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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K초대석] 이계안 2.1연구소 이사장 겸 동양피엔에프 회장

경영·정치 넘나든 ‘ 컨버전스 맨’<br>“경제 재도약 첫 단추는 신뢰 회복”

이계안 2.1연구소 이사장은 ‘경영인 출신 정치인’이다. 과거 현대자동차 사장, 현대캐피탈 회장, 현대카드 회장을 역임하면서 스타급 전문경영인으로 활약한 바 있는 그는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이계안 이사장은 지난 2010년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장 예비후보로 출마하는가 하면,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을 지낼 만큼 중량급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성공한 인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는 여러 직함을 갖고 있다. 산업용 설비 전문업체인 동양피엔에프 대표이사 회장도 그중 하나다. 경영과 정치, 정치와 경영을 넘나들면서 ‘융합형 리더’로 활동 중인 이계안 이사장을 만나봤다.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1998년 현대자동차 사장에 새로운 인물이 취임했다. 당시 47세의 이계안 이사장이 주인공이었다. 샐러리맨이 40대의 젊은 나이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장직에 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그 ‘별’을 이계안 이사장은 따냈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사실상 마지막으로 지시한 계열사 사장 인사였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용인술로 유명했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이계안 이사장이 나이는 젊지만 핵심 계열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될 만한 충분한 역량을 갖췄다고 판단했다. 2015년은 고 정주영 회장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와 남다른 인연을 맺었던 이계안 이사장에게는 고인과 함께했던 추억이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눈에 처음 띈 것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계안 이사장은 현대중공업에서 현금 출납 업무를 챙기는 재정 부서 대리였다. 어느 날 그는 장부를 살펴보다가 미심쩍은 대목을 발견했다. 곰곰이 들여다본 끝에 분식회계라는 확신을 얻었다. 고민하던 그는 이현태 당시 현대중공업 전무(훗날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장, 현대석유화학 회장 역임)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화들짝 놀란 이현태 전무는 이계안 대리를 대동하고 정주영 회장에게 달려갔다. 일개 대리급 직원이 재벌그룹 총수에게 ‘직보’를 하는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된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정주영 회장이 이계안 대리에게 현대중공업 회계와 관련된 모든 문서를 ‘감사’할 수 있는 직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날 직후 당시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3명이 동시에 면직되는 인사 발령이 났다.

그해 현대중공업은 잔꾀를 부려 장부상 흑자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계안 대리의 똑 부러진 의기(義氣) 때문에 적자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이계안 대리 분식회계 적발 사건’은 회사 안팎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동시에 정주영 회장이 한 대리급 직원을 깊이 가슴에 새겨두게 된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9년이 흐른 1988년. 현대그룹은 현대석유화학(2003년 LG화학과 호남석유화학에 인수됨)을 설립했다. 당시 1조 원이 넘는 자금이 투입된 엄청난 대단위 투자였다. 그때 부지 선정, 공장 건설 등에 관한 종합적인 사업계획을 입안한 인물이 당시 이계안 차장이었다. 그런데 이계안 차장이 작성한 품의서에 고위 경영진은 선뜻 사인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대규모 사업이었던 까닭에 모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계안 차장의 품의서에 가장 먼저 결재 사인을 한 사람이 바로 정주영 회장이었다. 총수가 먼저 사인을 하자 나머지 중역들도 어쩔 수 없이 각자의 결재 칸을 채워나갔다.

위 두 가지 사건은 고 정주영 회장의 남다른 면모를 가늠해볼 수 있는 비화다. 동시에 이계안 이사장이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최고경영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동력, 즉 그의 인간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인연’이다. 재벌총수와 대리급 직원이 처음 조우한 바로 그 순간, 신분이나 지위를 초월해 서로 알아봄으로써 깊은 인연이 맺어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계안 이사장의 말이다. “제가 현대그룹 재직 시절 3곳의 계열사 대표를 역임했고 경영을 잘한다는 평가도 받는 등 화려한 직장생활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제가 거둔 성과의 대부분은 ‘명패’ 덕분이었거나 ‘운’이 좋아서였다고 생각해요. (기자가 지나친 겸손이 아니냐고 묻자) 진짜예요. 저는 개인의 역량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현대중공업 시절의 분식회계 적발 사건이나 현대석유화학 설립 추진 당시 일화는 저 이계안이 똑똑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정주영 회장의 경륜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죠. 그분은 정말 ‘본투비(Born to be: 타고난) 기업가’였습니다.”

이계안 이사장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그릇’ 크기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비화도 소개했다. 1999년 현대그룹과 LG그룹 간에 이른바 ‘반도체 빅딜’이 성사된 직후였다.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을 비롯해 현대그룹 핵심 경영진 7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대그룹은 LG반도체를 품에 안았지만 거액의 세금 납부 의무가 뒤따랐다. 그날 회동에서도 이 문제가 주요 안건이었는데, 한 참석자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묘수를 제안했다. 법적으로도 걸림돌이 없는 절묘한 계책이었다. 회의 참석자들이 쾌재를 부르는 순간, 정주영 명예회장이 예상치 못한 제동을 걸었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LG반도체를 인수해서 좋지? 그럼 세금을 내. 세금 내지 않으면 나라는 어떻게 살림을 살아.”

이계안 이사장의 설명은 이어졌다. “그날 회의에서 세금 문제에 대한 정주영 회장님의 발언이 나오자 일순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저 또한 회장님을 오랫동안 모셨지만 그날의 감동은 더욱 특별했어요. ‘아, 이 분은 정말 그냥 기업가가 아니구나.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경륜가이자 경세가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1998년 소떼 1,001마리를 직접 이끌고 북한을 찾은 ‘소떼 방북’ 사건은 또 어떻습니까. 세계적인 문명 비평가인 기 소르망 Guy Sorman이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표현할 만큼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그 사건에서도 정주영 회장의 경세가로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죠.”

이계안 이사장이 현대자동차 CEO에 발탁된 1998년은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의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자금은 마르고 금리는 치솟은 데다 소비까지 얼어붙으면서 한국 기업들의 경영환경은 벼랑 끝으로 치달았다. 그런 최악의 경기국면에 사장으로 임명된 이계안 이사장은 기쁜 마음보다는 두 어깨를 짓누르는 막중한 책임감이 앞섰다. 그때 정주영 명예회장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한 마디 짧은 격려사를 남겼다. “책상머리에는 답이 없어. 현장에 가봐.”

이계안 이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1970년대 초반 대학 시절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선포 이후 공부보다는 시국에 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경영학의 정수를 처음 맛본 건 대학 졸업 후 군 복무 시절이었다. 그때 우연히 펼쳐 든 책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경영의 원리(Principles of Management, 해럴드 쿤츠 저)’라는 책이었다. 그 후 또 한 권의 책이 가슴에 다가왔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의 명저 ‘경영의 실제(The Practice of Management)’가 그것이었다. 이 두 권의 경영학 저서는 이계안 이사장이 지금도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5권의 책에 포함시키는 책들이다.

“쿤츠와 드러커는 제가 경영의 본질을 깨우치는 과정에서 사숙(私淑)한 스승 같은 분들이죠. 쿤츠에게선 플래닝(Planning)-오거나이징(Organizing)-스태핑(Staffing)-두잉(Doing)-컨트롤링(Controlling)으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일의 순서를 배웠다면, 드러커에게선 ‘경영은 인간에 관한 것(About Human Being)’이라는 통찰을 얻었죠. 경영은 인간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저는 현대자동차 CEO 시절 신입사원 채용 면접에는 반드시 들어갔습니다. 그때 문사철(文史哲: 문학, 역사, 철학을 일컫는 말로 인문학을 의미함)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 답변을 잘할 수 있는 질문을 의도적으로 많이 했어요. 그 시절에 채용된 직원들이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웃음).”

이계안 이사장은 2001년 현대캐피탈 및 현대카드 회장에 올랐다. 전문경영인이 회장 타이틀을 다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이다. 샐러리맨으로서 최고의 정점까지 경험한 셈이다. 그가 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현대카드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카피로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다이너스카드(현대카드 전신) 시절 만년 하위권에 머물러 있던 현대카드의 대변신을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그 광고 카피처럼 경영인으로서 열심히 일해왔던 이계안 이사장은 어디론가 떠날 결심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는 2003년 무렵 인생 2막을 설계했다. 당시 그는 신학대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했다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 그때 그가 성경을 배운 선생님은 고(故) 하용조 전 온누리교회 담임목사(1946~2011)였다.

하 목사는 1974년 이계안 이사장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때에 그에게 “목회자가 돼라”고 권유했던 분이었다. 하지만 이계안 이사장은 그 권유를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집안의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하 목사에게 “30년간 나를 위해 살고, 그 후에 목회자가 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시점에 이계안 이사장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학대에 진학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또다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다. 유력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몇몇 대학 친구들이 그를 정치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계안 이사장은 한사코 정치 참여를 반대하는 아내와 함께 하용조 목사를 찾아가 해답을 구했다. 하 목사는 뜻밖의 말로 그를 격려했다. 요컨대 “정치도 잘하면 ‘살아 있는 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 목사는 18~19세기 당시 영국의 노예제도폐지를 위해 헌신했던 정치인이자 기독교인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를 예로 들기도 했다. 그날 이계안 이사장은 정치 참여라는 일생의 결단을 내렸다.

그의 정치철학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이를테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다. 하용조 목사의 가르침이 정치 참여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 사실을 감안하면 아주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흔히 정치인에게 ‘왜 정치를 하느냐’고 물으면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라는 답변을 많이 듣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의 눈물을 궁극적으로 닦아주는 역할은 신(神)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국민이 즐거울 때 함께 즐거워하고, 국민이 울 때 함께 울 수 있는 정치를 하자는 게 저의 정치관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공감의 정치’가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죠.”

이계안 이사장은 초선 의원으로 임기를 마친 2008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공공정책대학원)에서 초빙연구원으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세계적인 정치학자이자 국제관계 전문가이면서 케네디스쿨 학장을 역임한 조지프 나이 Joseph Nye Jr.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의 저서에 사인을 받으려고 “한국의 전직 국회의원”이라고 소개하자, 조지프 나이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계안 이사장이 재차 “전직 현대자동차 사장”이라고 말하자, 그는 금세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조지프 나이는 “미국에도 경영인 출신 정치인이 제법 있지만 대부분 임명직”이라며 “하지만 당신은 선출직 국회의원을 역임했다고 하니 적잖이 관심이 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두사람은 제법 긴 대화를 나누게 됐다. 이계안 이사장은 조지프 나이로부터 경영과 정치의 본질적 차이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들을 수 있었다.

“ ‘경영은 능률이나 효율(Efficiency)을 추구하지만, 정치는 정의(Justice)를 목표로 한다. 의사결정 방식에서도 경영은 본질적으로 대주주 중심의 독재이지만 정치는 1인 1표의 민주주의다.’ 이것이 조지프 나이의 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의 정치적 포지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죠. 결론은 경영과 정치의 경계인, 혹은 하이브리드로서 ‘기능적인 정치인’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시장 예비후보로 나섰던 것도 그 때문이죠. 지금도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 ‘경영’을 하고 싶은 포부는 여전합니다.”

이계안 이사장은 정치인으로서 나라와 세상을 바꾸는 ‘변화’에 관심이 많다. 사실 정치 자체가 현상을 바꾸는 행위 아니던가. 그가 특히 화두로 삼는 3가지 변화가 있다. 첫째가 기후 변화, 둘째가 인구 변화, 셋째가 남북관계 변화다. 3가지 모두 글로벌 이슈이자 국제정세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이다.

그중에서도 인구 변화 문제는 이계안 이사장 스스로 해결을 모색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2009년 인구 문제를 다루는 2.1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름부터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연구소는 우리나라의 최대 국가 현안으로 부상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숫자 2.1은 한 국가의 현재 인구가 장기간 유지되는 데 필요한 합계출산율(Total Fertility Rate) 2.1명을 의미한다.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이 평생 가임기간(15~49세)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 수를 뜻한다. 국가별 출산력을 비교하는 지표로 활용된다. 2013년 기준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1.19명이었다. 2012년 1.3명에서 도리어 후퇴했다.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지금처럼 저조한 추세를 이어가면 인구감소가 불가피하다. 인구감소는 노동력 감소-경제활동 위축-국력 쇠퇴로 이어지는 무서운 재앙의 전조다. 국가와 민족의 명운이 달린 문제인 것이다.

이계안 이사장은 말한다. “제가 인구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현대자동차 사장 시절 유럽 공장 부지를 살펴볼 때였습니다. 여러모로 스페인이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릴 무렵인데,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가 손을 내저었어요. 스페인은 합계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어 언젠가는 근로자 부족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는 지적이었죠. 그때 인구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변수인가 하는 점을 깨달았어요. 우리나라의 저출산 현상은 근본적으로 젊은 세대가 ‘불안(Angst)’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에요. 일자리, 육아, 사교육, 집, 노후 등 5대 문제 때문에 젊은 세대가 아이를 낳을 엄두를 못 내는 겁니다. 이 5가지 문제는 어느 것 하나 간단한 게 없습니다. 정책이나 제도만으로는 풀 수 없어요. 그 이상으로 우리 국민의 가치관 변화가 필요합니다. 가령 유럽에서 저출산 문제를 비교적 잘 해결한 프랑스 같은 나라는 동거나 미혼모 가정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면서 실마리를 풀었거든요. 또한 이민 문호를 개방하는 정책도 본격적으로 연구해봐야 할 때라고 봅니다.”

지난 2013년 이계안 이사장은 기업 경영인으로 ‘깜짝 컴백’을 했다. 산업용 소재 가공·이송 설비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동양피엔에프라는 중소기업이 경영 복귀의 무대였다. 동양피엔에프는 석유화학공장, 제철소, 발전소 등에 필수적으로 설치되는 분체(粉體: 가루) 이송 시스템 구축을 주력사업으로 삼고 있다. 2012년 한국수출입은행의 ‘한국형 히든챔피언’ 육성 대상 기업에 선정될 만큼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는 강소기업이다. 어쨌든 대기업 전문경영인을 거쳐 국회의원을 역임한 중량급 정치인이 중소기업 대표이사 회장으로 영입됐다는 소식은 세인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여기에는 애틋한 사연도 있다.

동양피엔에프의 창업자이자 오너는 조좌진 전 대표이사다. 조 전 대표는 이계안 이사장의 고교 9년 후배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2012년 조 전 대표가 뜻밖의 와병 상태에 놓이게 됐다. 경영 일선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 이계안 이사장의 고교 동문 모임에서 좌장 역할을 하는 선배가 그에게 “자네가 경험이 많으니 조 대표를 대신해 잠깐 회사 경영을 맡아주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이계안 이사장도 후배의 형편을 안타까워하던 터라 선뜻 제안을 수락했다. 이계안 이사장이 동양피엔에프를 책임지는 동안 조 전 대표는 다행히도 건강상태가 크게 호전됐다. 이제 사내이사로 회사에 출근도 하고 있다. 이계안 이사장은 “아직 내가 최고 의사결정을 맡고 있지만 하루빨리 조 대표가 경영에 복귀하는 게 동양피엔에프에게 축복이자 경영을 책임지느라 골치가 아픈 내게도 축복”이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계안 이사장의 인생 1막은 경영인이었지만 인생 2막은 정치인이다. 평생 쌓은 경영 노하우를 후배를 돕는 일에 활용할 수 있어 뿌듯하지만, 역시 자신이 지금 있어야 할 곳은 정치 분야라는 생각이 짙다. 현재 한국 경제는 잠재성장률 하락, 저출산·고령화, 내수 및 투자 부진, 가계부채, 중국의 추격과 일본의 반격 등 심각한 대내외 변수들이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경제가 재도약의 불씨를 지피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이계안 이사장의 진단과 해법은 무엇일까.

“쾌도난마식의 해결책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의 회복 없이는 백약이 무효라는 점입니다. 사회적 신뢰는 어느 한순간 회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맨 오브 인테그리티(Man of Integrity: 올바른 사람, 온전한 사람)’가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의 교육제도를 ‘인간을 만드는 교육’으로 혁신해야 하죠. 신뢰 못지않게 절실한 게 ‘배려’입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말하면 ‘분배’에 대한 고민을 하자는 겁니다. 우리나라 내총생산(GDP)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어요. 기업과 가계의 소득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경제의 큰 숙제인 가계부채와 내수부진을 해결하려면 가계소득을 늘리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밖에도 한국 경제의 당면 현안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지속 가능한 경제 시스템 구축, 경제와 환경의 균형 있는 발전, 인적자원 투자 확대 등이 반드시 필요하죠.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데요. 최고의 야구단은 각 포지션 선수들이 자기 위치를 완벽하게 커버하면서 동시에 한 발짝 더 뛰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 팀워크가 잘나가는 야구단의 공통점이죠. 우리나라도 모든 주체가 자기 직분을 지키면서 전체적인 ‘선(善)’을 이뤄나가자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때입니다.”


이계안과 정몽준의 묘한 인연

이계안 이사장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전 국회의원·새누리당)에겐 깊고도 묘한 인연이 있다. 두 사람은 각각 서울대 71학번과 70학번이다. 이계안 이사장은 경영학과, 정몽준 명예회장은 경제학과를 나왔다. 한 학번 차이가 나지만 정몽준 명예회장이 학교를 1년 더 다녔기 때문에 두 사람은 ‘졸업 동기’다.

이계안 이사장은 1976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1982년 그가 과장일 때 정몽준 명예회장이 현대중공업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정몽준 사장은 발령을 받자마자 이계안 과장에게 현대중공업 런던지점 근무를 권고했다.

이계안 이사장의 말이다. “당시 해외 근무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런던지점 발령을 내겠다고 해서 의아했죠. 나중에 생각해보니 견문을 넓힐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그 덕분에 런던에서 근무하는 3년 동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죠. 정 명예회장 덕을 본 사람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1973년 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한 후 한동안 대졸자들이 취업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때가 있었어요. 그런 시절에 1975년 서울대 상대 졸업생 190여 명 중 30여 명이 현대그룹에 입사하게 됐죠. 후문을 들어보니 정몽준 명예회장이 동기들의 취업을 도와주려고 아버지인 정주영 회장님께 부탁을 드렸던 것 같더군요(웃음).”

평범한 샐러리맨인 이계안 이사장은 1998년 현대자동차 사장에 올랐다. 재벌 2세인 정몽준 명예회장이 현대중공업 사장이 된 해로부터 16년 뒤다. 정몽준 명예회장은 1988년 국회의원이 됐다. 그로부터 16년 뒤인 2004년 이계안 이사장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집안 배경에서 큰 차이가 나는 ‘두 친구’가 16년의 간격을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장과 국회의원이 된 셈이다.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이계안 이사장과 정몽준 명예회장은 현재 소속 당적으로 보면 친구가 아닌 적이다. 하지만 이계안 이사장은 “정몽준 명예회장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치 노선을 떠나, 둘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계안 이사장은…
1952년 경기 평택 출생. 1971년 경복고 졸업, 1975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2007년 서울대 인문대학 최고지도자 과정(AFP) 이수, 2008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초빙연구원. 1976년 현대중공업 입사, 1998년 현대자동차 사장, 2001년 현대캐피탈 및 현대카드 회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2009년~현재 2.1연구소 이사장, 2013년~현재 동양피엔에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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