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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집권뒤 폭정·인권탄압 일삼아…"군부독재의 전형"

[전두환 前 대통령 사망]

■ 민주주의 역사에 남긴 치명적 상처

군내 사조직 '하나회' 결성…12·12쿠데타로 서울의 봄 짓밟아

5·18 시민들 유혈진압에 언론자유 말살·기업은 부정축재 동원

6월 항쟁으로 내리막길…백담사 유배후 내란혐의로 무기징역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8월 광주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집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23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살아 생전 12·12군사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인물이다.

직선제 선거를 거친 경험이라도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달리 이른바 ‘체육관 간선제’로만 임기 내내 권력을 유지하면서 독재 정치인의 대명사가 됐다. 퇴임 직후 백담사로 유배되고 법정에서 사형·무기징역을 잇따라 선고받으며 단죄되는가 했지만 이어진 사면 조치로 유야무야됐다.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과오에 대해 진정성 있는 반성을 하지도 않았고 추징금조차 납부하지 않아 국민적 지탄을 받기도 했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대구로 이주한 전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육사 11기로 입학했다. 육사 시절에는 동기생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자청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 때는 육사 후배들의 동원해 군부 지지 거리 행진을 주도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제1공수특전단장 등을 거치며 엘리트 군인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76년에는 대통령경호실 차장보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좌했고 1979년에는 국군보안사령관 신분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사건을 수사했다.

전 전 대통령은 영남 출신 육사 동기·후배를 중심으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결성을 이끌었다. 이들은 전 전 대통령과 함께 1979년 12·12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서울의 봄’을 짓밟았다. 군을 장악한 전 전 대통령은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겁박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뒤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의 발을 묶고 헌정을 마비시켰다.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이 민주주의 복원을 요구하며 거리로 몰려나오자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열흘간 유혈 진압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전 전 대통령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빌미로 최 대통령을 하야시킨 뒤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간접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사실상 스스로 취임했다. 전 전 대통령은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1980년 10월 27일 공표한 뒤 이듬해 또다시 간접 선거를 치르고 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 전 대통령의 통치 방식은 군부 독재 정권의 전형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언론 통폐합 조치와 보도 지침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말살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야당 정치인, 재야 인사, 학생들을 고문 등의 수단을 동원해 모질게 탄압했다. 기업인들은 전 전 대통령과 민주정의당의 통치 자금 부정 축재에 동원됐다.

전 전 대통령이 휘두르던 절대 권력은 1987년 4·13 호헌 조치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6월 항쟁에 결국 무너졌다. 같은 해 1월 서울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6월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됐다. 전두환 정권의 퇴진에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부담과 미국의 압박도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말 치러진 직선제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양김 분열로 육사 동기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전 전 대통령에게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5공 청산 바람이 거세게 불며 퇴임 한 달 만에 동생 전경환 씨가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1988년 11월 23일에는 재임 기간 과오와 비리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부인 이순자 여사와 강원도 백담사로 유배 길에 올랐다. 전 전 대통령이 사망한 시점에서 정확히 33년 전 일이었다. 백담사에 유배 중이던 1989년 12월 31일에는 국회 광주특위와 5공특위 합동회의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1995년 12월에는 내란·살인·뇌물수수죄 혐의로 노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됐다. 1심에서는 사형을, 2심에서는 무기징역을 각각 선고 받았다. 1997년 12월 대선 직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건의를 받아들이며 특별 사면 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전 전 대통령은 국민들 앞에 단 한 번도 반성의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는 아들 등을 통해 사과의 뜻을 표명한 노 전 대통령과도 다른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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