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의사에서 벤처기업가로 변신한 정희두 헬스웨이브 대표를 만나 그가 펼치는 사업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얼마 전부터 유방에 멍울이 만져졌던 A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을 찾았다. 다양한 검사를 받은 A씨는 떨리는 마음으로 의사와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의사가 대뜸 말했다. "검사 결과 유방암이 겨드랑이 림프샘까지 전이돼 제거 수술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 절제방식으로 제거하면 림프부종, 신경 손상 등의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는 감시 림프샘 생검술을 통해 전이되지 않은 림프샘을 살리는 방식으로 합병증을 줄이겠습니다."
덜컥 겁이 난 A씨가 물었다. "림프샘 전이요? 위험한 건가요? 많이 안 좋은 거죠? 생검술은 또 뭔가요?"
환자는 항상 자신의 질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를 원한다. 그러나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환자에게 진료 차트와 처방전에 쓰인 내용은 그저 글씨와 그림일 뿐이다. 의사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환자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주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상담실을 나서는 환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의사의 마음은 언제나 불편하기만 하다.
만화가를 꿈꿨던 외과의사
정희두(43) 헬스웨이브 대표는 말한다. "환자나 보호자가 수술 정보와 진료상담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의사와 마주한 그분들에게 필요한 건 수술이나 처방약이 아닌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해란 얘기죠. 무언가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정 대표가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1997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0여 년간 외과의사로 살았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서울대학교에서 외과 전문의 과정을 밟은 촉망받는 의사였다. 그것도 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높은 의사였다. 거기에는 정 대표만의 독특한 진료방식이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그는 회진이나 환자 상담 때마다 항상 종이와 펜을 준비해 환자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수술 이유와 방법, 수술 후 관리 방법까지 환자가 궁금해 하는 다양한 정보를 그림으로 그려가며 자세히 설명했다. 남들은 5분이면 끝낼 상담이었지만 정 대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꼼꼼히 상담을 해주었다. 그런 탓에 선배 의사들에게 가끔 구박을 받기도 했지만 정 대표에겐 이러한 시간이 또 다른 행복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정 대표는 말한다. "제가 그린 그림으로 수술과정을 이해한 환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게 정말 특별한 경험이란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의료만화를 그리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의료계의 이원복 교수('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가 제가 꿈꿨던 롤모델이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학원을 운영하시던 어머니 어깨너머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워 나름 그림에도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충북 음성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던 2003년, 조류 독감이 전국을 강타한 것이다. 정 대표는 당시 질병관리본부와 함께 조류 독감 대처법을 쉽게 설명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했다. 그리고 창업에 대한 고민은 그때를 기점으로 '고민'에서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포기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정 대표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더구나 그에겐 자신이 부양해야 할 소중한 가족이 있었다. "아니요. 전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와이프가 적극적으로 창업을 지지했죠. 야근과 장시간 수술로 곤죽이 되어 들어오는 남편이 안쓰러웠다고 하더군요. 밥 굶기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한 번 도전해보라고 말하던데요(웃음)." 정 교수는 이후 1년여간 서울대병원 의료정보센터 연구교수를 지낸 뒤 의사생활을 과감히 접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환자-의사 간 신뢰도 높인다
정희두 대표가 생각한 사업의 기본 개념은 '애니메이션 처방(Animation Prescription)'이었다. 환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진단·처방 관련 설명을 만화로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 대표는 '닥터두애니&일러스트'라는 회사를 만들어 의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애니메이션 처방 콘텐츠가 쌓이자 이를 의사들이 활용하는 전자 차트로 구현해내기 위해 2009년 헬스웨이브를 창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0년, 닥터두애니&일러스트를 헬스웨이브로 합병시켜 하나의 회사로 새롭게 출발했다.
하지만 초기 벤처기업이 대부분 그렇듯, 시작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당시 애니메이션 처방의 도입을 원하는 병원 수요가 현저히 낮았다는 것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다수 병원은 환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애니메이션 사용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파산 직전까지 가는 위기가 수차례 반복됐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헬스웨이브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유전체 분석업체 마크로젠 서정선 회장이 7억 원을 투자한 것이었다. 스마트폰 시장의 개막과 함께 병원들이 점차 디지털 콘텐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천군만마였다. 2011년 서울대병원을 시작으로 삼성서울병원, 보라매병원 등 대형병원들이 헬스웨이브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2015년 3월 기준 헬스웨이브를 도입한 병원은 대형병원 10곳, 개인병원 7곳 정도다. 특히 올해 2월에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설립한 스타트업 전문투자사 케이큐브벤처스로부터 5억 원의 투자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성장의 날개를 단 헬스웨이브 사무실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입을 원하는 병원들의 문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헬스웨이브의 주요 고객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바로 '병원'과 '학회'다. 우선 병원은 헬스웨이브가 개발한 전자의무기록(EMR) 플랫폼 '하이차트'를 통해 처방 애니메이션을 환자에게 제공한다. 하이차트의 월 사용료는 병원 규모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데 대형병원은 평균 500만 원, 개인병원은 평균 30만 원 수준이다.
헬스웨이브는 학회에 대해선 병원 고객사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 각종 의학회가 무료로 제공하는 질병 및 치료 텍스트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이를 유통하는 과정에서 수익을 얻는 방식이다. 일종의 '퍼블리싱(Publishing)', 출판 서비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정 대표와 헬스웨이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사업 전략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정 대표는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려줬다. "헬스웨이브의 지향점은 의료애니메이션의 퍼블리셔(Publisher)가 되는 겁니다. 일종의 출판사라고 할까요? 쉽게 말해 의학회가 일종의 작가(Author)로서 텍스트를 제공하면 헬스웨이브가 이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배포하는 출판사가 되는 방식이죠. 물론 애니메이션 제작비용은 전액 헬스웨이브가 부담하게 됩니다."
하지만 설명을 듣는 내내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제작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서비스라는 게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수익모델이 없다는 것일까? "일단 수익은 최근 선보인 처방애니메이션 모바일 전송 애플리케이션 '헬스브리즈 Health Breaaze'에 노출되는 광고에서 발생합니다. 일반 병원 의료진이 헬스브리즈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제약회사, 의료기기회사, 보험회사 등의 광고가 노출되는 거죠. 광고 수익의 30%는 정보를 제공한 작가, 즉 학회 측에 인세 개념으로 돌려주게 됩니다."
잠시 숨을 고른 정 대표는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고 말했다.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어요.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에서 일종의 교차 라이선스(Cross License)를 적용하는 거죠. 쉽게 말해 A 학회에서 제공한 정보로 만든 애니메이션을 B 학회가 자유롭게 사용 또는 수정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방식입니다. 환자들이 원하는 의료정보를 개인 소유의 콘텐츠가 아닌 보편적 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라고 할까요?"
정 대표는 병원 의료진이 의료 애니메이션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오픈 스튜디오' 서비스도 준비 중이다. 현장 의료진이 직접 만든 애니메이션이 의사와 환자 간의 원활한 의사 소통을 돕고, 궁극적으론 의료계 전반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청신호 밝힌 해외사업
최근 정 대표는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글로벌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사실 의료지식 이해도 차이에 따른 의사와 환자 간의 소통 문제는 해외에서도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헬스웨이브에 대한 해외 병원의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 존스홉킨스병원의 이비인후과, 성형외과, 소아신경학과 의료진들은 헬스웨이브의 의료 애니메이션 콘텐츠 효용성을 검증하는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밖에 다른 국가에서도 헬스웨이브의 콘텐츠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 대표는 해외시장 성공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의 근거는 바로 가격경쟁력에 있다. 사실 미국 내 주요 병원들은 오래 전부터 의료애니메이션의 필요성을 인식해왔다. 다만 너무 높은 콘텐츠 구매비용 때문에 실제 도입으론 이어지지 않고 있다. 정 대표는 "헬스웨이브는 10여 년간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있어 현지 제작비용의 10% 수준으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다"며 "최상의 퀄리티와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승부수를 띄울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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