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원화에 대한 엔화 가치의 하락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가파르다. 시장에서는 엔저 현상에 따른 한국 경제의 위기를 거론하는 경고음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기업과의 경쟁에서 채산성 악화를 우려하는 기업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상대적 물가변동을 반영한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이 지난 1982년 이래 30년 만에 최저 수준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외환 당국은 이렇다 할 엔저 방어 전선을 펴지 못한 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모니터링만 하는 실정이다.
28일 외환시장에 따르면 지난 26일 원·엔 환율은 100엔당 958원8전(외환은행 고시 기준)으로 40여일째 1,000원대를 밑돌고 있다. 원·엔 재정환율이 100엔당 950원대까지 떨어진 것은 2008년 이후 처음이다. 엔저 현상은 '윤전기 아베'로 상징되는 아베 정부의 돈 찍어 풀기 정책에다 미국의 출구전략 모색이 결합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2012년 9월 전후로 본격화했다.
엔저 현상이 2년 넘게 장기화함에 따라 최근 해외 투자은행(IB)들은 원·엔 환율을 잇따라 하향 조정하고 있다. IB 대부분이 엔화 가치가 추세적으로 좀 더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는 가운데 내년 중반 이후에는 100엔당 800원대 환율을 시나리오로 설정하고 있다. 심지어 BNP파리바는 올해 4·4분기 900원대, 내년 3·4분기에는 800원대마저 깨지고 762원대까지 내려갈 것이라는 극단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은 "내년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달러는 강세를 보이겠지만 일본은 양적완화를 지속해 약세를 보일 것"이라며 "반면 원화는 막대한 경상흑자에다 핫머니 유입까지 더해져 강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그는 "내년 원·엔 환율은 800원대 중반, 나아가 800원대 초반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교역국 간의 물가변동을 고려한 실질실효환율이 30년 만에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동양증권에 따르면 일본 엔화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실질실효환율은 2010년을 100으로 했을 때 8월 78.89로 떨어진 데 이어 이달 들어서는 73까지 하락했다. 기업들이 느끼는 체감 환율 하락세는 표면적인 지표보다 더 크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런데도 외환 당국의 행보는 더디기만 하다. 엔화의 하강 속도가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마땅한 묘책이 없는 탓이다. 국내에 원화와 엔화를 사고파는 시장이 없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게 외환 당국의 설명이다. 원·엔 환율은 원·달러, 엔·달러 환율을 환산해 간접적으로 계산하는 재정환율이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시장 모니터링과 기업으로 하여금 환변동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것뿐이다.
이와 관련, 외환 당국의 한 관계자는 "엔화의 추세적인 하락에 대해서는 당국으로서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며 "다만 현재 통화정책 기조로는 일본의 제로금리와 아베노믹스에 따른 양적완화(QE)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바꾸지 않으면서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아쉽다"고 토로했다. /세종=김정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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