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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소매에 새긴 나의 좌우명

[FORTUNE'S EXPERT] 송길영의 ‘세상 사는 이야기’

맞춤 셔츠가 유행하면서 소매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름이 아닌, 자신의 생각이나 좌우명을 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19세 관람가'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영화 '킹스맨' 관람객이 600만 명을 넘기며 많은 영화 팬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무한도전을 비롯한 여러 예능프로그램이 패러디를 만들어내고 영국 신사의 멋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클래식 정장과 구두의 매출도 두 자릿수 매출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매출 상승에 목마른 패션 유통 업체들에겐 가뭄의 단비와 같은 효과를 가져다준 셈이네요.

최근 한국에선 남성 패션, 그중에서도 맞춤형 슈트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며 매출 역시 늘고 있습니다. 소셜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서도 맞춤 정장에 대한 관심이 2011년 이후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맞춤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런던의 오래된 시가지를 지나다 보면 100년이 훨씬 넘은 듯한 상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 왕실에 구두를 납품해 왔다는 가게에 들어가 보면, 만만치 않은 가격의 구두보다 구두 주인의 발본을 남겨놓은 목각 구도 골에 먼저 시선이 갑니다. 구두 골이란 나무로 만든 사람 발 모양의 형태를 말합니다. 영어로는 라스트 last라 하지요. 이는 발자국을 뜻하는 고어 laest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왕실을 비롯한 유명인의 이름이 쓰인 구도 골은 그 상점이 그야말로 맞춤형(bespoke) 전문점으로 명성을 쌓아 왔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값싸고 효율적인 대량 생산방식으로 제작된 기성복과 기성화. 맞춤형 대중 소비가 주도하고 있는 패션 시장에서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입거나 신는다는 건 그 의미나 가치가 남다릅니다. 생산 공정의 발전과 자동화로 똑같은 물건을 엄청난 숫자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요즘에도 장인이 한땀 한땀 정성을 들여 만들어낸 물건이 대접받고 있다는 점을 보면 그 의미와 가치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실용적인 면에서 보면 솜씨 좋은 마이스터가 나에게 '딱 맞는' 것을 공급해 준다는 편안함이, 정서적인 면에서 보면 '세상에서 유일한' 것을 나만이 가지게 된다는 만족감이 맞춤 패션의 장점입니다. 패션의 본질이 나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나만을 위해 제작된 유일한 상품은 더욱 매력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최근엔 맞춤 슈트뿐만 아니라 맞춤 셔츠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맞춤 셔츠 매장에선 신체 치수를 다 재고 나면 "이니셜을 새기겠느냐"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이름의 약자를 셔츠의 한 곳에 자수로 새겨 넣는 것이죠. 옷깃이나 소매에 새기기도 하는 이니셜은 맨 처음에 세탁소에서 옷을 구분해서 찾아오기 위해 시작됐다고 합니다. 1930년대 미국에선 꽤 패셔너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고 하지요.

외국의 패션 관련 동호회에선 셔츠에 이름을 새기는 이유에 대해 심심찮게 토론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왜 이런 장식을 하게 되었나 하는 것인데 대략 두 가지 정도로 의견이 나뉩니다. '맞춤옷이 기성복보다 더 고급이기 때문에 이를 보여주기 위해'라는 의견과 '셔츠를 입은 사람의 자의식이 강해서 자신의 이름을 외부로 나타내기 위해'라는 의견이 그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잊어버릴 일은 없으니 절대 이름을 쓰지 않겠다는 글도 있는 걸 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각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다면 셔츠 소매에 이름을 새기는 것보다 자기 생각을 새기는 것은 어떨까요? 자신의 이름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이니셜이 아닌 좌우명을 써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좌우명(座右銘)이란 뭘까요? 그 뜻은 가르침으로 삼는 문구를 말하는데 원래 유래는 앉은 자리의 오른쪽에 새긴 글을 의미했습니다. 옛날 선비가 일상 속에서도 늘 깨어있기 위해 자신의 자리 옆에 글을 적어 놓았다는 거죠. 가장 유명한 좌우명은 장사숙의 '무릇 말은 반드시 충성되고 미덥게 하며(凡語必忠信)…'로 시작하는 열네 줄짜리 문장입니다. 이는 명심보감에도 실렸으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좌우명은 영어로는 모토 motto입니다. '중얼거리다'라는 라틴어 '머텀' muttum에서 비롯된 말로 역시 늘 가까이하여 읊고 마음에 새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좌우명을 새길 가장 적합한 위치는 남자의 경우 왼쪽 팔목을 덮은 소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자들은 시계를 왼쪽 팔목에 차는 습관이 있어 시간을 확인할 때 왼쪽소매를 자주 보게 됩니다. 이때 작은 경구를 본다면 세상사 속에서 불의에 타협하려는 순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꿈을 잊고 세파에 떠다닐 때 좌우명이 다시 하늘 위의 별처럼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준다면, 많은 사람이 다시금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 셔츠 소매 위에는 'Mining Minds'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제가 사람의 마음을 캐는 일을 하고 있으니 데이터 마이닝이 아니라 마인드 마이닝이란 표현을 쓰게 됐죠. 이 두 단어가 제가 다니는 회사의 슬로건이 되고 지금은 제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셔츠 소매에서 이 두 단어를 볼 때마다 저는 많은 힘을 얻습니다. 저도 무수한 데이터의 패턴을 보면서 미처 맥락을 보지 못하고 데이터의 함정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수단이라 할 수 있는 데이터가 아니라 목적인 마인드(mind)에 집중하도록 해주는 힘이 그 소매에서 나옵니다. '데이터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는, 다시 말해 '분석의 목적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명제를 잊지 않도록 그 소매가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보통 좌우명을 정할 땐 곧바로 완벽한 것을 얻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멋진 말을 할 재주가 처음부터 있지 않으니 구글링을 통해 유명한 현인들의 격언들을 찾아 그중 하나를 골라내고 싶은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처럼 스스로 만들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훌륭한 선현들의 뛰어난 생각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이 '나의 좌우명'이 되기 위해선 '나의 인생'에 그것이 녹아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선택한 것이 누군가가 이미 한 말이라면 '나만의 좌우명'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위의 두 단어를 얻기 위해 10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처음부터 완성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만들고 수정해 가면서 얻은 나만의 좌우명이 내 몸에 꼭 맞는 셔츠 소매 위 그리고 내 인생에 새겨질 때, 비로소 그 글자에 무게가 실리고 나의 스토리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마샬 맥루한은 1964년 자신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에서 "미디어는 메시지(the midium is the message)"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당신의 '몸(medium)'이 세상을 향한 '메시지'가 되어버린 시대, 당신의 소매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은…
송길영 부사장은 사람의 마음을 캐는 Mind Miner이다. 소셜 빅데이터에서 인간의 마음을 읽고 해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나아가 여기에서 얻은 다양한 이해를 여러 영역에 전달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활자를 끊임없이 읽는 잡식성 독자이며, 이종(異種)의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저서로 ‘상상하지 말라 - 그들이 말하지 않는 진짜 욕망을 보는 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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