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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종업원에서 부동산 여왕이 되기까지

[HOW I GOT STARTED] From Waitress to Real Estate Queen

바버라 코코란 Barbara Corcoran의 삶은 극적인 성공과 명성 쌓기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Interview by Dinah Eng


바버라 코코란의 인생역정은 영화나 드라마에 딱 맞는 소재다. 호기로운 식당 종업원이 1,000달러를 빌려 뉴욕시 최초의 여성 소유 부동산업체를 설립하고, 주택 시장의 최강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2001년, 그녀의 업체 코코란 그룹 Corcoran Group을 6,600만 달러에 매각한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 정장을 한때 14벌이나 소유했던 코코란은 실제로도 TV에 진출했다. 미국의 TV쇼 ‘투데이’와 재능 있는 사업가를 찾는 리얼리티 쇼 ‘샤크 탱크’ Shark Tank *역주: 사업계획에 대한 투자를 두고 경쟁하는 ABC의 프로그램에 계속 출연했다. 그녀가 쓴 베스트셀러는 사업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책이다. 한때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두려워했던 코코란(64)은 이제 즐겁게 대중 앞에서 말하며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나는 뉴저지 주 에지워터 Edgewater에서 10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매우 가난한 지역에 살았지만 나는 우리 집이 정치가 집안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출근할 때 정장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인쇄소 감독이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나는 천주교 학교에 다녔는데, 전과목 D학점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학점이 평생의 직업과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바보 같은 학생이 꼭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거리에서 배운 것들이 밑거름이 되었다. 1971년 성 토머스 아퀴나스 대학(St. Thomas Aquinas College)을 졸업할 때까지 아르바이트만 20가지를 했다. 핫도그 판매는 물론이고 졸업하던 해에는 고아원 보모도 했다.

대학 졸업 후 뉴저지 주에서 작은 건축업을 운영하던 레이 시모네 Ray Simone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식당에서 종업원 일을 하고 있었다. 레이는 내게 1,000달러를 빌려줬고, 우리는 1973년 코코란-시모네 Corcoran-Simone를 공동 창업했다. 시모네의 나의 지분이 51%였고, 그렇게 나는 맨해튼에서 임대 중개업을 시작했다.

어느 날 유니언 카바이드 Union Carbide의 기술자에게 임대 매물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이 기술자가 부동산을 매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갖고 있는 매물 목록은 없었지만 그와 함께 지역 곳곳을 돌아다녔다. 나는 일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는 결국 한 매물을 사들였다. 정말 예상치 못한 우연이었다. 그가 5만 달러에 부동산을 매입해 중개 수수료 3,000달러를 챙길 수 있었다. 임대 중개 수수료의 10배였다. 매매 사업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 날 중개업자 구인 광고를 냈다.

나는 이런 사업 방식을 계속 유지했다. 1973년 뉴욕 타임스에 3줄짜리 광고를 내는 데 180달러가 들었다. 받아야 할 미수금이 180달러만 넘으면 새로운 중개인을 고용했다. 그의 이름을 광고에 넣어주면 중개인은 좋아했다. 새로운 사람을 고용할 수 있을 때는 필요한 공간의 두 배가 되는 사무실을 임대했다. 더 높은 중개 수수료에 익숙해졌고, 1975년경에는 매매 중개업만 하게 되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중개인이 14명이었고 연 매출은 56만 달러 정도였다. 그때 레이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1978년 회사를 분사하면서 레이는 “당신은 나 없이 성공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뼛속 깊이 사무쳤다. 혼자서도 성공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코코란 그룹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역에 여성이 소유한 부동산 업체가 없었다. 일은 여성이 했지만 업체는 남성이 소유했다. 다른 사람보다 돋보이기 위해 짧은 스커트를 입고 밝은 옷을 착용했다. 환영 받진 못했지만 이목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첫 해 7명의 중개인을 고용했고 35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사업을 꾸려나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절대 12월에 열지 않았다. 대신 2월에 했는데, 이 시기엔 아주 멋진 장소를 저렴하게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마사지사를 고용해 직원들이 책상에서 15분 동안 마사지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부동산 매매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이다. 직원들에게 어떤 혜택을 제공하든지 그들에게 애정을 표현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애정을 쏟으면, 그들도 내게 애정을 보인다. 서로 경쟁자임을 잊게 했기 때문에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잘 지낼 수 있었다. 이러한 기업문화 때문에 우리 회사는 확실히 차별화가 되었다.

현금 유동성 관리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여유자금이 생기면 사업에 재투자해 재빨리 돈을 써버리곤 했다.

회사 매출을 정확히 파악한 적은 없었다. 레이와 갈라선 후 처음으로 고용한 중개사가 에스터 캐플런 Esther Kaplan인데, 그녀에게 모든 매출 관리를 맡겼다. 나중에 에스터는 코코란 그룹 지분 10%를 소유한 파트너가 됐다. 그녀는 회사 유지 경비를 잘 파악하고, 은행 신용 한도를 늘리는 데 능했다. 현금 유동성을 잘 관리했다. 예컨대 회사가 8월에 8만 달러의 여유 자금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도 내게 얘기해주지 않았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분명히 써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1993년 경쟁사보다 2년 앞서 온라인 부동산 매매를 시작했다. 상표권을 소유하고 있던 경쟁사의 인터넷 주소도 모두 내 이름으로 등록했다. 그래서 경쟁사가 인터넷 주소를 사용하려면 내게 와서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 돈을 내라고 하진 않았다. 단지 내게 전화를 걸어 인터넷 주소를 요청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온라인 부동산 매매 시장에서 경쟁이 시작되는 시점을 알 수 있었다. 창의적인 소규모 업체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고, 대규모 업체는 맨 마지막에 연락이 왔다.

나는 부모님의 부동산 업체를 운영하던 빌 히긴스 Bill Higgins와 1988년 결혼했다. 8년간 체외 수정을 시도한 끝에 46세에 아들 토미를 낳았다. 나의 가장 큰 도전이던 출산에서 꿈을 이룬 셈이었다. 출산은 나를 회사 매각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때-다중 매물등록 서비스(multiple listing services)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매물 목록을 매주 점검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1년 어느 날, 우리 회사가 업계에서 가장 많은 등록 매물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욕 최고의 부동산 중개인이 되겠다는 꿈을 이룬 것이었다. 난 직원들에게도, 아들 토미에게도 150%의 노력을 쏟고 싶었다.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회사를 매각했다. 당시 영업직원이 850명, 매출은 9,700만 달러 정도였다.

당시 뉴욕의 큰손 중 하나가 NRT였다(현재 주택 중개업 강자 리얼로지 Realogy 소속이다). 그래서 NRT 이사직을 맡고 있던 변호사를 고용했고, 그에게 회사 매각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당연히 그는 회사에 보고했다. 처음에 그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 제시한 금액은 2,000만 달러였다. 나는 “6,600만 달러에 판다고 얘기하라”고 전하곤 전화를 끊었다. 66은 내게 행운의 숫자였다. 9·11 테러가 발생하기 전 금요일에 계약서에 서명했고, 그로부터 2주 후에 계약을 완료했다. NRT 회장 헨리 실버만 Henry Silverman에게 “앞으로 크게 성장할 업계 최고의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라며 설득했다.

내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책-‘큰 가슴이 없다면 머리에 리본을 달아라(If You Don’t Have Big Breasts, Put Ribbons on Your Pigtails)’-을 집필하기로 결심했다. 1년 후,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관심 받기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코란 그룹 대표로 TV 인터뷰를 많이 한 경험을 살려 폭스 TV의 정치평론가로 일하게 됐다. 하지만 잘 맞지 않아 다시 굿모닝 아메리카 Good Morning America의 부동산 시장 평론가로 일했다. 2007년에는 투데이 쇼로 옮겼다. 아마 죽을 때까지 방송을 할 것 같다.

2009년 마크 버넷 프로덕션 Mark Burnett Production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내게 샤크 탱크의 샤크 Shark *역주: 투자자 역할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읽어보지도 않고 옵션 계약서에 서명했다. 나는 마크 버넷에게 이메일을 보내 테스트를 위해 비행기 표를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그렇게 했고, 나는 그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나중에 그는 내게 “이메일을 보내 출연에 관심을 보인 것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했다.

훌륭한 사업가의 자질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다 보니 오늘날 미국에서 창업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2012년 코코란 창업 보고서(Corcoran Entrepreneur Report)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창업한 사람 가운데 67%가 이민자다. 창업자 중 38%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영대학원 학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풍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결과였다.

나는 사업 계획의 가치가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난 재무보고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머릿속에 원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그리는 게 더 낫다. 사업의 반은 계획대로 하지만, 반은 임기응변으로 하는 것이다. 항상 변화가 발생한다. 때문에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세우고, 꿈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 동기부여를 해야 한다.

“나는 사업 계획의 가치가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난 재무보고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머릿속에 원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그리는 게 더 낫다.”


나의 조언
바브라 코코란
코코란 그룹 창업자

기회를 잡을 용기를 갖춰라.
처음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를 만났을 때, 나는 뉴욕 10대 최고 아파트 조사(The Top 10 Condominium Survey in New York)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자신의 건물 순위가 최하위에 그치자 도널드는 불만을 터트렸다. 나는 곧바로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당시 주된 매물 평가 방법이었던 판매가 대신 평방피트당 가격으로 순위를 매겼다. 그러자 도널드의 건물들이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갔다. 그는 나의 적극적인 지원자가 되었다.

거절당한다고 멈추지 마라.
우리 회사의 등록 매물을 비디오테이프에 담는 데 7만 1,000달러를 썼다. 우리 영업사원들은 매입자가 테이프를 다른 중개인에게 가져갈 것을 걱정해 비디오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매매기회를 놓치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비디오를 코코란닷컴 Corcoran.com에 공개했고, 일주일 내로 첫 온라인 매매를 시작했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돌파구를 찾은 것이었다.

긍정적인 회사 분위기를 유지하라.
계속 불평만 하는 직원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그를 해고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오든지 개의치 않았다.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생각과 미래에 대한 믿음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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