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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인생을 조국에 바친다" 철강왕이 꿈꾼 애국적 기업가 정신

[포춘코리아 CEO 500]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지난 12월 13일 타계했다. 고 박태준 명예회장은 사업보국을 실천했던 마지막 기업인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가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고 창업주인데도 포스코를 사유화하지 않았다. 박태준 회장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신기주 기자 jerry114@hk.co.kr

국이 군대를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장교로 투신했습니다. 한국이 기업 을 찾을 때 당신은 기업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 로 할 때 당신은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1990년 11월 프랑소와 미테 랑 프랑스 대통령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이렇게 말했다. 박태준 회장은 프랑스가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를 받았다. 미테랑 대통령은 덧붙였다. “한국에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 그것은 귀하의 삶에서 끊임없는 지상명령이었습니다.” 박태준 회장이 철의 지상명령을 처음 받은 건 1965년 6월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명 예회장에게 말했다.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거니까는, 임자는 제철소를 맡아줘야겠어. 고속도로가 되고 제철소가 되면 공업국가의 꿈이 실현되는 거야. 자네의 능력과 뚝심을 믿네.” 박태준 회장은 이미 대한중석을 정상화시키면서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터였다. 대한중 석은 지금의 대구텍이다. 그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회장에게 제철 산업을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박태준 회장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국가의 지상명령을 받아서 나라를 지켰다. 해방과 함께 와세다 공대 기계공학과를 중퇴했고, 1948년 육사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 기생으로 입학해 군인이 됐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마지막까지 서울을 사수하다가 단신으로 퇴 각했다. 그런 박태준 회장에게 국가가 이번엔 경제인이 돼서 산업 전선을 지켜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사업보국
지상명령을 받아들였지만 박태준 회장에겐 돈도 기술도 없었다. 당장 1억 달러에 달하는 공장 건 설 비용이 문제였다. 박태준 회장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도움을 요청했다. IBRD는 먼저 공장을 지으면 차관단이 돈과 기술을 빌려주 겠다는 약조를 했다. 하지만 1969년 1월 직접 워싱턴으로 건너가서 자금 지원을 요청했을 땐 딴소리를 했다. IBRD 내부 보고서가 치명 타였다. 보고서는 “한국은 기술집약적인 철강 산업보단 노동집약적인 기계공업을 먼저 하는 게 좋다”고 쓰여 있었다. 당시로선 부정하기 어려운 지적이었다. 사실 일관 제철소 건설은 자유당 정권 시절에도 한 차례 추진됐던 사업 이었다. 그러나 돈과 기술이 없단 이유로 난항 을 겪다가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유야 무야됐다. 이번에도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 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박태준 회장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책임을 회피하 기보단 책무를 짊어지는 쪽을 선택했다. 신념 때문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한국전쟁에 겪어 내면서 마음속에 좌우명을 하나 새겼다.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였다. 박태준 회장이 포 기하지 않은 건 경제적 성공을 위한 야심이나 개인적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조국을 위해서

“철이 성공하면 나라가 살고, 철이 실패하면 나라도 망한다. 나는 철에 목숨을 걸었다”

였다. 한국이 자체적으로 철강 산업을 육성하지 못하고선 산업입국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 었다. 박태준 회장은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했다. 워싱턴에서 퇴짜를 맞고 돌아가던 길에 잠시 들렀 던 하와이에서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제철소를 짓는다는 계획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말처럼 쉬 운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대일 청구권 자금은 농업 분야에만 쓰기로 되어 있었다. 일단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재가를 얻어냈다. 하와이에서 곧장 도쿄로 날아갔다. 사실 대일 청구권 자금은 용도도 농업으로 한정돼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도 함부로 손 댈 수 없는 돈이었다. 한국은 대일 청구권 자금의 액수나 청구 방식을 놓고 사분오열된 상태였다. 대학가에 선 데모가 끊이질 않았다. 이 돈을 쓰겠다고 나섰다간 당장 매국노라고 매도당할 수 있었다. 무 엇보다 일반 국민들에게 그다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철 공장을 짓는 데 이 돈을 쓴다는 건 위험 천만한 일이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일 청구권 자금을 얻어낸 인도네시아는 그 돈으로 화려 한 호텔을 지었다. 국민들에게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보여주려는 의도에서였다. 대일 청구권 자금을 활용한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이때 나온 얘기가 “철은 산업의 쌀”이란 말이었다. 철은 쌀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대일 청구권 자금을 철강 산업에 투자하는 건 농업 에 투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남은 문제는 기술이었다. 역시 일본이 답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일본에서 돈뿐만 아니라 기술 도 이전받으려고 협상을 벌였다. 지금은 신일본제철, JFE, 스미토모메탈로 불리는 당시 일본 3 대 철강 회사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일본이 그냥 제철 기술을 이전해줄 리가 없었다. 일본 철강 업체 경영진들은 박태준 회장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부러 휴가를 내서 줄행랑을 치기 일쑤 였다. 박태준 회장은 휴가지까지 따라가서 매달리곤 했다. 결국 박태준 회장은 일본 내 여론을 반등시키는 데 성공했다. 어차피 한국의 철강 산업이 일본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할 것인 데 다가 인근 나라에 철강 산업 수요가 생기면 앞 으로 한국에서 자체 생산이 어려운 고품질의 일본 철강을 더 많이 수입해 갈 것이라는 계산 이 깔려 있었다. 40년 뒤 일본의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갔 다. 포스코는 일본 3대 철강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말한다. “신일본제철은 이제 포스코와 기술 교류에 매 우 적극적입니다. 서로 인력을 교환해서 각자 의 장점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어요.” 휴가지까 지 따라가 일본 철강 경영진에 고개를 숙이면 서도 박태준 회장은 어쩌면 오늘의 역전극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박태준 회장은 일관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돈 과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25년 전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주시옵소서”

제철보국
“나는 사장이 아니다. 나는 전쟁터 소대장이 다. 소대장에겐 인격이 없다.” 1970년 4월 시작된 포항제철소 건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바 다의 모래바람 탓에 눈조차 뜰 수 없을 정도였다. 박태준 회장은 공사 현장에선 군인처럼 일했 다. 공장 설비를 담당한 일본 측이 공기를 늦추자고 제안하자 오히려 공사장 인부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외쳤다.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아온 조상의 피값으로 짓는 겁니 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합시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유명한 우향우 정신이다. 임전무퇴 정신이다. 박태준 회장은 공사 현장에 서 먹고 자면서 진두지휘를 했다.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철이 성공하면 나라가 살고, 철 이 실패하면 나라도 망한다. 나는 철에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하면 된다는 식의 우향우 정신만으론 포항제철을 둘러싼 정치적 세파까지 넘을 수 없 었다.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소 건설을 시작하면서 맨 먼저 직원용 아파트부터 지었다. 사실 박 태준 회장은 현장에선 소대장을 자임했지만 실제론 현명한 경영자였다. 달랑 공장만 짓는다고 질 좋은 철강 제품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공장을 움직일 고급 인력이 필요했 다. 그러자면 그 인력이 안착할 아파트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나 정치권과 언론에선 대일 청구 권 자금으로 호의호식하려 한다고 특혜 시비를 걸었다. 박태준 회장은 당시 서슬 푸른 정보 기관 의 가택 수색도 받았지만 나온 거라곤 이불뿐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 건설의 발목을 잡고 있던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담 판을 벌인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유명한 종이 마패를 받는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대 통령의 뜻은 곧 절대 명령으로 통했다.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갈인 하나만으로 도 거액의 자금을 은행에서 인출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을 위해 정치 권력 을 이용할 줄 알았다. 하지만 포항제철을 정치 권력에서 자유롭 게 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해 두었다. 애당초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제철을 국영 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봤다. 정치인다운 발상이었 다. 그러나 박태준 회장은 정부 자금이 출자된 민간 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 업인다운 발상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대한중 석을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일찌감치 정부 주 도 기업의 비효율성을 직시했다.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발상이었다. 5.16 혁명의 일원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까 지 지낸 인물이 국가 권력에서 자유로운 철강 기업을 구상했다는 것부터가 남달랐다. 박태 준 회장은 어쩌면 정치인이거나 군인이기 이 전에 기업인이었다. 결국 포항제철은 3년 2개월 만인 1973년 6 월 9일 첫 쇳물을 뽑아냈다. 제1고로에서 쇳물 이 터져 나오자 박태준 회장도 직원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박태준 회장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정말 기뻤지만 마음 한구석 엔 이 쇳물로 과연 제품을 만들어 팔 수 있을 지 걱정했습니다.” 전쟁터의 소대장은 인격이 없다며 누구보다 전선의 맨 앞에 섰지만, 그런 불안을 혼자서만 짊어지고 있었다는 사실부터 가 박태준 회장이 전장에서 가장 인간적인 사 람이란 의미일 수도 있다. 최고경영자는 혼자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박태준 회장은 묵묵 히 그 짐을 졌다.

“박태준 회장은 군인의 기와 기업인의 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후세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 있는 교본입니다”

교육보국
박태준 회장은 제철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외국계 보험회사로부터 거액의 합법적 리베이 트를 받았다. 박태준 회장은 먼저 이 돈을 박 정희 대통령에게 정치 자금으로 건넸지만 박 정희 대통령이 거절했다. 박태준 회장은 이 돈 을 몽땅 포항공대 설립 비용으로 사용했다. 또 포항제철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큰 이득을 본 미쓰비시가 사례로 해운 회사 설립 자금을 대겠다는 제안을 했다. 얼마든지 박태준 회장 개인 명의 회사로 설립하면 될 일이었다. 하 지만 박 회장은 거양해운을 세운 후 그 수익금 이 모두 포항공대 장학금으로 쓰이는 구조로 만들었다. 지금도 포스코는 포스코, 포스텍, 포항산 업과학연구소로 이어지는 산학연 연구 개발 체제를 제대로 구축한 유일한 국내 기업이다. 박태준 회장은 평소에도 돈에 관해선 강박적 일 만큼 무심했다. 박태준 회장에게 제철 사 업은 치부를 위한 게 아니라 국부를 위한 일이 었다. “제철보국”이었다. 기업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 당연히 기업인의 목표도 더 큰돈을 버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박태준 회장은 전혀 다른 기업인이었다. 기업의 목표를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삼 았고, 기업인의 목표 역시 애국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기업해서 번 돈은 나라를 위해 써야 마땅 했다.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묘역을 찾아서 헌화하며 이렇게 말했다. “불초 박태준, 각하 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 전 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주시옵소서.” 언 제나 애국심은 기업인 박태준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때론 애국심이 뜻밖의 돌파구가 돼 줄 때도 있었다. 제철 사업 초기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이 박태준 회장에게 기술 이 전을 약속해준 건 요시히로 회장이 부르는 일본 노래를 미리 연습해오는 열성을 보인 박태준 회 장의 진심이 애국심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1978년 8월 기미쓰 제철소를 방문한 덩샤오핑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물 었다. “중국에도 이런 제철소를 지어줄 수 있겠습니까.” 요시히로 회장은 답했다. “불가능합니 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 때문에 한동안 중국에선 박태준 연구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요시히로 회장과 덩샤오핑이 지칭한 건 박태준이 상징하는 애국적 기업인을 뜻했 다. 1968년 IBRD에 부정적 보고서를 써서 차관 도입이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존 자페 박사 도 1986년 박태준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보고서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실수한 건 박태준의 존재를 몰랐던 겁니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겁니다.”

박태준 정신
박태준 회장은 기업인이 이익이 아니라 더 큰 가치를 추구할 때 기업과 기업인이 얼마나 큰 일을 이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이익을 좇는 기업인은 장사치가 되지만 나라를 위하 는 기업인은 경제의 기둥이 된다. 결국 기업에 게 필요한 건 매출과 영업이익을 보여주는 재 무재표뿐만 아니라 기업의 존재 가치를 증명 하는 기업 활동이란 얘기다. 그리고 그건 최고 경영자만이 제시할 수 있는 비전이다. 기업인 으로서 박태준 회장이 칭송받는 건 그 가치를 제시했고 한 기업의 문화로 뿌리 내리게 만드 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기업은 1 등이나 최고나 세계 제일 같은 경쟁 일변도의 기업 가치를 대체할 새로운 기업가 정신을 찾 고 있다. 박태준 회장은 그걸 제시했던 경영인 이었다. 지금도 포스코는 제철보국을 사훈으로 삼 고 있다. 지금도 포스코란 기업은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을 찾고 있다. 포스코는 매년 기업지배구조연구소에서 뽑는 가장 건 전한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으로 선정된다. 이 것도 역시 기업 공개 과정에서 사욕을 채우지 않고 단 한 주의 포스코 주식도 갖지 않겠다고 했던 박태준 회장의 의지 덕분이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말했다. “박태준 회장은 군 인의 기와 기업인의 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후 세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 있는 교본입니다.” 박태준 회장의 마지막 유지도 역시 포스코에 관한 것이었다. “포스코가 국가산업의 동력이 되어 만족스럽다. 더 크게 성장해서 세계 최강 의 포스코가 되었으면 한다. 포스코 임직원들 이 애국심을 가지고 일할 것을 당부한다.” 박 태준 회장은 포항제철소가 보이는 언덕에 묻 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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