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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TUNE 500]제동 걸린 제록스·후지필름 인수합병의 내막

▲기업 프로파일: 회사명 제록스, 포춘500 순위 183위, 매출 103억 달러, 영업이익 1억9,500만 달러, 직원 수 37만 6,100명, 총 주주수익률(2007~2017년 연 평균) -2.1%%

프린터 거대기업 제록스는 원래 일본 후지필름에 매각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거물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컨 Carl Icahn이 텍사스 억만장자 다윈 디슨 Darwin Deason과 함께 이 인수 건을 막아냈다. 최근 월가에서 벌어진 가장 터무니 없고 지저분하고 예측할 수 없었던 이 결투의 내막을 들여다보자. BY SHAWN TULLY

칼 아이컨은 대개 혼자 일을 한다. 인수합병 세계에서 ’어둠의 왕자‘로 알려진 그는 대개는 외부 변호인, 투자 은행가, PR 회사들과 함께 일을 하지 않는다. 반면 라이벌 행동주의자들은 이 같은 외부인 그룹을 조직해 기업 매수에 나서곤 한다. 그들과 달리 아이컨은 금융 애널리스트, 변호인으로 구성된 열 명 안팎의 내부 조직에 의존한다. 아이컨의 브레인 조직은 맨해튼 제네럴 모터스 건물 47층에서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이 82세 상사와 함께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그들은 지원팀에 불과하다. 아이컨의 파트너들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이컨 엔터프라이즈 Icahn Enterprises는 올해 포춘 500대 기업 리스트 136위를 기록했다. 아이컨은 금융 지원이 거의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에겐 300억 달러가 넘는 현금과 유가증권이라는 든든한 ’군자금‘이 있다. 전략에 관한 자문단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아이컨은 악명 높은 기업 매수 서한을 스스로 작성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이 공개 서한을 회사 이사진에게 보냄으로써, 잔인할 정도로 이들이 ’타조처럼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게 하거나 ’헐값‘에 회사를 팔게 한다.

아이컨이 또 다시 홀로 기업 매수에 착수한 건 분명 그의 의도였다. 2015년 후반 그는 제록스를 타깃으로 삼았다. 과거에 영예를 누렸던 이 기업은 분명 그에게 이상적인 후보였다. 제록스는 두 개의 사업체로 구성돼 있었다. 하지만 두 사업부 모두 성과가 좋지 않았다. 하나는 전통적인 사무용품 프랜차이즈이고, 다른 한 곳은 기업과 정부에 급여 지급 및 데이터 처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BPO (business process outsourcing) 사업체다. 아이컨은 제록스가 BPO 사업을 분사시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도 매수를 원치 않는 총체적인 문제 기업으로 남는 대신, 제록스를 2개의 독자적 회사로 분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사업부는 두둑한 프리미엄을 받고 매도할 수 있는 타깃이 될 수 있었다. 매수자가 바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이컨은 새 경영진을 뽑아 성과를 높이고 각 회사 주가를 올려 수익을 거둘 생각이었다. 그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제록스는 내가 본 기업 중 가장 최악으로 운영되는 사례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사업부 2곳 모두가 경영을 잘못 하고 있었다. 당연히 기업을 둘로 나누고, 새 경영진을 영입해야 했다. 제록스는 그렇게 좋은 브랜드를 갖고도 아무것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회사명이 동사(복사하다는 의미)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한 브랜드는 흔치 않다”고 강조했다.

아이컨은 결국 바라던 것을 얻었다. 2017년 초 제록스는 BPO 사업을 콘듀언트 Conduent라는 이름의 새 기업으로 분사시켰다. 그때까지 절반의 성공을 이룬 셈이었다: 콘듀언트는 번창 중이고, 견고한 주가 성적 덕분에 아이컨은 1억 달러 이상 수익을 챙길 수 있었다.

아이컨은 현재 제록스 주식의 9.2%를 보유한 개인 최대주주다. 그러나 ’제록스 원정‘은 50년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복잡한 건으로 밝혀졌다. 제록스 인수는 아주 도전적인 일이었다. 아이컨이 자신의 법칙에 예외를 적용, 파트너와 팀을 이룬 이유이기도 하다. 그 주인공은 78세의 나이에도 혈기왕성한 활동을 하는 다윈 디슨Darwin Deason이다. 그는 2010년 64억 달러에 외주 회사를 제록스에 매각한 인물. 그 사업부가 현재 콘듀언트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디슨은 제록스의 세 번째 대주주로 올라 있다. 나이와 부(富)라는 공통 분모를 제외하면, 두 남성은 상당히 기이한 조합이라 할 수 있다. 키 195㎝인 아이컨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했음에도, 상당히 강한 영국식 퀸즈 Queens 지방 억양을 고집한다. ’월가가 창조한‘ 이 인물은 철저한 매수 중독자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왜소한 체격의 디슨은 고집스러움과 외모라는 면에서 불독을 닮아있다. 그는 아칸소 Arkansas 지역 농장 출신으로,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집중하는 사업가다. 둘이 합하면 나이는 160세, 제록스 주식 15.2%를 보유한 가히 ’불패 듀오‘라 할 만하다.

아이컨과 디슨 두 사람은 공히 최악이라 생각했던 인수합병을 힘을 모아 저지했다: 바로 일본 후지필름이 제록스를 61억 달러에 인수하려던 계획이었다. 지난 5월 13일 두 사람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당일 제록스 이사진이 후지필름과의 합병 합의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둘은 강력한 힘과 현명함을 겸비한 라이벌로부터 전략적인 성공을 이뤄냈다. 그 상대는 바로 후지필름의 CEO 겸 회장 코모리 시게타카 Shigetaka Komori였다. 아이컨과 디슨이 힘을 합하기 전까지 코모리 회장(78)은 헐값에 미국의 아이콘 기업을 매수해 본인 커리어의 정점을 찍는 듯했다. 도쿄대학교에서 미식 축구를 했던 코모리는 스스로를 사업의 “전사”라고 표현한다. 그는 일본 총리 아베 신조와 아주 자주 골프를 칠 만큼 가까운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후지와의 합병에서 발을 빼기로 한 제록스의 결정(후지필름은 이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은 지난 수년 간 월가에서 벌어진 가장 거칠고 예측하기 힘든 결투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회오리 바람과도 같았다. 재판 기록과 주요 당사자들의 법정 증언들을 통해 광범위하게 드러난 이번 갈등을 낱낱이 파헤치면, 기업 역사상 가장 실패한 지배 구조의 적나라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2년에 걸친 이 ‘멜로드라마’는 씁쓸하게 편이 갈린 이사진과 전 CEO와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제록스의 전 CEO는 해고가 예정된 며칠 전, 후지 측에 유리한 거래안을 제시하며 자리를 보전했다. 그 거래 내용은 일본 대기업 후지가 거부할 수 없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아이컨과 디슨의 압박으로 합의가 결렬됐다.

아이컨은 “제록스 협상 막후에서 일어난 일들은 텔레비전 시리즈 ’빌리언스 Billions‘에 나올 수 있을 법한 놀라운 것들이었다”고 비유했다. “실제로 벌어진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 일이 정말 가능할 것이라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잊혀진 미국의 아이콘 제록스가 21세기 가장 치열한 인수전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럼에도 제록스는 전 세계 1,800억 달러 시장 규모의 거대한 인쇄 문서산업에서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 회사는 콘듀언트 분사 이후에도 올해 포춘 500대 기업 리스트 291위에 오를 만큼 규모가 크다. 매출이 103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여전히 강력한 브랜드 파워와 급성장 중인 산업 인쇄 분야로의 확장 잠재력 덕분에, 제록스의 회생 가능성은 계속 유효하게 평가 받고 있다.

아이컨과 디슨이 저지한 제록스 인수의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제록스의 최대 소유권을 후지필름과 제록스 간 합작 벤처인 후지 제록스 Fuji Xerox에 매각하는 것이다. 후지 제록스는 제록스 상품을 아시아에서 독점 생산 및 판매하고, 전 세계 나머지 국가에서 제록스가 판매하는 대부분의 사무용 복사기를 제조한다. 후지의 제록스 인수가 성사됐다면 제록스 주주들은 새로운 후지제록스 주식 49.9%를 소유하게 되고, 후지는 50.1%의 지배권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후지는 이 건을 성사시키는데 단 한 푼의 현금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현 합작 벤처에 후지의 다수 지분을 기부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제록스 주주들은 1회 배당금으로 25억 달러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배당금은 후지가 지급하는 게 아니라, 새 법인 후지 제록스의 채무로 잡혀 재무기록에 남는 상황이었다.

아이컨과 디슨은 이런 복잡한 거래가 성사되면, 후지는 거의 한 푼의 프리미엄도 지불하지 않으면서도 제록스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가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후지에겐 금상첨화지만 제록스 주주들에겐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부분 인수 건에는 최소 20~30%의 ‘지배 프리미엄’이 포함된다. 후지에 지배권을 주면, 제록스 소유주들은 경영상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건 아이컨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 협상은 단지 후지 측에 유리한 협상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이었다. 훌륭한 회사의 소수 주주로 영원히 전락하는 대신, 회사 전체 소유권을 후지에 넘기는 일이었다. 과거 후지가 어떻게 사업을 했는지와 무관하게, 49.9% 주식을 보유한 주주들이 완전히 권한을 잃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성난 두 명의 억만장자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 인수를 막기 위해 싸워나갔다. 아이컨은 평소 선호하는 공격 전술인 ’위임장 대결‘을 활용했다. 디슨은 아이컨이 지명한 4명의 새 이사진에 대해 지지를 약속했지만, 법정에선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움을 풀어나갔다. 그는 광범위한 2건의 소송을 제기했고, 이 소송 건은 2월과 3월에 각각 공개됐다. 첫 번째 소송에서 주장한 바는 다음과 같았다: 제록스가 독소 조항을 숨겼기 때문에, 전체 이사진을 교체할 수 있도록 이사진 지명 마감일을 연장해달라는 디슨의 요구를 회사가 수용해야 한다. 그가 제록스와 후지를 상대로 낸 두 번째 소송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제록스 이사진과 CEO는 사익을 도모하기 위해 인수 건을 협상했다. 뻔뻔하게 신의성실 의무를 위반하면서 제록스 주주들이 나쁜 거래에 동의하도록 밀어붙였다. 그리고 후지는 그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기로 공모했다. 제록스 CEO가 헐값의 인수 건을 물어다 주고, 후지는 그에게 신임 후지 제록스 CEO 자리를 보장한 것이었다.

아이컨은 디슨의 소송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이사진을 고소하는 건 역겨운 일이라 생각한다”며 “우리는 일단 이사회에 합류하면, 다른 이사진과 협력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뉴욕 법정에서 진행된 디슨의 공격은 내부 사정을 여과 없이 노출시켰다. 재판 기록에는 제록스의 중역, 이사, 금융 고문 및 후지의 최고위층들이 빈번하게 작성한 수많은 충격적인 이메일, 문자 메시지, 증언, 내부 보고서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4월 말 이틀에 걸쳐 진행된 2건의 소송은 맨해튼 법정에서 하나로 병합돼 판결을 받았다. 당시 제록스 CEO였던 제프 제이컵슨 Jeff Jacobson과 제록스 회장 로버트 키건 Robert Keegan, 반대편 이사 1명, 제록스의 투자 은행가 모두가 선서를 한 후 구체적인 증언을 했다. 필자도 재판에 참석했고, 판사에 의해 전체가 공개된 700건이 넘는 증거물을 검토했다. 포춘은 아이컨, 디슨 대리인들과도 폭넓은 대화를 나눴다. 제록스와 후지는 재판 중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자사 임원 및 이사진의 포춘 인터뷰를 거부했다. 그러나 증거와 진술, 그리고 이메일을 통해 이번 인수에 참여한 모든 이해 당사자들의 의도와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판사 배리 오스트라거 Barry Ostrager는 판결을 내리면서, 2건의 소송에서 모두 디슨에게 큰 승리를 선사하는 신랄한 의견을 밝혔다(그는 인수합병 소송 전문 변호사로 40년 넘게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제이컵슨과 키건, 제록스 이사진의 역할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난했다. 그는 제이컵슨이 자리를 보전 받는 대가로 후지 측에 유리한 거래를 전달했기 때문에, 후지와 그의 협상에 있어 “상당히 이해 상충적” 결과를 불러왔다고 언급했다. 그 결과 제이컵슨은 키건과 마찬가지로 “신의성실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법정 소송에서 제록스와 후지는 각자 정당성을 주장하는 ’각본‘을 제시했다. 그 시나리오는 제이컵슨과 키건의 증언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변호인단은 “제이컵슨과 키건, 이사진이 추진한 인수 건은 논리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매수인과의 협상이었다. 당시엔 그 누구도 매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후지도 제이컵슨이 CEO 자리를 약속 받지 않았다고 반박했다(하지만 그건 이사진의 의견과 대치되는 입장이었다). 회사는 오히려 “제이컵슨은 재능을 가진 임원으로서 최상의 선택이었다. 그는 양사 주주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제록스 변호인단도 “키건이 전체 이사회 승인 없이 CEO에게 인수 협상을 맡긴 행위는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2017년 말 제이컵슨이 갑자기 향상된 성과를 보였기 때문에, 키건은 “제이컵슨을 해고하려는 결정을 번복하도록 이사회를 독려했다”고 증언했다. 제이컵슨도 “개인적 이익이나 후지필름의 이익을 주주 이익보다 앞세웠다는 주장은 비난 받아 마땅한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압도적으로 디슨에 우호적인 결정이 내려지면서, 격동의 2주 동안 치열한 두뇌 싸움이 펼쳐졌다: 제록스는 먼저 아이컨과 디슨과의 합의를 발표했다가 다시 합의안을 철회했다. 그리고 험악하게 돌변한 후지필름과 대화를 시작했다. 이후 5월 13일 제록스 이사진은 입장을 다시 번복했다. 이들은 ‘아이컨 및 디슨과 합의를 통해 합병건은 종결됐으며, 제이컵슨은 CEO 직에서 해임됐다’고 발표했다. 키건과 4명의 이사들이 이사회에서 물러났고, 아이컨과 디슨이 선택한 임원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신임 CEO 존 비센틴 John Visentin은 데이터 처리업계에서 유명한 회생 전문가였

제록스의 3대 주주이자 억만장자인 다윈 디슨. 그는 후지필름과의 합병을 중단시키기 위해 2건의 소송을 제기했고 모두 승소했다.




다.

제록스는 현재 관심 있는 모든 기업들로부터 제안을 받겠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후지는 여전히 원래의 인수 건을 되살리려고 노력 중이다. 제록스는 인수 협상에서 철회한 후 반박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제록스에게 합의안을 폐기할 법적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손해배상 청구를 위한 법적 조치를 포함, 가능한 모든 선택지들을 검토할 것이다.’ 양사가 어쩌다 이런 교착 상태에 빠졌는지 이해하려면, 두 기업 간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컨이 제록스에 집중할 무렵인 2015년 말, 이미 회사 사업 규모는 수십 년 동안 축소되고 있었다. 1906년 뉴욕 로체스터Rochester에서 사진 인화용지 회사로 시작한 제록스는 1940년대 말 세계 최초의 고속 복사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회사 하드웨어가 대기업과 로펌, 정부 기관 내에서 문서 생산을 위한 필수품이 되면서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개인용 컴퓨터가 대량 도입되는 바람에 종이 인쇄와 복사 수요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제록스의 핵심 특허들이 만료되면서, 리코 Ricoh와 캐넌 Canon 같은 일본 경쟁업체, 미국의 휼렛 패커드Hewlett-Packard 등과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그 후 코네티컷 주 노워크 Norwalk에 위치한 제록스는 핵심 프랜차이즈 부문의 판매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금융 서비스 같은 분야로 사업 다변화를 꾀했다. 가장 최근인 2010년에는 디슨이 설립한 외주 기업 어필리에이티드 컴퓨터 서비스 Affiliated Computer Services를 인수했다. 하지만 이 같은 사업은 프린터·복사기 제조 및 판매와 잘 맞지 않았고, 그 결과 제록스는 대부분의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와 함께 구조조정을 반복했다. 한편 제록스의 인쇄 서비스 프랜차이즈는 비록 감소세를 보이긴 했지만, 꽤 높은 수익성을 나타냈다. 사업 내용은 대기업에게 하드웨어, 소모품, 유지보수를 포함한 완전 패키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제록스의 수익성 좋은 인쇄 서비스 사업과 지속적인 비용 감소 노력이 결합되면서, 놀랍게도 잉여현금흐름이 건전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는 ‘조금씩 빙하가 녹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재앙 수준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제록스와 후지 필름의 파트너십 역사는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양사는 후지의 일본 내수 시장에서 제록스의 사무용품 제작 및 판매를 하는 연합을 구성하고 있었다. 39년 동안 제록스와 후지는 동등한 파트너로서 지분 50%씩을 보유했다. 그리고 2000년 기념비적 순간이 찾아왔다. 제록스의 판매 부문 구조조정 실패가 회사 매출에 악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부채 더미에 올랐다. 제록스가 파산 직전까지 갔을 때, CEO 폴 앨레르 Paul Allaire는 서둘러 현금 확보를 위해 자산을 매각했다. 우선 독립적으로 소유했던 중국 프랜차이즈를 후지 필름에 5억 5,000만 달러에 매각했다. 2001년 초 제록스는 후지 제록스 지분 25%를 매각해 13억 달러를 챙겼고, 후지는 합작법인에서 75% 지배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제록스는 현재 350억 달러 규모 아시아 및 환태평양 시장에서, 자사 상품 생산 및 판매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갖는 합작법인 지분 중 고작 25%만을 보유하고 있다. 제록스는 약해졌고, 후지는 강해진 셈이었다. 코모리의 지휘 아래 후지는 코닥의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후지는 사진 필름 사업에서 의료 기기·화장품 같은 성장세를 보이는 부문으로 사업 다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후지 제록스가 제록스의 특허와 설계에 상당히 의존했음에도, 후지는 아시아 시장에서의 성장세 덕분에 판매 측면에서 큰 수혜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록스가 입은 피해는 판매와 수익 감소 수준을 훨씬 능가했다. 2001년 거래에는 합작기업계약(Joint Enterprise Contract)이라는 새 합의안이 포함돼 있었다. 거기에는 파트너 양사의 지배권에 대한 내용과 제록스 매각 시 발생할 수 있는 가혹한 수준의 벌금이 언급돼 있었다. 합작기업계약과 기술협정(Technology Agreement)이라는 두 번째 계약이 결합하면서 제록스는 엄청난 제약을 받았다. 기술협정은 5년 동안 유효했다: 제록스가 현재도 맺고 있는 이 협정은 전임 CEO 어설라 번스 Ursula Burns가 2016년 승인했으며, 2021년 3월 만료된다. 만약 제록스가 매각되면 두 합의안에 따라 회사는 지배권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기술협정이 만료되기 전까진 아시아 시장에서 브랜드 이름을 되찾아 올 수 없다. 게다가 이후 추가 2년 동안은 배타적인 브랜드 네임 회수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잠재적인 인수기업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합작기업계약과 기술협정이 유지되면, 제록스를 매수하는 경쟁업체나 사모펀드는 후지 제록스 경영에 대한 발언권이 없으며 2023년 초까지 아시아에서 제록스 상품을 독립적, 배타적으로 생산하고 판매할 수 없다.

이 두 합의안에는 제록스의 발을 묶는 소위 ‘독소조항’까지 포함돼 있다. 이는 후지가 아닌 다른 파트너에 제록스를 매각하는 걸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 놀랍게도 이 독소조항의 존재 여부는 제록스와 후지필름이 1월 31일 합병 안을 발표하기 전까지 공개된 적이 없었다. 그 무렵엔 아이컨과 디슨이 이미 강력한 반대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아이컨은 제록스 지분을 매입한 순간부터, 새 경영진 구성에 관여하려 했다. 그는 “콘듀언트와 제록스 양사 모두 새롭고 능력 있는 경영진을 원했다”며 “어설라 번스에게 둘 중 어느 회사도 경영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설명했다(번스는 이에 대해 답변을 거부했다). 2016년 중반, 아이컨은 외부 CEO 영입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합의안을 제록스 이사회와 함께 도출했다. 그는 2가지 합의안에 서명했다. 첫째는 ’정지‘ 협정(standstill pact)으로, 그가 위임장 대결에서 제록스 이사회에 반기를 들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비공개 합의안으로, 기밀을 지키는 대신 아이컨이 내부 정보를 받는 내용이었다. 아이컨이 한 걸음 양보한 대가로 제록스는 아이컨의 대리인 격인 조너선 크리스토도로 Jonathan Christodoro를 우선 이사회 참관인으로 임명하고, 2016년 중반부터 정회원 자격을 부여하는 내용에 합의했다. 그러나 6월이 되자, 번스는 자신의 2인자인 제프 제이컵슨을 차기 CEO로 발표했다. 명백하게 아이컨이 원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아이컨은 “제이컵슨은 번스의 시종이었다. 그는 제록스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무리 중 일부였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2017년 1월 번스의 후임으로 CEO에 오른 제이컵슨은 임기 초반 아이컨이 원했던 종류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듯했다. 다음의 증언은 재판 기록에 자세히 서술돼 있는 내용이다. 제이컵슨이 3월 초 후지의 도쿄 본사를 처음 방문했을 때, 코모리와 스게노 겐지 Kenji Sukeno 사장은 제록스 지분 100%의 현금 매입 거래에 대해 관심을 나타냈다. 제이컵슨은 제록스의 현재 주가 30달러의 30% 정도가 일반적 프리미엄으로 책정될 것이라는 점을 그들이 이해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3월 16일 제이컵슨은 이사회와 협의를 마친 후 후지에 서한을 보냈다. 그 내용은 제록스가 ‘적정 프리미엄’에 100% 현금 거래를 원한다는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른 경쟁업체보다 훨씬 더 많은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매우 유력한 단일 안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가타부타 협상을 할 필요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후지가 후지 제록스에서 이미 상당 부분 혜택을 보는 상황에서, 후지는 왜 갑자기 100% 지분 매입을 제안했을까? 이전에는 제록스 지분 전체 매입을 단 한번도 제안한 적이 없었다. 그 답은 다음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제록스가 분사 후 문서 관리 사업부문에 집중했기에 다른 매입 희망기업들이 제록스에 눈독을 들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합작 합의안이 보호막을 제시해주기는 했지만, 합의 내용의 허점을 파고들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협상 대화는 곧 회계 논란으로 인해 중단됐다. 2017년 4월 20일 후지필름은 후지 제록스의 대규모 회계 부정을 공개했다. 이 회계 스캔들은 후지와 제록스 양사 모두에 큰 손실을 안긴 것으로 드러났다(손실 금액이 밝혀지진 않았다). 후지 제록스의 지배 경영권을 갖고 있는 후지는 83년 기업 역사상 처음으로 분기 보고서 발표를 연기했다. 후지는 후지 제록스의 회계 부정 스캔들로 인한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해야 하기 때문에, 인수를 진행할 수 없다고 제록스 측에 통지했다.

한편 제록스 이사진은 리더십이라는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제록스의 신임 CEO는 이미 이사들의 신망을 잃고 있었다. 후지 제록스의 회계 부정이 터진 당일, 콘퍼런스 콜을 하기 위해 열린 이사회 회의에서 다수는 제이컵슨의 초기 성과를 두고 그를 압박했다. 그 날 회의 중 키건이 필기했던 메모가 이후 법원에 제출됐다. 번스에 이어 회장에 오를 예정이었던 키건은 메모에 제이컵슨이 ’학습능력이 지나치게 떨어지고, 불만이 많으며, 과도한 자신감‘을 갖고 있고, ’경청 기술이 형편없다‘고 적었다. 키건은 또한 예언자적인 질문도 적었다. ’주스‘를 완수해내는데 과연 그가 필요할까? 주스는 후지-제록스 거래의 암호명이다.

카리브 해에 있는 60m 규모의 화려한 이탈리아산 요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디슨은 걱정에 잠겼다. 그는 독소 조항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후지가 제록스에 대해 무언가 조건을 달았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디슨의 배짱은 아이컨 못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식 다음날, 유년기부터 살았던 농장을 떠나 오클라호마 주 털사 Tulsa 지역에 있는 걸프 오일 Gulf Oil 우편실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디슨은 데이터 처리 직원들과 어울렸다. 그는 텍사스로 이주한 후, 은행 ATM 거래 처리 사업을 시작했다. 1988년에는 어필리에이티드 컴퓨터 서비스를 설립했다. 주요 고객은 이지패스 E-ZPass였다. 그는 “시속 100 마일로 움직이는 러닝 머신 위에서 80마일로 달리면 떨어지게 마련이다. 자기개발도 마찬가지”라고 그 동안 자신이 달려온 방식을 설명했다.

5월 말 디슨은 제록스에 개인 서한을 보냈다. 편지 내용은 ’회사 지배권이 변경될 경우, 합의안에 숨은 조건들이 제록스 가치에 막대한 손실을 줄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디슨의 요청에 대해, 제록스는 그가 기밀유지협약에 서명하는 경우에 한해 합의안을 공개하겠다고 답변했다. 디슨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이후 후지 인수 협상 결렬 가능성이 월 스트리트저널에 보도됐던 1월 전까지, 디슨은 제록스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제이컵슨은 법정 증언에서 “5월 중순까진 이사회가 내 성과에 대해 불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컨을 만났을 때, 이를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 아이컨은 제이컵슨을 맨해튼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 인접한 그의 펜트하우스 아파트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하며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포춘의 아이컨 인터뷰와 제이컵슨의 메모 및 증언에 따르면, 그는 제이컵슨에게 제록스 매각을 원한다고 말했다. 제이컵슨이 제록스를 팔지 못하면, 제이컵슨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제이컵슨은 이 같은 협박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아이컨에게 ‘내 사랑스러운 아내와 가족에게로 돌아가라고 하는 건 당신이 내게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제이컵슨은 이에 대한 인터뷰를 거절했다). 아이컨 또한 제이컵슨의 ‘장기 성장 계획’에 극도로 실망했다. 그의 장기 목표는 5년간 주당순이익을 고작 8% 올리겠다는 것이었다. 아이컨은 “제이컵슨에게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숫자에 밝은 사람들이다. 이 계획으로는 주주들에게 아무런 가치를 가져다 줄 수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아이컨은 제이컵슨과 그의 전략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키건과 공유했다. 키건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결정을 내렸을 땐 이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 오직 하나였다. 제록스가 ‘서둘러 회사를 팔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후 제이컵슨은 주도적으로 후지와의 매각 협상을 밀어붙였다. 그는 압박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아이컨이 내건 협박카드를 활용했다. 회계 부정을 구실 삼아 합작 법인을 종료시키겠다는 것이었다. 6월 말 제이컵슨은 키건에게 ‘아이컨 카드를 내걸어 사안의 긴급성을 알렸고, 후지 측에서 이를 받아들였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후지도 같은 달 후지 제록스의 회계 스캔들에 대한 독립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회계 부정으로 인한 총 손실액은 3억 6,000만 달러였으며, 그 중 제록스의 피해액은 9,000만 달러였다. 보고서는 후지 제록스의 ‘은폐 문화’와 후지의 방만한 감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6월 1일 실적 발표 때, 코모리는 회계 스캔들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7월 들어 분수령이 될만한 2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첫 번째는 7월 10일 제록스 담당 은행들의 모임인 센터뷰 파트너스 Centerview Partners 맨해튼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였다. 회의에는 제이컵슨과 후지의 주요 임원 2명이 참석했다. 당시 후지 측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폭탄발언을 내놓았다. 제록스 주가가 너무 높기 때문에, 제록스 지분을 100% 인수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는 다소 당혹스러운 주장이었다. 3월 후지가 100% 지분 인수에 관심을 보였던 시기에 비해 당시 제록스 주가가 3%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제록스 측은 오랫동안 고수해온 100% 현금 지분 매입 안을 포기하고, 되려 더 특별한 방안을 자발적으로 제시했다: 센터뷰가 후지가 50%를 조금 상회하는 제록스 지분을 매입하고, 현금 거래는 요구하지 않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센터뷰는 H.J. 하인츠 H.J. Heinz와 크라프트 푸드 Kraft Foods 합병 당시에도 비슷한 방식을 사용했다. 당시 하인츠 주주들은 새로운 크라프트 하인츠사 주식 51%를 보유했다. 이번 아이디어가 센터뷰에서 나온 것인지, 제이컵슨이 제시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제이컵슨은 센터뷰가 해당 아이디어를 제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건 제이컵슨 자신이다. 같은 날 그는 키건과 앤 리스 Ann Reese 이사에게 ‘신의 한 수를 던졌다. 문은 열려 있고,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이미 100% 현금 매각 옵션을 협상 테이블에서 효과적으로 제외시킨 상태였다.

아이컨은 비공개 합의안에 서명했고, 크리스토도로로부터 보고서들을 건네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곧 49.9% 소수 지분 안에 대해 알게 됐고, 그에 대해 결코 호의적일 수 없었다. 아이컨의 입장은 후지가 ’진짜 돈‘을 지불하고, 만약 그렇게 안 할 경우 ’후지 제록스에서 순차적으로 사업을 정리해 나가고, 결과적으로 합작 법인을 종료해 아시아에서 제록스 이름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후지 측이 분명 두려워할 입장이었다.

아이컨의 지속적인 요구에도 대화가 전면 재개된 건 10월 중순이 되고 나서였다. 제이컵슨의 재촉에 후지는 결국 금융 자문회사로 모건스탠리를 고용했다. 비록 그가 협상 테이블에선 제록스를 대표했지만, 이사회는 10월 말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제이컵슨을 존 비센틴으로 교체하겠다는 결단이었다. 존 비센틴은 문서 외주기업 노비텍스 Novitex를 부활시킨 IBM 출신 베테랑으로, 아이컨이 적극 추천했던 인사였다. 사실 그가 CEO 업무를 시작한 날짜는 12월 11일이었다. 그 날은 아이컨이 위임장 대결을 제기할 수 있는 마감일이었다.

이사회는 또한 만장일치로 ’제이컵슨이 후지와의 모든 협상을 중단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사 2명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비센틴이 CEO직을 맡아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11월 10일 키건은 발 수술에서 회복하자 마자, 웨스트체스터 카운티 Westchester County 공항에서 제이컵슨을 만났다. 키건은 제이컵슨에게 이사회가 진지하게 그를 다른 후임과 대체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양 측에 따르면, 키건은 제이컵슨에게 아직 최종 결정이 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크리스토도로와 셰릴 크론가드 Cheryl Krongard 이사는 이사회에서 실제 해당 발언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제이컵슨에겐 최후의 수단이 있었다. 후지의 최고 경영진은 11월 14일 뉴욕에서 해당 건의 협상을 위한 회의를 갖기로 되어 있었다. 제이컵슨은 11월 21일 일본에서 코모리와 만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제이컵슨은 후지필름의 기획총괄담당 카와무라 다카시 Takashi Kawamura에게 회의 2건을 모두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알렸다. 카와무라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만약 회의가 성사되지 않으면, CEO 코모리가 ’매우 실망할 것‘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양 측이 ’거래의 동력을 잃을 것‘이라는 내용도 덧붙였다. 제이컵슨은 이 내용을 키건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또 다시 충격적인 반전이 이뤄졌다. 키건이 이사회의 만장일치 결정을 뒤집고, 제이컵슨에게 계속 후지와 대화를 지속하게 했다. 키건은 그에 대해 “전쟁터에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증언했다. 키건의 기록을 보면, 그는 제이컵슨의 약점이 무엇이든, 합병을 성사시키는 데에는 제이컵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분명히 생각했다. 키건은 곧 해임될 제이컵슨에게 협상을 계속 담당하라고 허락했다는 사실을 센터뷰 은행가들과 앤 리스 이사에게만 알렸다.

제이컵슨은 키건 회장으로부터 소위 ‘형 집행취소’를 받은 덕분에, 후지 필름의 지원과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카와무라는 아이컨에 대항하는 연합을 강조하며, 제이컵슨에게 다정한 어투의 메시지들을 보냈다. 카와무라는 11월 12일 제이컵슨에게 ‘우리가 한 팀이 돼 상호 적에게 맞서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제이컵슨은 ‘친구여, 우리는 제휴를 맺은 셈’이라고 답했다. 제이컵슨과 코모리의 회의 전날, 카와무라는 제이컵슨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제이컵슨의 자리 보전에 코모리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카와무라는 ‘코모리가 현재 당신 주위 상황을 주시하고 있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에 신경을 쓸 것’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이후 제이컵슨은 센터뷰의 헤스 Hess에게 ‘카와무라가 나 없이는 거래도 없다고 말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11월 21일 제이컵슨은 코모리와 가진 회의에서, 후지가 매입 건 보상의 일환으로 결코 큰 금액이 아닌 20억 달러를 특별 배당금으로 지급해 달라고 제안했다.

키건은 제이컵슨의 자리를 보전해 주면서, 회사의 최대 개인주주인 아이컨을 심각하게 적대시하고 있었다. 아이컨은 계속 키건에게 ’비센틴을 CEO 자리에 앉히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그에 따르면, 키건은 줄곧 “변화가 목전”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이컨은 “키건은 계속 말만 했다. 비센틴이 곧 CEO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키건은 계속 꾸물거렸다. 그 동안 제이컵슨은 막후에서 공모 중이었다. 그가 책략을 꾀하는 능력의 절반만이라도 회사 경영에 썼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난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30일 후지는 제록스에 공식 제안서를 발송했다. 7월에 제안한 구조와 같은 골자로, 제록스가 후지 제록스의 지분 49.9%를 갖고, 추가로 제이컵슨이 제안한 20억 달러의 배당금을 받는 내용이었다. 키건은 12월 4일 이사회 회의에서 해당 제안서를 발표했다. 키건과 리스를 제외한 이사들 대부분은―전부는 아니더라도―그 동안 제이컵슨이 후지 필름과 협상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3주 전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제이컵슨이 후지와 말조차 섞지 못하게 했던 그 순간에도, 그가 협상을 진행했다는 사실에 일부 이사들은 충격을 나타냈다.

아이컨은 비공개 합의안 덕분에 이사회 심의 내용을 검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제이컵슨이 후지필름과 협상했던 거래의 조건들을 알게 됐다. 아이컨은 “그때 정말 열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키건은 계속 ‘나를 믿어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 거래 내용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거래를 하겠다고? 제 정신인가?’ 키건은 내게 사기를 치려 했다! 우리 모두 제이컵슨이 제록스를 경영할 수 없다는 데 동의했었다. 그런 그가 2배나 규모가 되는 기업을 어떻게 운영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크리스토도로는 12월 8일 금요일, 항의 표시로 이사회에서 사임했다. 그가 떠나자 아이컨은 ‘정지협정(停止協定)’에서 자유로워졌다. 그에 따라 4명의 이사를 임명할 수 있었다. 그는 12월 11일 월요일에 이를 실행에 옮겼다. 법원 문건에 따르면, 제이컵슨과 키건, 후지 임원들은 아이컨이 협상 조건에 만족하길 바랐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곧장 위임장 대결을 시작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센터뷰는 이사회 소집 발표 자리에서, 제록스가 이번 거래를 통해 아이컨을 제거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사회가 거래를 지지하면, 주주 표 대결에서 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연례 주총에선 이사진 선출과 함께 매각 거래에 대한 투표도 바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센터뷰는 주주들이 매각 거래에 반대할 경우에만, 아이컨의 이사진 임명안을 지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봤다. 따라서 최상의 가정은 아이컨이 투표 전에 그의 지분을 매각하거나, 아니면 연례 주총에서 패배를 맛보는 것이었다.

매각 거래 안이 위태롭게 진행되던 1월말 만해도 제이컵슨이 후지 제록스의 신임 CEO 자리를 굳힐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1월 16일 카와무라는 제이컵슨에게 ‘당신이 CEO가 되길 원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키건에 전하라고 코모리에게 말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사실 이는 코모리가 요청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공동 CEO를 제안했다. CEO 한 명은 후지에서 임명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키건이 이의를 제기하자, 코모리는 요청사항을 철회했다. 제이컵슨은 신임 CEO직이 이번 거래의 조건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크론가드 이사는 “센터뷰와 외부 자문 폴 바이스 리프킨트 와튼 앤 개리슨 Paul Weiss Rifkind Wharton & Garrison이 이사진에게 ‘제이컵슨이 CEO가 되는 것이 실제 요구사항’이라고 언급했다”고 증언했다. 4월 27일 증언석에서 센터뷰의 데이비드 헤스 David Hess는 “매각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제이컵슨이 새 합병회사의 CEO가 돼야 하는지에 대해 센터뷰가 이사회에 자문을 제공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제록스와 후지필름은 1월 31일 합병을 발표했다. 키건이 마지막 순간 로비를 하자, 코모리는 배당금을 25억 달러로 소폭 올리는 데 동의했다. 제록스 주가는 처음엔 약간 상승했다가, 투자자들이 상세 내역을 파악하면서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거래 공개의 일환으로, 제록스는 처음으로 독소 조항을 포함한 합작 법인 계약서 전체를 공개했다. 디슨은 분통을 터뜨렸고, 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내용이 공개되면서 합병에 타격이 가해졌다. 거래를 급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제록스와 후지가 후지 제록스의 재무제표 감사보고서 제출을 기다리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해당 보고서에는 회계 부정으로 인한 최종 손실 금액이 들어가 있었다). 제록스에 따르면, 만약 손실금액이 미감사 재무제표 수치를 과도하게 초과할 경우, 회사가 합병을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이 계약서에 명시돼 있었다. 4월 24일 후지 제록스는 마침내 감사보고서 상의 손실금액을 공개했다. 액수는 기존 추정치인 3억 6,000만 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4억 7,000만 달러였다. 31%나 증가한 금액이었다. 그에 따라 제록스의 손실은 9,000만 달러에서 1억 1,800만 달러로 불어나 있었다. 결국 제록스는 회계의 난맥상을 거래 결렬 조건으로 내걸게 되었다.

합병 협의안이 무산되기 전, 마지막 극적인 순간도 있었다. 이 내용은 제록스가 5월 13일 후지에 발송한 해지 통보서에서 나타났다. 회사는 후지 제록스가 감사 재무제표 제출 마감 시한을 놓쳤고, 감사보고서의 수치가 당초 예측치를 크게 상회했기 때문에, 회계 부정을 이유로 거래를 취소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해당 문건은 제이컵슨이 더 좋은 조건을 취해 거래를 살리려 노력한 사실도 최초로 폭로하고 있었다. 물론 과거 제록스는 “현재 거래 안이 주주들을 위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바 있다. 제이컵슨은 3~4월 도쿄에서 코모리와 2차례 회의를 갖고 더 나은 금액을 받기 위해 로비를 펼쳤다. 재판이 시작되기 이틀 전인 4월 24일, 키건은 화상회의를 통해 코모리에게 어필하기도 했다. 오스트라거 판사가 디슨에 유리한 결정을 내리고 난 다음 날, 키건은 코모리에게 더 깊은 간청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5월 9~10일 제록스 담당 은행과 변호사들은 후지 측 상대방에게 회사측 주장을 펼쳤다. 제록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후지가 배당금에 12억 5,000만 달러를 추가하되, 후지 제록스의 부채를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후지의 자체 현금보유고에서 비용을 충당하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배당금을 올릴 경우, 주주들은 약 17% 인상된 주당 5달러를 추가로 받게 되어 있었다.

코모리는 이 제안을 덥석 물지 않았다. 그는 키건에게 5월 21일까진 새 조건에 대해 협상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후지가 5월 10일 보도자료를 내면서 양사의 균열이 더 깊어졌다. 회사는 ‘제록스에서 새 제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록스는 거래를 살려내기 위해 추가 배당금을 요구한 바 있었다. 제록스는 거래 해지 통보에서 ‘해당 발표는 명백한 거짓이다. 후지의 신의성실 결여를 분명히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후지가 거세게 반발하는 동안, 아이컨과 디슨은 법정과 이사회에서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센틴이 CEO로 임명돼 제록스의 실적 향상이 시작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후지와의 합병이 취소되면서, 제록스는 자사를 위한 진정한 매각 절차가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다. 만약 후지필름이 합병 거래를 저지하기 위해 독소조항을 강제하려 할 경우, 아이컨과 디슨은 회계 부정을 활용해 법정에서 그 시도를 막아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이컨과 디슨에겐 아직 해결해야 할 ‘내기’가 남아있다. 포춘은 두 사람이 현금 5만 달러 내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디슨이 이사진 임명 마감기한을 늦추기 위한 소송에서 패소하면, 그가 5만 달러를 아이컨에게 준다는 것이었. 이 텍사스 부호는 기꺼이 돈을 걸었다. 아이컨은 “나는 수 많은 내기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칼 아이컨과는 절대 내기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웃었다. 그리곤 “하지만 이번 내기에 져서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이제 아이컨과 디슨은 제록스와 함께 최종적인 큰 승리를 최종적으로 이루는 데 승부를 걸고 있다. /번역 최명인 chm7interpre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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