게 적다. 그렇기 때문에 현 시스템 하에선 아무 문제가 없으면 간신히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재고만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작년에는 문제가 많았다.

작년 9월, 허리케인 마리아가 푸에르토리코 전력망을 무력화시켰다. 그후 미국 의료계에 일련의 위기가 발생했다. 푸에르토리코 섬을 넘어 미국 전역이 타격을 입었다. 그 누구도 그걸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 더 치명적이었다.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주요 의약품 생산기지이며, 의료의 핵심 필수품인 식염수 공급을 상당 부분 책임지고 있다. 미 보건복지부의 예방 및 대응담당 차관보실 소속 한 관계자는 “기본 대체재가 없거나, 대체재 파악이 어려운 물품이 부족한 경우가 점점 늘어나 연쇄 수급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타대학교에서 수급부족 약물 명단을 총괄하는 약물 부족 전문가 에린 폭스 Erin Fox는 “허리케인 마리아 이후 소형 식염수 팩을 구하기 힘들어져 대형 식염수 팩·주사기·물약병·멸균수 수요가 폭증했다”고 말했다.

허리케인이라는 자연 재해가 터질 무렵, 화이자에서도 인재(人災)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2017년 봄부터 화이자는 ‘고객에게 띄우는 서한(Dear Customer)’의 발송을 시작했다. 공급 부족이 예상되는 제품(주로 맥퍼슨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에 대한 사전 안내 편지로, 몇 달에 한 번 꼴로 발행됐다. 약을 미리 채운(pre-filled) 주사기 제품이 유독 난항을 겪었다. 7개월간 화이자는 모호한 어조로 생산 지연을 잇달아 공지했다. 매 발표마다 출고일이 뒤로 밀렸다(시설 업그레이드와 보수 때문에 1~3월 맥퍼슨 공장 가동을 중단한 것도 거기에 한몫을 했다).

마약성 진통제 주사제의 공급이 특히 절박했다. 그 사태의 배경에는 맥퍼슨 공장의 불능은 물론, 화이자가 실질적 시장지배자란 이유도 있었다.

병원들은 출산 때 사용하는 마취제인 부피바카인 부족 때문에 고민에 빠져있다.


마약성 진통제는 미국 정부의 관리 대상으로, 마약단속국(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 · DEA)이 할당량을 관리한다. DEA는 연 단위로 핵심 성분의 사용 가능량을 제한하고, 제조사 공급도 과거 판매 기록에 근거해 엄격하게 제한을 하고 있다. 다른 회사가 마약성 주사제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해도 필요한 원료를 구할 수 없다는 얘기다.

2월 말, 미 병원약사협회(American Society of Health-System Pharmacists), 미 임상종양학회(American Society of Clinical Oncology) 등 5개 의료단체가 DEA에 할당량을 조정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청원했다(3월 화이자가 할당량을 일부 포기하자 DEA는 이를 다른 업체에 배당했다).

300종 이상의 약품 생산에 차질이 생기자, 화이자 측은 책임을 통감해 문제 해결에 전념하고 있다고 밝혔다(허리케인 마리아 발생 이후 화이자는 경쟁사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몇몇 약물의 생산량을 늘렸다). 그러나 해결은 쉽지 않다. 로키 마운트 공장 한 곳에서만 매년 5억 개의 무균 주사제를 생산된다. 1일 생산량만도 세미 트레일러/*역주: 뒤쪽에만 바퀴가 달린 트레일러/ 20대 분량이다. 주사기, 약병, 앰플 등에 담겨 총 500종의 약물이 출고되고 있다. 이 약들은 신생아의 혈액 응고를 촉진하는 비타민 K부터 불치병의 고통을 덜어 주는 모르핀까지, 전 생애주기에 해당하는 제품들이다.

이 같은 일을 수행하는 공장이지만, 생산라인은 26개에 불과하다. 즉, 각 라인의 운용이 매일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제조되는 약물의 특성상 모든 라인이 FDA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검사 절차에 많은 비용과 기간이 소요된다. 일정은 대체로 수 주 전에 계획되는데, 폭설, 직원의 병가, 부품의 공장 도착 지연 등 각종 예상치 못한 사건 탓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검사 및 서류 작업 때문에 약물 1회분이 공장에서 출고되는 데 약 3~6주가 소요된다. 약물 1회분마다 제작 절차를 기록한 서류만 200~400쪽에 달한다. 이는 물론 실무자의 부담일 뿐이다. 진짜 난관은 혈관으로 직접 주사되는 약물 제조에 필수적인 무균실을 조성하는 데 있다.

공기 흐름을 해치지 않기 위해, 무균 공간에서 일할 땐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팔을 올릴 때도 항복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작업자 옷은 흰색 전신 작업복인데, 몇 달에 걸쳐 옷 입는 법을 숙달하기 전까진 직접 입을 수 없다(1970년대 작업자들은 긴 원피스와 종이 모자 차림으로 일했다). 작업 공간과 멸균이 비교적 덜한 공간을 가르는 창에는 살균제가 뿌려져 있다. 작업자들이 느릿느릿 장비 포장을 벗기고, 기계를 관리하는 모습이 달 착륙 때 본 장면과 비슷하다.

이 업무의 미로 속으로 바깥 세계의 끊임없는 요구가 밀려들고 있ㅎ다. 위기 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경영진은 생산 라인 위에 아기 사진을 붙여 놓기도 한다.

화이자의 글로벌 공급담당 사장 겸 수석부사장인 키르스텐 룬트-위르겐센 Kirsten Lund-Jurgensen은 “회사가 수요 충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우리는 심각한 수급 부족 사태의 재발을 결코 원치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뚜렷하다”고 말했다. 그로 인해 화이자 경영진의 일상이 병원 의사와 여러 모로 비슷해졌다. 그녀에 따르면, 임원들은 매주 모여 수급 부족 상황을 평가하고, ‘의학적으로 필요하고 의미 있다’고 판단되는 약을 우선 순위에 놓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품귀 현상의 비용과 여파는 의학적으로도 중요하다. 대체 약물과 의료용품 리스트를 작성하는 작업만 해도 매우 긴 고민의 시간과 약간의 창의성을 요구한다. 어떤 약품과 의료용품이 부족한지 정보를 모으고, 복수의 대안을 찾고, 남들보다 먼저 주문을 넣고, 현장에서 합성 및 재포장 작업을 통해 쓸 수 있는 약을 최적화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도, 병원 직원들에게 변경 사항을 설명해야 하는 막중한 과제가 남게 된다.

아수라장 같은 응급실 내에서 서둘러 대체 약품을 찾아 적절히 사용하려다 보면, 실수가 벌어지기도 한다. 안전의약업무연구소는 약품 부족이 의료진의 실수를 낳은 일회적 사례를 대량 축적했다. 2017년 10월 설문조사에서, 의사 약 300명이 지난 6개월간 약 100건의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 중 상당수는 투약량이나 희석 비율의 문제였다.

다른 문제는 재해에 대한 대비이다. 플로리다 주 스튜어트 Stuart에 위치한 마틴 헬스 시스템 Martin Health System 병원의 부사장보 겸 최고약품책임자(chief pharmacy officer)인 데이브 할로 Dave Harlow는 ”다음 허리케인 시즌이 다가오고 있다“며 ”긴급 사태가 재해로 진화하는 건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의약품 275종의 공급 부족을 관리하고 있다. 마틴 병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별장인 마라라고 Mar-a-Lago에서 구급차로 닿을 거리에 있지만, 할로는 의약품 부족에 차별이란 없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를 위해 만난 취재원 중 상당수는 의약품 품질관리가 과도하거나, 최소한 조금 완화돼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흥미롭게도, 그 중 화이자 소속은 한 명도 없었다). 검사가 비교적 느슨하고 단순했던 과거에는 필요한 약을 제때 제조할 수 있었다. 약이 자동 시각검사장비를 거치지 않아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도 없었던 듯하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약품 부족 전문가 크리스 스나이더는 ”더 나은 약, 어쩌면 완벽한 약을 만들려 애쓰다 보니 약이 없어 생명이 위협 받을 가능성이 잊혀진 것 같다“고 지적했다. ”‘현 상황으로 인해 환자 치료가 어떻게 변했을까? 병원들은 대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무대 뒤의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

일각에선 규제 당국의 ’트집 잡기‘가 과도해 나머지 위험한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무균 공장에서 약품을 생산하는 것을 지연시킨 결과-FDA는 이를 적극 부인한다-당국이 병원으로 하여금 직접 무균 환경에서 약을 혼합하도록 밀어부친 꼴이 됐다. 그러나 상당수 병원은 그런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필자가 클리블랜드 클리닉을 방문한 날, 스나이더(오하이오 주 토박이로 키가 크고 성격이 명랑했다)는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약품 부족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한 나머지, 요즘은 가끔 꿈에도 나올 정도라고 토로했다. 병원 동료들과 지하 사무실에 모여 앉아, 공급이 부족한 필수 약품의 재고를 확인하는 것이 이젠 그의 일상이 됐다. 스나이더는 몇 주 전 푸에르토리코에서 마이애미로 출항한 배에 실린 염화칼륨의 도착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보기엔 그때까지 도착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스나이더는 동료들에게 ”포트 로더데일 Fort Lauderdale/*역주: 플로리다의 항구/부터 유카탄 Yucat?n 반도/*역주: 멕시코 지역/까지 중간에 멈추면서 가도 1주일이면 되지 않나“라며 ”내가 휴가를 내야겠어“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약품이 빨리 도착하지 않으면, 병원 약제 부서에서 약물 제조에 사용되는 농축액 비율을 변경해야 한다. 그럴 경우 IT 부서가 병원 전체의 전자건강기록을 재구축해야 한다. IT 부서는 이 소식에 큰 소리로 신음소리를 냈다. 스나이더는 그 날 다른 약품 부족도 관리하고 있었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 CDC)에서 박테리아 오염 가능성을 제기한 주사기의 대량 리콜이 그것이었다.

스나이더는 모든 문제를 거침없이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제약사들의 문제를 하나하나 체크하는 그의 모습에서 분노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스나이더는 이미 일상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체념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길이 없잖아요?“

번역 김화윤 whayoon.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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