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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에서 물러난 데이비드 게펜

DAVID GEFFEN UNPLUGGED<br>할리우드의 거물 게펜이 포춘과의 독점 인터뷰에서 음악, 돈, 예술, 명성, 자선, 광고, 그리고 여러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By DAVID A. KAPLAN


데이비드 게펜은 스티브 잡스를 제외하곤 지난 30년 동안 가장 많은 다재다능함을 보여준 미국 기업가로 꼽힌다. 사실 잡스도 때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곤 했다. 예술과 자본을 결합하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재능을 지닌 게펜은 에이전트, 매니저, 거물 음반 기획자, 영화 및 브로드웨이 공연 제작자, 그리고 영화사 공동 설립자 같은 다양한 타이틀을 갖고 있다. 많은 이들이 각기 다른 시기에 그를 (한 세대 동안)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기도 했다. 그는 의료, 예술, 에이즈 연구를 지원하는 자선사업가일 뿐만 아니라 고위 민주당 의원들의 절친한 친구다.

그는 30세가 되기 전에 백만장자가 됐고, 50세에는 억만장자가 됐다. 그는 총 6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모았는데,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독보적인 전후(post-war) 미국 미술품 컬렉션이다. 그는 UCLA 의과 대학에 3억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그의 친구들은 실리콘밸리(래리 엘리슨 Larry Ellison, 래리 페이지 Larry Page)부터 엔터테인먼트(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배리 딜러 Barry Diller), 저널리즘(모린 도드 Maureen Dowd), 패션(캘빈 클라인 Calvin Klein), 그리고 처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음반 사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회사에 소속됐던 가수들은 존 레넌 John Lennon, 밥 딜런 Bob Dylan, 엘튼 존 Elton John, 도나 서머 Donna Summer, 이글스 the Eagles, 조니 미첼 Joni Mitchell, 건스 앤 로지스 Guns N’ Roses, 그리고 너바나 Nirvana까지 무척 화려하다.

게펜은 브루클린의 서민층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을 중퇴하고, 연예기획사 사업 - 전문 지식뿐만 아니라 눈속임과 인간관계가 중요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틈새시장이다-을 알게 되기까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게펜은 위의 두 능력과 인재를 보는 눈을 결합해 잭슨 브라운을 가수로, 톰 크루즈를 영화배우로 데뷔시켰다. 그는 1971년 어사일럼 레코드 Asylum Records(워너 커뮤니케이션스 Warner Communications에 매각), 1980년 게펜 레코드 Geffen Records(5억5,000만 달러를 받고 MCA에 매각), 그리고 1994년 드림웍스 SKG Dream Works SKG(‘G’는 게펜의 이니셜이다)를 설립했다.

현재 은퇴한 게펜(70)은 거의 인터뷰를 하지 않지만 포춘의 데이비드 A. 카플란 David A Kaplan의 인터뷰 시리즈에서 기업가로서의 자신의 삶 - 스스로 놀라운 여정이라고 표현한다 - 을 회고했다. 맨해튼 센트럴파크 Manhattan Central park가 내려다 보이는 근사한 그의 아파트에서 게펜은 우연과 명성, 적과 동지, 애플, 힐러리, 요트, 그리고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유명 노래가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은 편집·발췌된 인터뷰 내용이다.


Q 당신은 50년 전에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게펜: 19세 때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첫 직장을 구했다. 할리우드 CBS 방송국에서 경비를 하다 우연히 주디 갈란드 쇼 Judy Garland Show 녹화 현장을 봤다. 그리고 “우와! 쇼 비즈니스, 멋진데!”라고 생각했다.

쇼 비즈니스에 진출하길 원했나?
나는 브루클린 출신 촌뜨기였다. 하지만 쇼 비즈니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어린 시절 할리우드의 제왕 루이스 B. 메이어 Louis B. Mayer의 전기 같은 관련 책들을 탐독했다.

LA에서 뉴욕으로 돌아갔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당일 LA로 갔다. 단지 브루클린과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던 날 CBS에서 해고당했다. 누가 그분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해 싸움이 붙었다. 나는 당시 무일푼 빈털터리였다.

어떻게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 William Morris Agency 우편물실에서 일하게 됐나?
리슐리외 프로덕션 Richelieu Productions에서 접수 담당자로 일하고 있을 때 캐스팅 책임자 한 분이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에 좀 더 깊이 발을 들여볼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그녀는 “재능이 좀 있나?”라고 물었고, 나는 “전혀 없다”고 답했다. 그녀는 “그럼 에이전트가 돼야겠네”라고 말했다. 나는 “그럼 어떤 지식이 있어야 하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 지식도 필요 없다!”고 답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에슐리-페이머스 에이전시 Ashley-Famous Agency에서 면접을 봤다. 난 정직하게 지원서를 냈다. 그리자 알 에슐리 Al Ashley는 내게 “거짓말이라도 했어야지! 이런 이력서를 보고 누가 자네를 고용하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채용하지 않았다. 무작정 전화번호부 ‘연예 기획사(theatrical agency)’ 난을 펼쳐봤다. 윌리엄 모리스의 광고가 가장 크게 실려 있었다. 나는 UCLA를 졸업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바로 채용되었다.

그 후론 어떤 일이 일어났나?
입사 첫날 내게 회사를 소개시켜줬던 직원이 해고됐다. 지원서류에 거짓 정보를 기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속으로 ‘큰일났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UCLA에서 보낸 편지를 가로 채기까지 6개월 동안 새벽같이 회사에 나갔다. 졸업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가짜 UCLA 졸업 증명서로 바꿔치기했다.

윤리강좌 같은 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는 자기개발 측면에선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력서에 거짓 정보를 기입하라고 조언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없나?
내가 했던 일이 모범사례는 아니다.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조언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연예기획사 에이전트가 되는 데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다는 건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거짓말을 해 일자리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냐고? 전혀 그렇지 않았다.


▶ 운과 야망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20세 때는 야망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윌리엄스 모리스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들이 전화로 내게 헛소리를 한다면, 나도 똑같이 전화를 걸어 헛소리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에이전트가 되기 위해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얼마 만에 그런 깨달음을 얻었나?
(웃음)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에이전트로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나?
4년 만에 나를 단칼에 거절했던 애슐리-페이머스로부터 거액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테드 애슐리 Ted Ashley에게 주당 1,000달러를 주고, 그의 바로 옆에 내 사무실을 마련해 준다면 이직하겠다고 말했다.

현명한 행동이었나?
곧바로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24세의 나이에 주급 1,000달러를 받는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전에는 얼마를 벌고 있었나?
400달러다. 나는 에이전트가 아니라 매니저가 되면 궁극적으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스타 연예인’밖에 없었다. 나는 로라 니로 Laura Nyro라는 가수와 계약을 했다. 그녀가 스타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나는 그녀의 매니저였지만, 우리 둘은 그녀의 음반 기획사에선 파트너였다. 그게 1968년 일이다. 2년도 되지 않아 그 회사를 (CBS 설립자) 빌 페일리 Bill Paley에게 400만 달러에 매각했다. 그렇게 나는 29세의 나이에 백만장자가 됐다.

요즘도 이런 인생역전에 대해 회고해보곤 하나?
하지 않는다. 살면서 아무것도 미리 계획한 것은 없었다. 그저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바보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뮤지션과 재계 거물 중 누구와 더 어울리기를 좋아하나?
둘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어울린다. 모두 흥미롭다. (골드만 삭스 CEO) 로이드 블랭크페인 Lloyd Blankfein이나 조니 미첼과 어울리는 것이 즐겁다. 중동에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부다비의) 셰이크 압둘라 Sheikh Abdullah는 그들이 만난 미국인 중 내가 유일하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1973년 미첼이 발표한 곡 ‘파리의 자유로운 남자(A Freeman in Paris)’는 쇼 비즈니스의 어려움에 대한 노래며, 그 주인공이 바로 당신이다. 음악을 통해 영원히 기억될 텐데 기분이 어떤가?
미첼이 녹음을 못하게 하려 했었다. 내용이 너무 적나라해 부끄러울 정도다.

‘나는 몽상가들, 휴대폰에 대고 소리지르는 이들과 함께 일한다’라는 가사를 듣고 당신의 이야기인 줄 알았나?
바로 내 얘기라는 걸 알아챘다. 그녀가 나에 관한 곡을 써준 점은 자랑스럽다. 정말 멋진 노래다. 내용도 정확하다. 조니는 통찰력이 매우 뛰어난 여자다.

몇 년 전 카릴 시몬 Carly Simon의 노래 ‘그대는 공허해(You‘re So Vain)’가 당신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 이야기를 듣고) 그냥 웃었다. 그 노래는 나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노래다. 워런 비티 Warren Beatty나 믹 재거 Mick Jagger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노래의) 주인공으로 짐작된다.


▶ 실리콘밸리와 부


당신의 기업가 정신을 봤을 때 실리콘밸리에 대한 애착을 가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나는 실리콘밸리에선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똑똑하지 못하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그곳을 방문한 적은 있나?
나는 기업공개에 관심을 갖는 부류가 아니다. 소비자로서 나의 관심사는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제품(상품)을 만드는 위대한 인물들이다.

실리콘밸리의 인물들도 당신을 찾아오나?
세르게이 브린 Sergey Brin, 래리 페이지, 래리 앨리슨, 스티브 잡스, 폴 앨런 Paul Allen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나 또한 그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하지만 그들이 천재성을 발휘하던 분야에서 그랬던 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도움을 준 분야는) 예술이다. 잡스의 경우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림에 관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의 관심에 불을 붙였나?
글쎄, 지금까진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래리는 사지도 않을 보트에 관해 내게 조언을 구했다(웃음).

당신의 조언은 무엇이었나?
보트를 사라는 것이었다.

미국 최고 부자 순위가 발표될 때마다 확인하는 편인가?
그렇다. 이 나이에 그런 것을 신경 쓰냐고? 아니다. 자신의 이름이 순위에 오른 걸 처음 봤을 땐 미소가 번질 것이다. 처음에는 다들 우쭐해 하지만, 마지막에는 거슬려 한다.

당신은 스티브 잡스와 가까웠다. 그는 부자 순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스티브는 돈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족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점을 내게 수차례 말했다. 그는 또 재산을 과시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내 보트를 갖고 나를 놀리곤 했다.

잡스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나?
픽사 Pixar를 인수했을 때나 토이 스토리 Toy Story 제작을 결정할 때 잡스는 내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곤 했다.

당신은 잡스와 다툰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우리 관계는 거의 언제나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 ‘이건 어떤가?’ 하고 물으면, 나는 그에 대해 답하는 식이었다. 나는 잡스와 같은 비즈니스에 종사하지 않았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단순히 잡스를 매우 존경했고, 그가 내게 조언을 구할 때마다 으쓱해지는 것을 느꼈다.

애플은 잡스 없이도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보나?
스티브는 놀라운 인물이었다. 그는 발명가도 아니었고, 마케터도 아니었다. 단지 (디자인 및 기능 개발에) 천부적 능력을 가진 에디터였다. 당연히 많은 이들이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있을 때나, 그가 없는 지금이나 애플을 믿는다.

엘리슨과 잡스가 부의 가치를 나타내는 스펙트럼의 양극이라면, 당신은 어디쯤에 위치해 있나?
나는 잡스와 다르다. 그는 돈에 전혀 신경 쓰지 않지만, 나는 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러면 내 인생이 바뀔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다.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의 ‘기부 선언(Giving Pledge)’에 동참했나?
아니다. 나는 기부선언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목을 끌기 위한 행동이다. 무슨 일을 하겠다고 말한 것만으론 아무런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복수의 기부 선언 동참자들이 내게 “사실, 꼭 얼마를 기부해야 한다고 요구받지도 않아. 그럼에도 이미지는 좋게 할 수 있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참 압력을 받고 있나?
게이츠가 압력을 준다. 최근 그의 집에 초대받아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신에겐 자선사업에 대한 독특한 철학이 있다. UCLA 의대에 기부하는 대가로 학교 명에 당신의 이름을 집어 넣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익명으로 기부하는 건 어떤가?
익명으로 기부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위 친구나 지역사회에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나는 젊은 동성애자 *역주: 데이비드 게펜은 동성애자다 친구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익명이라는 것 자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열정을 억제하라 Curb Your Enthusiasm *역주: 대본 없이 진행되는 코미디 쇼’의 에피소드를 기억하나? 결국 모두다 ‘익명의 인물’이 누군지 알게 된다.


▶ 투자와 예술


당신은 타고난 기획자(builder)란 생각이 든다.

나는 기업가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오랫동안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회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실패가 두렵지 않았나?
솔직히 말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워너 브라더스 Warner Brothers에서 부회장직을 잠깐 맡았었다.
아홉 달 만에 해고됐다. 살면서 실패를 경험한 적은 있지만, 그 날은 정말 끔찍했다. 음반 회사, 브로드웨이 기획사, 드림웍스 등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면, 사실 내 재산은 대부분 내가 설립한 회사를 매각하면서 번 것이다.

투자 비결은 무엇인가?
믿기 힘들 정도로 현명한 결정을 한 중요한 순간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억 달러를 들여 최고의 2차 대전 이후 미술품들을 구입했다. 1993년에는 (헤지펀드 매니저) 에디 램퍼트 Eddie Lampert에게 2억 달러를 주고 그의 펀드 60%를 받았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오랫동안 30%에 달하는 복리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시장에서 당신이 소유한 순자산 규모는 얼마나 되나?
보유한 애플 주식만 10억 달러에 달한다. 또 주식시장에서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보유한 미술품의 가치도 상당하다.

클라이너 퍼킨스 Kleiner Perkins *역주: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벤처투자회사가 “유한 책임 파트너(limited partner)로 100만 달러를 투자할 생각이 없나”라고 제안한다면 관심을 보일 것인가?
아니다. 내가 원할 때 내 돈을 회수할 수 있는 게 좋다.

보유 중인 예술 작품 컬렉션의 현재 가치는 얼마나 되나?
수십억 달러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예술품 컬렉션의 가치가) 판테온 Patheon 과 맞먹을 듯 싶다. 그렇지 않나?
세상에서 가장 비싼 미술품 중 최소 3~4개는 팔아버렸다. 재스퍼 존스 Jasper Johns, 데 쿠닝 de Kooning,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의 작품이었다.

어떻게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나?
윌리엄 모리스 우편물 실에서 일하던 시절 도시락을 싸 들고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을 다녔다. 당시 친구들과 갔는데, 박물관을 돌면서 “저 그림이 5,000달러라는 게 믿겨져?”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부터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예술을 투자 수단으로 생각했던 건 아닌가?
아니다. 벽에 걸고 싶은 그림들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자가 되고 나서야 미술품을 사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7년 일부 소장품을 팔았는데.
당시 위기가 임박했고, 그에 따라 1990년대 초 저축대부조합(S&L) 위기 때처럼 엄청난 기회가 생길 것이라 믿었다. 나는 S&L 위기가 발생하기 직전(1990년)에 게펜 레코드를 매각했다. 2년도 채 되지 않아 (RJR과 워너를 비롯한 기타 기업의)채권을 사들이며 자산을 두 배로 불릴 수 있었다. 2007년 금융위기 때도 똑같은 종류의 기회를 얻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매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그림을 판 것을 후회한다.

금융 위기에도 예술품 가격은 붕괴하지 않았다.
사실 가격이 더 올랐다. 금보다 낫다. 금은 벽에 걸 수 없지 않나.


▶ LA, 뉴욕, 그리고 은퇴


당신은 할리우드, 월가, 실리콘밸리라는 3개의 다른 문화와 모두 관계가 있다. 이 중 특별히 더 선호하는 곳이 있나?

셋 다 다른 방식으로 흥미롭다. 얼마 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가장무도회에 갔다. 아카데미 시상식도 안나 윈투어 Anna Wintour의 무도회 의상보다 화려하지는 못했다.

누구로 분장하고 갔나?
나 자신이다. 데이비드 게펜. 나는 온라인으로 제이크루 옷을 샀다. 나는 아주 캐주얼한 사람이다.

시간 분배는 어떻게 하나?
3분의 1은 뉴욕, 3분의 1은 LA, 또 3분의 1은 보트-엘리슨으로부터 라이징 선 Rising Sun이라는 약 138미터 길이의 초대형 요트를 샀다-에서 보낸다.

어떻게 브루클린 출신 소년이 요트에 관심을 갖게 됐나?
1974년 샘 스피겔 Sam Spiegel의 보트 말라네 Malahne로 초대받았다. 보트 크기는 180피트(약 55미터)로 당시 기준으론 대형이었다. 그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촬영기간 동안 이 보트를 샀다. 내가 도착했을 때 (모나코의 왕비) 그레이스 켈리 Grace Kelly, (출판업자) 조지 웨이던펠드 George Weidenfeld,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로미 슈나이더 Romy Schneider, 잭 니컬슨 Jack Nicholson 등이 함께 있었다. 이탈리아 몬테카를로 Monte Carlo부터 포르토피노 Portofino까지 이어진 선상 파티는 황홀함 그 자체였다.

오랫동안 해왔던 일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
5년 전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에서 손을 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만들던 영화와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 일을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음악과 영화를 덜 좋아하게 된 이유는 요즘 ‘작품’이 맘에 들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당신이 변한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최근 본 아이언맨 3는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만큼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음악도 그런가?
엘라 피츠제럴드의 ‘송 북 Song Book’시리즈 *역주: 미국 대중음악 작곡가들의 곡들을 모아 녹음한 음반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로저스 앤드 하트 Rodgers and Hart, 콜 포터 Cole Porter, 듀크 엘링턴 Duke Ellington, 해럴드 알런 Harold Arlen 같은 내 세대 음악부터 90년대 초반 투팍 Tupac이 나오기 전까지의 음악을 듣는다.

여전히 도움을 청하는 전화가 걸려 오나?
나는 친구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기꺼이 도와준다. 머리를 쓰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의무적인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내 스케줄은 여전히 빡빡하다. 투자 포트폴리오를 관리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도와야 한다.

더 일찍 은퇴했으면 좋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럴 수 없었다. 드림웍스에 대한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스티븐 스필버그와 스테이시 스나이더 Stacey Snider가 드림웍스의 배급사를 디즈니로 옮기기로 결정한 날, 나는 은퇴했다. 그래도 드림웍스가 제대로 운영되기를 원했다. 밥 아이거 Bob Iger는 최고의 경영자고, 디즈니는 정말 훌륭한 기업이다.

드림웍스의 공동 설립자라는 점이 자랑스럽나?
순전히 친구 제프리를 돕기 위해 동참했다. 몇 년씩 지속되는 책임이 뒤따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공동 설립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다. 하지만 드림웍스의 주식과 채권으로 각각 10억 달러씩을 벌었다. 폴 앨런과 JP모건의 지미 리 Jimmy Lee를 비롯한 다른 투자자들에게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라 약속했는데, 실제로 그랬다.

지난 몇 년간 불화를 겪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난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하고, 실제로도 좋은 친구다. 그런데 나를 아주 무서운 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 말의 진짜 의미는 누군가 나를 건드리면, 나는 무섭게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면을 갖게 됐나?
누구나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체구가 작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누군가 나를 괴롭히려 했을 때, 결코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점심 값을 숨기곤 했다.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이 내 돈을 뺏고, 나를 때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형이 내게 말했다. “결국 맞을 거라면, 맞서 싸우는 편이 낫다.” 일찍이 내가 깨달은 점은 ‘싸움을 하고 싶진 않지만, 결국 싸웠을 땐 상대방에게도 그만한 손해가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지지활동을 했고, 클린턴 부부를 비판했다. 그때와 바뀐 생각이 있나?
오바마 대통령이 2004년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대선 출마를 접는다면 당신을 지지하겠다.” 그는 그저 웃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오바마 대통령이 내게 전화를 걸어 “그때를 기억하나? 이제는 나를 도와줄 수 있나?”라고 물었다.

힐러리가 2016년 대선에 출마한다면 지지할 생각이 있나?
물론이다.

묘비에 새기고 싶은 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나?
묘비를 세울 생각이 없다. 내 시신은 화장하도록 할 것이다. ‘유산(legacy)’이란 개념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

후세대가 기억할 만한 유산을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빌 페일리는 20세기 전반기 최고의 기업가였다. 하지만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는 빌 페일리가 아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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