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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서평] 전염병의 문화사

BOOKS REVIEW

“태초에 질병이 있었고, 인간은 전염병을 만들었다.”

6세기 중엽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역병이 엄습했다. 감염자들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목에 림프선 종창이 생겼고 열이 폭발적으로 오른 뒤 5일째가 되면 절반 이상이 숨졌다. 추운 겨울이 오자 상황은 더 끔찍해졌다. 기침으로 고통 받던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갔다. 사망자가 하루 1만명에 달하자 콘스탄티노플은 거대한 시체의 탑, 시체의 성이 됐다.

당시의 역병은 보통의 역병이 아닌 페스트였다. 페스트는 지중해의 해안 도시를 따라 빠른 속도로 확산됐고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이탈리아, 에스파냐, 프랑스, 영국, 덴마크까지 휩쓸었다.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건하려던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거의 모든 도시가 황폐화됐고, 유럽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비잔틴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당시 상황을 “전 인류를 거의 멸종시킬 뻔했던 전염병”이라고 묘사했다.





모든 질병의 정복은 신화다!
15년 전 국내에 출간된 아노 카렌의 ‘전염병의 문화사’를 다시 펴든 이유는 하나다. 우리나라를 혼란과 공포에 빠뜨린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근)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 메르스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책이 출간될 당시에는 메르스라는 전염병의 등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메르스를 일으키는 ‘중동호흡기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MERS-CoV)’는 2012년 처음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메르스와 같은 새로운 전염병의 발병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병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가한 뒤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감염성 질병의 창궐을 예측했다. 실제로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여겼던 질병들이 다시 발생하고, 후진국이나 오지에서나 발견됐던 질병이 선진국이나 대도시에서 출몰하고 있다. 몇몇 질병들은 과거보다 한층 강력한 독성과 항생제 내성으로 무장한 채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새로운 질병 가운데 몇몇은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수십 가지 있다. 우리의 환경과 생활방식에 일어난 변화로 말미암아 인간과 미생물에 나타는 진화의 속도가 광포할 정도로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한 가지 질병이 정복되면 또 다른 것이 새로 등장하거나 아니면 재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수십 가지의 감염병이 위생 유토피아의 꿈 을 산산조각 냈다.”

이 책에는 질병들에 대한 적지 않은 전문적 지식이 담겨 있다. 하지만 각 전염병의 구체 적이고 의학적인 메커니즘이나 원인, 대처 방안 등을 알고자 한다면 책을 덮는 것이 좋다. 전염병의 문화사는 인간을 지배해온 질병의 역사와 그 질병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려주는데 방점이 찍힌 책이다. 그동안 인류가 세균성, 바이러스성 질병들과 어떤 전쟁을 치렀으며, 앞으로 어떤 전쟁을 치르게 될지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참고서 역할을 한다.

인간들의 혼란과 무지, 야만성
기원전 5세기 정체 모를 역병이 아테네를 덮쳐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희생시키고, 6세기 중반 페스트가 동로마 제국을 파괴한 이후에도 감염성 질병은 끊임없이 인류를 괴롭혔다. 때로는 도시를 몰락시켰고, 심지어 문명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예컨대 발진티푸스는 러시아 정벌에 나선 나폴레옹의 50만 대군을 궤멸시켰으며, 유럽에서 건너온 홍역과 두창은 아메리카 신대륙의 원주민을 몰살시켰다. 1918년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적어도 2,000만 명, 대략 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반도에서도 10만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평화의 시기도 있었다.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이후 새로운 악성 질병들의 출현 빈도는 높아졌지만 유라시아에서 횡행했던 전쟁과 역병은 잠잠해졌다. 그동안 개량된 경작법과 온화한 기후 등에 힘입어 인구가 늘고 부(富)는 증가했다. 특히 유럽의 경우 인구가 서기 1000년~1300년 사이 정점을 찍는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 유럽에는 세 가지의 심각한 질병만 존재했다. 발 한증과 나병, 결핵이었다. 묘하게도 나병과 결핵은 ‘교차 면역’을 갖고 있어 서로의 위력을 감소시켰다.

그러나 평화의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카파(현 우크라이나 페오도시야)라는 크림 반도의 항구도시에서 대재앙이 시작됐다. 당시 이 도시는 3년 동안 몽골 군대에 포위돼 있었고, 성벽 안에는 제네바의 상인들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흑사병이 몽골군을 습격했다. 적이 아닌 페스트균에 패해 후퇴를 결정한 몽골군은 공성기를 이용해 시체들을 성벽 안으로 던졌다. 이후 살아남은 제네바 상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지나간 지중해의 도시마다 흑사병이 창궐했다. 그로인해 유럽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 4분의 1, 혹은 절반가량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유럽인들은 이 재앙을 ‘대몰살(Great Dying)’이라고 불렀다.

저자인 아노 카렌은 단순히 어떤 역병에 사람들이 어떻게 희생됐느냐에 관심을 두는데 그치지 않고 전염병이 출몰할 때마다 겪는 혼란상과 사람들의 무지, 야만성에도 주 목한다. “전 유럽에서 학살이 시작됐다. 마인츠에서만 1만2,000명의 유대인들이 산 채로 불탔다. 늘 그렇듯 역병은 신의 천벌로 여겼다. 유럽의 거리마다 수만 명의 고행자들이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속죄함으로써 신의 분노를 달래려고 애썼다.”





경계가 필요할 뿐 절망할 필요는 없다
국내에서 메르스가 병원을 중심으로 확산된 것처럼 당시의 질병도 치료와 구 원을 받기 위해 몰려든 교회가 감염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교황은 고행자들의 행진을 축복했지만그들의 수가 많아지고 폭도로 변하자 화형으로 억압했다. 당연히 흑사병은 계속됐고, 사람들의 믿음은 약해졌으며,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다.

메르스의 경우 낙타로부터 인간에게 옮겨진 것으로 보고돼 있다. 많은 질병들이 이처럼 숙주 동물로부터 인간에게 전파된다. 하지만 동물에게는 죄가 없다. 바이러스의 좋은 숙주인 것은 분명하지만 역사적으로 야생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동물들은 인간에게 거의 해를 끼치지 않 았다. 문제는 인간이 자행한 가축화와 도시화였다.

‘20세기 흑사병’으로 불리는 에이즈 또한 사람들의 무분별한 벌목으로 생태계가 훼손
되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원숭이와 사람과의 접촉이 잦아진 게 단초가 됐다. 에볼라도 마찬가지며, 한때 국내에 큰 공포를 불러왔던 광우병 역시 갈수록 대규모화되는 축산업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핏빛으로 물들었던 인간과 병원성 미생물들 사이의 이 오랜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까? 저자의 전망은 일단 비관적이다. “21세기는 인류에게 야만적인 시험을 부과할 것이다. 감염성 질병은 세계의 주요 사망 원인이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인간과의 접촉을 기다리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 더욱 많은 인수공통전병과 돌연변이 바이러스, 그리고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세균들을 보게 될것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역사는 질병 적응의 역사이기도 하 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다 독인다. “경계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초기 인류들도 새로운 질병과 맞서야 했고, 석기 시대의 조상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농민과 도시인들도 그러했다. 갈등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도전에서 살아남았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만약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다면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던 2002년의 사스(SARS)와 2008년의 광우병 사태, 2009년의 신종 플루, 올해의 메르스가 포함될 개연성이 높다. 전염병의 문화사가 질병의 감염 경로나 피해 상황에 더해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상까지 면밀하게 들여다봤던 만큼 각각의 사건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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