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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프트 맥주 사업에서 성공을 맛보다

[How I Got Started] Tasting Success in Craft Brewing

뉴 벨지움 New Belgium의 공동 창업자 킴 조던 KIM JORDAN 은 예기치 않게 크래프트 맥주 사업의 개척자가 되었다.
Interview by Dinah Eng


전기 엔지니어와 퀘이커 Quaker 교의 교육을 받은 사회복지사가 협업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정답: (샘 애덤스 Sam Adams와 시에라 네바다 Sierra Nevada에 이어)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크래프트 맥주 양조 회사와 팻 타이어 Fat Tire, 그리고 레인저 아피에이 Ranger IPA 같은 맥주가 탄생한다. 사회 복지사 출신인 킴 조던과 당시 그녀의 남편 제프 레비쉬 Jeff Lebesch는 공동으로 뉴 벨지움 브루잉 New Belgium Brewing을 설립했다. 그녀는 마케팅을 총괄했다. 킴 조던(56)은 남편이 회사를 떠나자 2001년 CEO에 올랐다(이 커플은 나중에 이혼했다). 오늘날 뉴 벨지엄은 10종류의 맥주를 생산하고, 수많은 계절 맥주를 출시한다. 지난해는 1억 9,0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환경 친화적인 그녀는 재생 에너지를 도입하기도 했다. 일례로, 포트콜린스 Fort Collins에 위치한 맥주 양조 시설에 콜로라도 주 최대 규모의 민간 태양열 단지를 설치했다. 햇볕이 잘 드는 날에는 8시간까지 맥주병 생산라인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조던의 성공 스토리를 들어본다.

나는 상당히 자유분방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새크라멘토 Sacramento에서 정당 행정 업무를 봤고 어머니는 사회복지사였다. 이후 워싱턴 D.C.로 이사하면서 퀘이커교가 운영하는 한 고등학교에 다니게 됐다. 그곳에서 미국 퀘이커교 설립자 중 한 명인 조지 폭스 George Fox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는 “보람있는 인생을 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 말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16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콜로라도에 몇몇 친구들이 있어 1976년 서부로 이사했다. 어머니가 사회복지사였기 때문에 그 분야를 매우 흥미롭게 생각했다. 그래서 8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사회복지 일을 불규칙적으로 하면서 콜로라도 주립대에 입학했다. 그 후 3년 동안 여러 정부 기구가 지원하는 자립 프로젝트(Project Self-Sufficiency)에 참여, 저임금 편부모들을 돕는 사회복지사로 활동했다.

30대가 됐을 때, 나는 포트 콜린스의 한 파티에서 제프 레비쉬를 만났다. 우리는 데이트를 시작해 1990년 가을 결혼했다. 제프는 똑똑한 전기 엔지니어였다. 그러나 성격은 다소 소심한 편이었다. 우리가 사업을 한다면, 내가 전면에 나서 고객을 상대해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뉴 벨지움은 제프의 꿈이였다. 그는 집에서 직접 양조를 해봤고, 나는 맥주를 즐겨 마셨다. 그는 자신이 만든 맥주를 시장에 판매하면서 미 캘리포니아 주립대 데이비스 캠퍼스에서 일부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는 80년대 중반 유럽에서 전기 모터를 시험하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휴가 때 산악자전거로 벨기에를 여행하면서 모든 종류의 맥주를 맛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일부 맥주를 모방해 만들고픈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현재 가장 인기 좋은 맥주 중 한 가지인 팻 타이어를 만들었다. 당시 독일 라거와 영국 에일은 있었지만, 미국에서 벨기에 맥주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1991년 뉴 벨지움을 설립했고, 나는 1992년 10월까지 계속 자립 프로젝트에서 파트 타임 일을 했다. 제프도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이 몸 담았던 회사에 계속 다녔다. 낮에는 사회 복지사로 일하고, 밤에는 두 아들을 재운 다음 킨코에 가서 마케팅 자료를 만들었다. 쉬는 날 내가 맥주 주문을 받아 배달하는 동안, 아들 자크 Zach는 밴에 앉아 숙제를 하곤 했다.

내가 회사 설립에 동의했던 이유는 새로운 시도를 너무 두려워한다는 생각이 싫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패하면 다시 일터로 복귀하면 된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 설립 초기부터 열정적으로 일했다.

우리의 초창기 양조 시설은 집 지하실에 있었다. 두 번째 주택담보대출을 받고 신용카드 한도까지 빚을 내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초기 자본은 대략 6만 달러 정도였다. 제프는 첫 양조 시설을 설립하기 위해 사용했던 펌프와 많은 시스템을 구축했다. 첫 해 매출은 대략 15만 달러였다.

집에서 14개월 동안 일하면서, 가구보다 맥주가 더 많이 쌓이게 됐다. 그래서 양조 시설을 두 번째 장소로 옮겨야 했다. 우리는 첫 번째 양조 설비를 판매했다. 구매자들에게 현찰로 바로 구매하면 10% 할인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현금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지하실에서 함께 양조를 해도 된다고 말했고, 그들을 교육 시킨 뒤 이사를 했다.

양조 설비 판매상을 통해 리스 회사로부터 자금과 ‘중소기업지원 대출(SBA loan)’ 도움을 얻어 두 번째 양조 시설을 열 수 있었다. 1992년 10월, 우리는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밤마다 그레이트 아메리칸 비어 페스티벌 Great American Beer Festival에서 맥주를 제공했다. 다음 수요일에 아들 닉을 출산했고, 그 다음 월요일에 두 번째 양조 시설이 있는 곳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성실한 직원들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맥주 판매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포트 콜린스 주민들은 그때 막 크래프트 맥주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선술집에 가서 음식과 함께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우리는 포장 맥주를 전문화했다. 통에서 따라 주는 생맥주 대신 병이나 캔에 담아 판매했다. 이에 열광하는 소비자 층이 형성됐고, 팻 타이어는 꽤 유명한 맥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웃집에 사는 예술가와 함께 상표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술집에서 여러 손님들에게 우리 맥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약간 낮을 가리는 성격이라서 그런 일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훨씬 수월해졌다. 주말마다 우리는 페스티벌에 참가해 맥주를 제공했고, 기업 행사장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모금행사를 벌였다.

1994년이 되자 회사가 비좁아졌다. 그래서 신규 양조 시설을 설립하기로 했다. 시간을 두고 1.5블럭 떨어진 곳에 48에이커(약 4,900평)의 부지를 조금씩 매입했다. 우리는 디자인·건축 회사의 도움을 받아 1995년 12월 새로운 양조 시설로 자리를 옮겼다.

양조는 ‘계단 함수(Step Function)’ *역주: 투자와 동시에 큰 수익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일정 기간을 두고 성장함을 의미를 가진 자본집약사업이다. 맥주 공장, 발효 생산 시설, 그러고 포장 라인이 필요하다. 또 건설된 양조 시설 가동률을 최대한 높여 생산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좀 더 큰 시설이 필요해진다. 우리의 경우도 초기 맥주저장통 라인 설립에 200만 달러가 소요됐다. 하지만 상당한 돈을 투자해도 일정 기간 동안은 자산 수익률(Return on Asset)이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

투자는 항상 수년간 이어진다. 물론 해를 거듭할수록 투자금은 줄어든다. 축적한 자산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시점부터 돈을 벌 수 있다. 우리는 전통적인 은행 대출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그래서 한 번도 지분을 공유한 사업 파트너(an equity partner)가 없었다. 우리는 현재 노스 캐롤라이나 주 애시빌 Asheville에 추가로 양조 시설을 설립하는 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1억 4,000만 달러가 드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뉴 벨지움을 처음 창업했을 때, 우리는 쿼이커교가 말하는 것처럼 보람 있는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환경 관리, 경영 개척 정신, 그리고 폭넓은 지분 공유가 실현되도록 하고 있다. 가족 사업으로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어느 정도 가족이 되기 위해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1996년 회계 정보를 직원들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고, 직원들이 금융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들이 회사의 의사결정 과정에 더욱 많이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제프와 나는 1996년 시작한 ‘이연보상제(deferred compensation plan)’ *역주: 보상금을 나중에 지급함으로써 직원들의 이탈을 막는다를 통해 회사 지분 10%를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우리는 2000년 이 보상제를 ‘우리사주신탁제도(ESOP: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와 결합했다. 그 결과 직원들이 회사 지분의 32%를 소유하게 되었다.

제프는 1996년 스스로 양조 사업을 더 이상 이끌만한 전문 능력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벨기에 출신의 양조 장인 피터 부카에르트 Peter Bouckaert를 영입했다. 제프가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는 필요한 인력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있었다.

제프가 2001년 뉴 벨지움을 그만뒀고, 우리는 2009년 이혼했다. 나는 회사에 남았다. 개인적으로 개선하고 싶은 의미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만드는 작업을 정말로 사랑한다. 단순히 맥주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사업 마인드를 전도하는 일을 즐긴다. 제프는 은퇴한 지 13년이 됐지만, 여전히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이혼했을 때, 회사는 제프의 지분을 재인수했고 그 지분을 소각했다. 나는 지금 회사 지분을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다. 2012년 말 모든 주주들이-두 아들, 다섯 명의 이사들, 그리고 나-보유 지분을 우리사주신탁제도를 통해 직원들에게 매각했다. 회사 지분을 직원들에게 매각함으로써 회사의 영속성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회사의 투명성과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회적 기업(Benefit Corporation) 지정과 함께 우리사주신탁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많은 주식을 매년 모든 직원들에게 지급한다. 주식수는 총 임금에서 해당 직원의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서 할당된다.

우리 목표는 2010년까지 1억 달러 규모의 기업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정보다 1년 5개월 앞서 이를 달성했다. 지난해 매출은 1억 9,000만 달러였다. 크래프트 양조업체들은 상당히 동료 그룹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말해, 나는 이 업종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손해를 본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들이 사업을 하면서 정당한 대우를 받으려면 스스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남성적 장점뿐만 아니라 여성적 장점도 이쪽 분야에서는 매우 유용하다. 크게 성공하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나의 조언
킴 조던
공동 창업주 및 최고경영자
뉴 벨지움 양조

회사가 추구하는 바를 명문화하고 직원들과 끊임없이 공유하라.
매년 8월 우리는 회사 차원에서 550명 직원들과 야유회를 가진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핵심 가치를 충족하기 위해 내년에 해야 할 일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의 연간 전략 기획은 이렇게 시작된다.

직원들에게 여러 번 시도할 기회를 주어라.
우리는 실수한 사람을 계속 문책하는 대신, “왜 시스템이 실패했을까?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묻는다.

항상 최전선에 머물러라.
우리는 신기술에 투자할 때, 그중 일부는 실패할 것이라 예상한다. 모든 일이 항상 성공한다고 예상하면, 첨단 기술을 익히는 것을 게을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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