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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진단] IMF2년...은행 과연 변하고 있나
입력1999-12-12 00:00:00
수정
1999.12.12 00:00:00
김영기 기자
과연 은행은 정말로 변했나. 불행히도 일반인의 의식은 아직 회의적 색채가 강하다. 은행의 변한 모습이 국민의 가슴에 투영되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은행이 정말로 변한게 없기 때문일까. 일선 은행원과 국민 사이에 끼어있는 「괴리」의 실체는 무엇일까.대우그룹의 자금문제가 한참 불거지던 무렵 A은행 경영진들은 난감했다. 이미 정부고위당국으로부터 대우그룹에 대해 1억달러규모의 수출환어음(DA)을 매입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막상 은행실무자들은 문제가 있다며 아예 서류조차 올리기를 거부했기 때문. 입장이 어려워진 A은행 경영진들은 묘안을 짜내야 했다. 실무자들이 서명을 하는 대신 반대의견을 부전지로 첨부한 상태에서 일단 이사회에 상정하는 안. 물론 서류상의 실무자의 결재란은 공백인 상태에서. 결국 이 안건은 결국 이사회에서 부결됐고 A은행은 1억달러를 지원하지 않았다. 정부의 최고위 당국자가 은행장에게 지시한 일을 은행 실무자가 사실상 틀어버린 셈.
은행은 변하고 있다. 한때는 온몸에 덮여 있던 묵은 떼(제도)를 씻는 모습은 현란함마저 느낄 정도. 여신부분은 더욱 그렇다. 온행에게 변화를 강요한게 바로 은행 부실의 핵으로 지목된 「잘못된 여신관행」이었기 때문. 여신관행의 변화는 「직렬에서 병렬 구조로」 바뀐 여신심사제도를 들 수있다.
과거 은행의 대출시스템은 대출 심사란의 도장이 대리서부터 윗 직급으로 올라가는 라인 결재방식. 밑에서 아무리 괜찮다고 판단해 도장을 찍어도 위에서 틀면 그만. 반대로 밑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도장을 찍지 않아도 위에서 찍으라면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런 모습은 사라졌다. 조흥은행의 여신시스템은 변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선 여신심사방법이 위원회조직으로 변했다. 조흥은행은 여신심의회와 여신협의회라는 조직을 두고 있다. 대출금액이나 리스크 정도에 따라 중요한 부분은 여신심의회에서 다룬다. 회의 참석자들은 위아래가 따로 없이 한표씩 행사한다. 자기 판단으로 한표를 행사하면 되며 윗사람의 압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장은 회의에 없다. 산업은행도 마찬가지. 모두 한표씩 행사, 대출 가부를 결정할 뿐 임원의 입김은 작용하지 않는다. 심사한 결과는 문서로 남겨 찬성한 사람과 반대한 사람이 그대로 드러나게 돼있다.
은행의 대출관행 변화는 이른바 「CSS(CREDIT SCORING SYSTEM)」라는 신용평가시스템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기업뿐 아니라 이제 개인도 컴퓨터에 자신의 신용을 묻어두게 됐다. 적당한 연줄과 청탁이 통할 여지를 없애자는 취지. CSS는 「무인대출」 시대를 예고한다. 은행은 이제 창구에 손님이 오는 것을 싫어한다. 대신 PC뱅킹과 폰뱅킹을 이용하는 고객에게는 혜택을 준다. 은행이익의 80%를 안겨주는 「핵심고객」에게는 갖은 서비스를 다한다. 돈은 안되고 몸만 고되게 하는 고객은 더이상 상대하지 않겠다고 외친다.
지점의 모습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주택은행은 「후선업무집중화」라는 시스템을 도입, 「별볼일 없는」 고객은 창구의 한쪽으로 밀어냈다. 한 지점에 지점장을 세명이나 두고 있는 곳도 많다. 총괄지점장 밑에 기업·개인을 담당하는 지점장이 별도로 있다. 개인이나 기업만을 별도 책임지는 지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점장 인플레 시대다.
은행의 인사관행도 혁신대상. 은행들은 연말부터 MBO(목표관리시스템)라는 선진인사시스템을 도입한다. 과거 연공서열과 순열위주 인사관행 대신 자신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달성률 정도에 따라 급여가 책정된다. 능력닿는대로 일하고, 그에 걸맞게 돈을 주겠다는 심산. 은행이 이제 더이상 철밥통 직장은 아니다.
은행의 지배구조도 크게 바뀌었다. 은행장 독단시대를 접으면서 자연스레 부각된게 비상임이사들의 득세. 은행 구조조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비상임이사는 은행내에서 「월급이나 축내는」 할일없는 소일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명실상부한 은행의 중심축으로 우뚝섰다. 모 은행의 비상임이사는 은행의 인사권까지 좌지우지하는 형국이다.
「전문가 집단」의 득세도 빼놓을 수 없다. 사회 전반의 추세이기는 하지만 은행권의 「외국물 먹은 사람」에 대한 대우는 상상을 초월한다. 외국 금융기관에서 일한 사람, 특히 지난 수십년간 등한시해온 이른바 「리스크관리」 부분의 전문인은 최우선 영입대상이었다.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 조차 씨티은행 출신의 이성남(李成男)씨 등 외부인력을 수혈할 정도.
과거 여신파트는 당좌·외환계와 더불어 모든 행원들이 선망해온 자리. 그러나 이젠 기피대상이다. 대신 은행원들은 개인소매담당을 더 선호한다. 사회전반에 걸친 「소프트화」 바람이 은행의 조직에까지 투입된 셈.
기업부실과 이를 치유하기 위해 진행해온 구조조정의 틈바구니 속에서 은행의 자본건전성은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환란직전에는 듣도 못했던 「BIS비율」 이라는 생존분기점을 맞추느라 은행들은 아직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이는 자연스레 과거의 외형경쟁을 지양하게 했고, 자본 충실화가 우량은행을 결정짓는 첫번째 잣대로 자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무지막지한」 은행의 변화에 대해 일반 국민은 「왜」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해답은 한빛은행에 15년넘게 근무한 박모씨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은행의 제도적 변화를 은행원의 「의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교주의에 물들어있는 한국의 은행원들이 서구식 제도를 흡입하는 데 이질감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는 얘기. 상층부의 구태의연한 사고가 아직 은행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얘기도 곧잘 나온다.
워크아웃 대상인 중견 K기업의 최근 채권단협의회. 무리한 채무조정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무려 2조원에 가까운 2차출자전환이 논의되는 자리였다. 75%이상 승인이 내려져야 2차 채무조정안이 통과되지만, 1차 투표결과 찬성률이 73%대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과 30분도 채안돼 투표결과는 뒤바뀌었다. 1차투표후 「외부 또는 상층부의 압력」에 의한 중대한 변화가 생겼던 것이다. 은행의 의사결정에 또다시 주관적 색채가 개입된 셈.
구태의연한 의식과 관행은 아직까지 은행경영에 그대로 잔존하고 있는 「눈치보기」의 습성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은행은 올들어서도 세번 이상이나 말을 바꾸었다. 대통령의 말한마디에 일제히 금리를 내리는 행동은 자율경영이 아직도 먼나라 얘기임을 엿보게 한다. 은행경영의 핵심인 금융상품의 가격결정을 외부의 립서비스에 의해 결정하는 모습이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쳐질까.
선진경영을 외치고 있지만, 감독기관의 눈치에 의존한채 소극적 경영에 안주하는 모습은 무수익자산의 처리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이른바 ABS(자산유동화증권) 제도가 도입된지 1년이 넘었음에도 은행은 부실여신을 잔뜩 끼고 앉은채 최근 들어서야 신탁자산을 ABS를 통해 처리하겠다고 나섰다.
국민의 의식이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해석도 강하다. 아직도 은행을 아직도 「공공기관」으로 이해하는 국민들이 많다. 은행이 공과금을 받지않겠다고 나서면 걷잡을 수 없는 비난의 물살이 쏟아진다. 『국민이 변할때 은행도 변한다』는 한 시중은행장의 지론이 사무쳐지는 대목이다.
물론 100년넘게 고착화된 은행의 관행, 그리고 외부환경들을 일거에 뒤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은행경영에 「사회관념의 잣대」와 「주관위주의 경영」이 득세하는한 은행의 변화는 영원히 「퇴색된 진행형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가 정부에 의존하는, 주관에 의존하는 은행의 모습을 언제까지 인내할지도 미지수다.
김영기기자YGK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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