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즉 가상현실은 실제 세계나 가상 세계의 물리적 존재를 재현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환경을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는 몰입성이 높고, 강한 시각적 자극을 수반하는 가상 3차원(3D) 환경을 말한다. 마이클 R. 하임은 저서 ‘가상현실을 위한 형이상학’에서 가상현실에 7가지 개념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재현성, 상호작용성, 인공성, 몰입성, 원격 현장감, 전신 몰입성, 네트워크 통신이 그것이다.
가상현실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19세기 프랑스의 작가이자 배우, 영화감독인 앙토냉 아르토로 그가 1938년 집필한 ‘잔혹연극론’이라는 책에서 극장을 ‘la realite virtuelle(가상현실의 공간)’으로 정의했다. 연극은 어떤 의미에선 현실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현실이 아니며, 관객들을 강하게 매료시키고 몰입시킨다는 이유에서다. 훗날 전자공학자들이 이 개념을 차용해 1980년대부터 컴퓨터가 열어주는 새로운 현실을 가상현실이라 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욘드 증강현실
최근까지 이런 가상현실에서 재현하는 자극들은 스크린과 스피커, 헤드폰을 통해 전달되는 시각적·청각적 자극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이제는 햅틱 기술을 채용해 촉각적 자극도 제공할 수 있도록 발전했다. 덕분에 VR 시스템은 게임을 비롯해 의료, 설계, 엔지니어링, 군사훈련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장소를 경험하는 텔레프레전스(telepresence), 혹은 원격 현실감 기기(remote presence device, RPD)로서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일례로 원격회의 시스템에 가상현실을 접목할 경우 상대방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과 같은 실감나는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현재 실용화된 VR 기기의 가장 좋은 예는 항공기 조종사 교육을 위한 비행 시뮬레이터다. 그러나 아직은 실제 환경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가상현실 세계를 재현하기에는 상당한 기술적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컴퓨터의 연산 능력이나 이미지 해상도, 통신 주파수 대역 등이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물론 이 한계는 기술발전에 의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현실과 지극히 유사한, 아니 어쩌면 현실을 능가하는 가상현실 세계의 구현은 가능과 불가능이 아닌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얘기다. 이르면 올해 말 출시될 오큘러스의 고글형 VR 시스템 ‘리프트(Rift)’는 그 날을 앞당겨줄 기기라 할 수 있다. 이미 5만여대의 개발자 버전 제품이 판매돼 응용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는 만큼 게이밍의 새로운 장을 열어줄 것이 확실하다.
이 제품은 센서들이 착용자 머리의 상하좌우, 수평·수직 움직임을 매 밀리초(㎳)마다 측정하는 한편 PC에서 전송받은 영상을 2㎳마다 갱신해 머리 움직임에 최적화함으로써 360도 전방향의 가상현실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지난 3월 페이스북이 20억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오큘러스 VR을 인수한 것은 이 회사를 넘어 VR 시스템이 갖는 잠재력의 크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콘솔 게임계의 최강자 중 하나인 소니도 ‘프로젝트 모피어스’를 대항마로 내세워 진검승부를 예고하는 등 가상현실은 올해 게임업계의 최고 화두가 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수년 내 가상현실 게임이 확고한 입지를 굳힐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곧바로 게임 산업이라는 틀을 박차고 나와 다른 영영에서도 혁신을 이끌 것이라는 분석이다. 앱 개발자들이 벌써부터 리프트를 활용해 의료, 건축, 교육용 응용프로그램을 개발 중에 있음을 감안하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가상현실 훈련소와 지휘소
소비자용 가상현실 기기의 대공습을 이야기하면서 가상현실 기술의 가치가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포스트가상현실이라 할 수 있는 증강현실 기술이 그러했듯 혹여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재연되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이는 리프트의 시연회장에 항상 긴 줄이 늘어서며 전문가와 관람객들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으로도 기우라는 게 분명해진다. 과거 증강현실 기기에 대한 관심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큘러스 VR의 설립자인 파머 럭키는 이를 두고 ‘3D 프린팅 등의 혁신적 기술과 달리 가상현실은 그 기술이 어떻게 세상을 바꿔놓을지 명확히 보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가상현실의 미래는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예정된 현실에 가깝다는 얘기다.
가상현실의 미래를 엿보고 싶다면 미군의 자금지원으로 운영되는 연구소를 찾아가보면 된다. 파머 럭키가 오큘러스 VR을 설립하기 전 엔지니어로 근무했던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창의기술연구소 산하 합성현실연구실도 그중 하나다.
당시 럭키의 상관이었던 마크 볼라스는 1980년대부터 가상현실을 연구한 인물로 지난 2005년 이후 동료인 이안 맥도웰과 함께 시야각 150도의 ‘와이드5 HMD’ 헤드셋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의 연구실에 마련된 12×24m 크기의 방에서는 와이드5 HMD를 착용한 채 정밀하게 묘사된 가상현실 환경을 체험할 수 있다. 방안에 설치된 80대의 위상공간(phase space) 카메라가 헤드셋 LED의 발광신호를 읽어 착용자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메커니즘이다.
볼라스는 이곳에서 미묘한 변화맹 기술을 사용해 피험자가 끝없는 가상현실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피험자가 방금 전에 통과한 문의 위치를 다른 곳으로 바꾸는 것이 변화맹 기술의 좋은 예다. ‘리디렉티드 워킹(redirected walking)’이라고도 불리는 이 기술을 이용하면 한정된 공간 내에서 무한한 공간을 가상현실로 표현할 수 있다.
미 해군연구소(ONR)에서도 ‘블루샤크(BlueShark)’라는 가상현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가상현실 공간에서 해군구축함을 설계하고, 해군 전단의 여러 자산을 지휘하며, 정찰용 무인기에 탑승해 있는 시점으로 적진을 정찰하는 등의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오늘날의 해군은 레이더 화면이나 무선 통신, 위성 데이터로 주변 상황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정보를 함장 등 지휘부로 전달한다. 하지만 가상현실로 주변 상황을 인지하고, 손짓만으로 전투 자산들을 제어하는 시스템이 실용화되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속한 대처와 효율적인 자산 운용을 꾀할 수 있다.
볼라스에 의하면 블루샤크 프로젝트의 기본 목표는 지휘관이 순식간에 함내와 해안, 해상, 공중을 오가며 여러 해군 자산들이 획득한 정보를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전투 지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스템이 실용화된다면 함장들은 헤드셋과 모션 캡처 장갑을 끼고 함대를 지휘할 수 있다. 거대하고 복잡한 홀로그램을 활용, 멀리 떨어져 있는 함대를 지휘·통제하는 영화 ‘엔더스 게임’의 스토리가 현실화되는 셈이다.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
파머 럭키는 가상현실을 통해 이루고픈 궁극적 꿈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아마도 그 잠재력을 부풀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단지 그는 교육 분야가 게임과 군사 분야 다음으로 VR 시스템이 본격화될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사람은 뭔가를 체험하고, 바라보면서 지식을 쌓는다. 어떤 국가를 막론하고 학교들이 실습, 현장답사 등 체험학습을 기본적인 교육 커리큘럼에 넣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VR 시스템은 학생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줄 사실상 유일한 교육도구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세계사 시간에 사진이나 영상을 보여주는 대신 가상현실 속 로마제국으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그 교육적 효과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교육과 가상현실이 만나면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수준의 비용 대비 교육효과를 누리게 된다.
가상현실은 또 건축, 디자인, 엔지니어링, 의료, 엔터테인먼트 등의 분야에도 지대한 파급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가상현실은 현실 모방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앞서나가도 되는 만큼 중력을 무시한다거나 적외선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으며,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공간에 들어가 보는 것도 가능하다. 의대생들의 경우 가상현실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심장 구조를 손쉽게 이해할 수 있고, 영화에 접목되면 3D 안경을 끼고 ‘아바타’를 처음 봤을 때의 몇 배나 되는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손에 잡히는 꿈
물론 가상현실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지난 1989년 가상현실이라는 말을 대중화시킨 컴퓨터공학자 재런 러니어만 해도 10년만 있으면 누구나 풍성하고 몰입성 강한 가상현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으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오큘러스 VR의 리프트는 분명 대단한 기기다. 우주 전투기의 조종실에서부터 그랜드 캐니언의 낭떠러지까지 어디든 데려갈 수 있다. 반면 햅틱 기반 피드백 기술이 개발 중이기는 해도 아직은 착용자가 느낄 수 있는 가상현실이 시각적 자극에 국한된다. 손과 발의 움직임에 대응하지도 못한다.
파머 럭키의 눈에 비친 오늘날의 가상현실 기술은 아직 완숙되지 않았다. 진정한 가상현실을 체험하려면 눈과 귀, 손과 발 등에 하드웨어를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현 시대를 주‘ 변장치 시대’라고 정의한다.
그가 바라보는 궁극의 가상현실 기술은 인간의 신경계와 시스템을 곧바로 연결해 주변장치 없이도 가상현실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가상현실 속에서 보내게 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실생활에서 불가능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가상세계는 현실보다 매력적이고 살기 좋은 세계가 될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세상을 만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무수한 사람들에게 의미 있고, 부유하고, 행복한 세상을 열어줄 수 있다. 이것이 디스토피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건 인류는 가상현실이라는 신대륙으로의 이주를 위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그 이주가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
햅틱 (Haptic) 진동이나 힘, 충격 등의 자극을 통해 촉각과 운동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
변화맹 (變化盲, change blindness) 사람이 주변 환경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 하는 현상. 어떤 요인에 의해 뇌가 시각정보를 무시함으로써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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