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것처럼, 은퇴 자금 마련에 대한 생각도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포춘코리아가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이어져 온 은퇴 준비 관련 사고의 진화와 재무적 트렌드의 변화 등을 정리해 보았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은퇴상품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부터다. 그전에는 개인이 먼저 은퇴 준비 고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60세 이상 정년이 어렵지 않았고, 그때까지 모아놓은 예·적금과 퇴직금, 꾸준히 상승하기만 하던 부동산 자산이 비교적 안정된 노후를 보장해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가정의 기형적인 재무 구조 문제가 부각되면서 은퇴 후 재정 문제도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했다. 처음은 몇몇 자산관리전문가들의 조언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일반 가정도 금융기관처럼 스트레스 테스트를 진행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특정 자산 가치의 폭락이나 가장의 노동력 상실이 가계 경제에 얼마나 큰 충격을 줄 수 있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사회적 배경을 등에 업고 보험사가 은퇴시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당시 보험사들은 주로 보장성 기능들로 구성해 은퇴상품을 판매했다. 지금은 보장성 상품과 은퇴상품을 아예 구별해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당시만 해도 뜻 밖의 큰 자금 지출이나 갑작스러운 수익원 증발만 없으면 평소의 알뜰한 살림만으로도 충분한 노후 준비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비교적 높은 금리와 부동산 자산에 대한 높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험사 은퇴상품이 현재와 같은 종신형, 상속형, 확정형 등의 형태를 띠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선 주식 붐과 베이비부머의 은퇴 이슈를 타고 증권사도 은퇴시장에 뛰어들었다. 증권사들의 은퇴상품은 당시 CMA 통장과 함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이전 보험사들의 은퇴상품이 보장성 상품에 가까웠다면 이때 증권사들의 은퇴상품은 사실상 투자상품에 가까웠다.
2000년대 코스피 대세 상승과 함께 증권사 은퇴상품이 큰 히트를 쳤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증시가 폭락하면서 이들 상품의 인기도 급속히 식어버렸다. 고위험 상품군의 경우 큰 원금 손실까지 나면서 몇몇 증권사 상품들이 은퇴 관련 기피 상품 1호로 꼽히기까지 했다. 이때부터 ‘은퇴자금은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되는 돈’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이는 현재 원금보장형 은퇴상품이 대세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이 되었다.
2009년 시행된 자본시장통합법은 은퇴상품 시장에도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금융사가 대부분의 금융상품을 취급할 수 있게 되자 금융 그룹 및 금융지주사를 주축으로 통합형 은퇴상품 구성 및 운용이 가능해졌다. 이는 증권사의 연금펀드나 은행의 연금신탁, 보험사의 연금보험 등을 개별 금융사에서 모두 판매할 수 있음은 물론, 이종 상품 간 복합구성도 훨씬 더 쉬워졌음을 의미한다. 현재는 각 개인 상황에 맞는 자신만의 종합솔루션 구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은퇴자금을 보는 시대별 변화
은퇴자금에 대한 패러다임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1990년대에는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자동으로 모이는 게 은퇴자금이라고 생각했다. 은퇴 후 손에 남아 있는 게 은퇴자금이고, 그 은퇴자금의 규모에 맞게 생활하면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는 ‘1년에 한 번 부부가 해외여행을 가려면 적어도 은퇴자금 10억 원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중심으로 추구하는 노후생활에 따른 명확한 목표 금액이 제시되었다. 당연히 이 금액을 모으기 위한 투자가 중요시됐고 은퇴자금은 그 자체로 달성해야 할 하나의 목표가 되었다. 이 시기까지를 업계에서는 ‘저량개념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 후 2010년에 들어선 ‘유량개념의 시대’가 나타났다. 이제는 ‘은퇴까지 얼마를 모아야 한다’가 아니라 ‘은퇴 후 매달 얼마만큼의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다. 은퇴자산으로 10억 원을 모아놨더라도 이 돈으로 매월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없다면 이는 실패한 재무 설계란 평가를 받는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용할 때마다 금액이 줄어드는 재고 자산보다는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고정적인 수입을 만들어주는 현금흐름 창출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100세 시대가 도래한 만큼 자신의 기대수명이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질 수 있어 최근에는 은퇴 후 현금흐름을 창출하기 위한 방법론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전문가 Q&A
Q. 운용사별 은퇴상품 인기 순위는?
A. 보험사에서 운용하는 연금보험이 가장 인기가 많습니다. 종신연금 상품이 많기 때문이죠. 종신연금은 죽을 때까지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은퇴상품의 성격에 가장 부합합니다. 최근에는 증권사에서 주로 운용하는 연금펀드의 인기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저성장, 저금리 시대가 길어지면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률을 찾으려는 고객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은행에서 주로 운용하는 연금신탁은 연금펀드나 연금보험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집니다. 국공채 등 안전자산 위주로 운용하다 보니 기대수익률이 낮은 데다가 확정형 상품 밖에 없기 때문이죠.
Q. 최근 눈에 띄는 은퇴상품 트렌드는?
A. 중위험·중수익 상품들의 전통적 강세 속에 조금이라도 기대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투자상품 구성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고령화, 저성장, 저금리가 이슈니까요. 최근 다시 각광 받고 있는 변액연금보험이 좋은 예입니다. 연금보험 안에 펀드상품을 넣어 (투자를 통해) 기대수익률을 높일 수 있죠. 변액연금보험은 2000년대에 굉장히 인기였지만, 7~8%에 이르는 높은 수수료와 중간 해지에 따른 불이익(이전에는 사업비 명목으로 7년치 수수료를 한 번에 떼었기 때문에 중간 해지 시 실제 환급률이 낮았다)이 상대적으로 커 한때 인기가 크게 꺾였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과거와 달리 운용 기간까지만 수수료를 떼는데다가 수수료율도 4%대까지 낮아져 다시 인기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도움말: 김영웅 신한 PWM 자산관리솔루션부 차장 / 솔루션파트너 행내교수
슈퍼리치들도 은퇴를 고민할까?
대부분 금융권 종사자들의 대답은 ‘No’이다. 슈퍼리치들은 딱히 은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슈퍼리치들의 주된 관심사는 은퇴상품이 아닌 투자상품이다. 다만 저성장, 저금리 기조에 따라 이들의 투자상품 선택도 원금보장이나 중위험·중수익 처럼 은퇴상품 트렌드와 동조화를 보이려는 경향이 있다. 대체펀드 등 구조화 상품이 좋은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