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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Watch] 만찬주·건배주의 세계

귀한자리 더 빛나게… 홍보효과는 덤 이죠


죠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 & 삐에르 라베 본 블랑

미셸피카르 코트 드 뉘 빌라주(김정일 와인)

샤토 그뤼오 라로즈

빙탄복

자희향


미국산 파니엔테 카베르네 소비뇽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때 사용해 유명세
산사춘·빙탄복·석탄향·막걸리 등 한국 술문화·전통주 알리는데 한몫
'누가 마신 00주' 애칭 붙으면 불티
주류업계 건배주 마케팅 적극 나서


1995년 미·러 정상회담이 열린 워싱턴. 한 중년 남성이 한밤중 술에 취해 거리를 배회하다 미국 대통령 경호실 요원에게 걸렸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으로 속옷 바람으로 택시를 잡으려다 경호 요원들에게 발견돼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2009년 2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나카가와 쇼이치 일본 재무상이 구설수에 휘말렸다. 기자회견에서 초점 잃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횡설수설하다 '만취 회견'이라는 의혹이 불거진 탓이다. 결국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퇴했고 이후 8월 총선에서 패배한 뒤 같은 해 10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술이 문제였다. 권력의 핵심이었던 이들이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는 데는 술이 있었다. 이쯤 되면 술은 백약(百藥)이 아닌 백독(百毒)이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술이 '천록(하늘이 주는 복록)'이나 '망우물(근심을 잊게 하는 것)' '소수추(근심을 쓸어버리는 빗자루)'라는 말과 함께 '미혼탕(혼을 미혹시키는 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유도 길(吉)이 되기도 하지만 화(禍)의 원인이기도 한 탓이다. 하지만 각국 정상들이 만나는 국제행사 연회에서 술은 빠지지 않는다.

지나치면 정신을 잃고 돌이키기 힘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나 피로나 긴장감을 덜어주고 분위기도 부드럽게 만들어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게 하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과하면 '미혼탕'이 되나 적당하면 만찬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어 각종 연회 등의 만찬주나 건배주로는 위스키·보드카·테킬라 등보다 비교적 알코올 도수가 낮은 와인이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지난 4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한 때가 대표적으로 만찬주로 죠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이 쓰였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만찬에도 미국산 파니엔테 카베르네 소비뇽과 호주산 울프 블라스 골드라벨 샤르도네가 올랐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도 바소와 온다도르가, 200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는 몬테스 알파엠이 만찬주로 등장했다. 자국 술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전통주도 국제 행사 뒤 연회에서 빠지지 않는 만찬주나 건배주로 통한다.

1972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중국 마오쩌둥 주석이 만난 미중 정상회담에서는 마오타이가, 2000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백두산 자생 들쭉으로 빚은 '들쭉술'이 등장했다.

국내 제품의 경우 산사춘이 1999년 광주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2008년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등의 만찬주로 선정됐다. 산사춘은 2010년 G20 국제의장회의 때도 복분자로 빚은 '빙탄복'과 함께 공식 오찬주로 꼽혔다.



또 국순당 생막걸리는 2009년 공학 교육연구 국제 학술회의에서, 복원사업으로 재탄생한 조선 시대 전통주 '석탄향'은 2011년 경주에서 열린 제19차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 총회에서 건배주로 사용됐다.

각국 VIP들이 만나는 연회에서 축배를 드는 만찬주로 선정되는 것은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크나큰 영예다. 최상의 술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자연스럽게 전 세계에 자사 제품을 홍보하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특히 몇몇 상품의 경우 누가 마셨느냐에 따라 이른바 '○○주'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유명세를 탈 수 있어 주류기업들은 건배주 마케팅에 매우 적극적이다.

국내에서 '김정일 와인'이나 '방북평화의 와인'이란 닉네임으로 잘 알려진 미셸피카르 코트 드 뉘 빌라주가 대표적 사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북했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와인 마니아로 잘 알려진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테이블에서 골라 건배 제의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이는 '왕들의 와인'으로 알려진 샤토 그뤼오 라로즈도 마찬가지. 2004년 노 전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해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마시면서 화제에 올랐다.

와인 브랜드인 로버트 몬다비는 2009년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오바마 미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서 로버트 몬다비 카베르네 소비뇽이 사용됐고 2008년 10월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과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 만찬 때는 로버트 몬다비 카베르네 소비뇽 리저브가 건배주로 쓰이면서 '백악관 와인'으로 불리고 있다. 삼성그룹 신년 사장단 만찬에서 사용된 '백련 맑은 술'과 '자희향'은 '삼성 만찬주'라는 별칭을 얻으며 없어서 못 팔 만큼 품귀 현상을 보였다. 충남 당진 신평 양조장에서 빚은 전통 약주 백련 맑은 술은 올 1월 초 신세계백화점이 선물세트 본 판매를 시작한 지 13일 만에 250병이 팔려나갔다.

전남 함평의 자희자양이라는 업체가 생산한 '자희향'도 당시 100병 가까이 준비했던 물량이 모두 소진됐다. 주류 업계 관계자는 "건배주 마케팅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기업들이 적극적인 이유는 건배주나 만찬주로 선정될 경우 상품을 자연스럽게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며 "특히 와인은 물론 각종 전통주들은 국제 행사에서 건배주로 알려졌을 때 해외 수출이 한층 수월해지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전에는 국제행사 건배주로 꼽히는 게 명예로운 의미로 국한됐으나 최근에는 직접적인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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