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하 미국이 세계 금융시장을 쥐고 있지만 한국도 경제실력과 지정학적 이점을 잘 활용하면 동북아시아 금융센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국내 은행들은 그동안 부실을 털어내고 연간 10조원 이상의 수익을 낼 정도로 성장해 내수시장의 우물에 갇혀 싸울 게 아니라 아시아, 나아가 글로벌 시장에서 국부를 창출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본지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은행산업, 이젠 경쟁력’이라는 주제로 시리즈를 5회에 걸쳐 게재한다. 지난 98년 한국 경제가 금융위기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은행 두 곳을 외국에 매각하라고 매정하게 몰아치던 뉴욕 월가의 한 뱅커는 요즘 한국 경제의 미래 성장동력을 금융업에서 찾을 것을 권한다. 그는 “한국 경제는 지난 50년간 제조업에서 돈을 벌어 성장했지만 앞으로 50년은 금융업을 키워 국부를 불리고 이를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 경제가 성장 정체를 극복하고 동북아시아 경제의 주도권을 쥐려면 금융산업의 국제경쟁력에서 그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를 위해 우선 금융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금융인 스스로가 저간의 구조조정과 부실의 늪에서 헤어나기 바빴고 국제경쟁력을 생각해볼 겨를이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은행산업은 외환위기 이후 몇 차례의 고난을 극복하고 연간 10조원의 순이익을 내며 성장,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다. 하지만 기회가 큰 만큼 도전도 만만치 않다. 이웃 중국은 아시아의 진주라던 홍콩을 건네받은 지 10년 만에 상하이에 자금성보다 더 웅장한 금융센터를 만들고 있다. 일본의 금융력은 군국주의 부활만큼 무섭게 재기하고 미국은 자유무역을 앞세워 금융시장의 완전개방을 요구한다. 안으로 은행들이 최근 순이익을 내지만 이는 부실기업이 살아나고 쌓아야 할 대손충당금이 줄어 생긴 비정상적 이익의 소산이지, 경쟁력을 쌓아올린 결과는 아니다. 오히려 은행들은 한국이라는 좁은 우물에서 경쟁을 벌이느라 총자산 대비 영업이익률이 서서히 낮아지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금융산업이 국내의 ‘은행 전쟁’을 지양해 ‘국경 없는 전쟁’, 즉 ‘글로벌 금융전쟁’에서 리딩그룹에 우뚝 서려면 늦었지만 지금부터 체질을 바꾸고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한국 금융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은행자산 규모는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해외 시장에 적극 진출, 밖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지적을 곱씹어봐야 한다. 2003년 말 기준 4대 국내 은행의 해외 자산비중은 1.6%로 미국의 씨티뱅크의 55.0%, JP모건체이스의 38.1%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금융산업에서도 삼성전자ㆍ현대자동차처럼 글로벌 기업이 나와야 한다는 공감대는 이런 지적을 뒷받침한다. 손쉬운 가계대출 중심의 예대마진에 의존하는 수익구조도 도마에 올라 있다. 은행 수입에서 수수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98년 3.2%에서 2004년에는 11.4%로 높아졌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 미국 상업은행의 수수료 비중은 80년대 중반 20%대에서 2004년에는 42.4%까지 높아졌다. 김대식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은행권이 고유 업무인 예대마진 부문에서 고급서비스로 안정성을 높이면서 정보와 자본력 등에서 증권사에 비해 우위를 점유하고 있는 투자은행(IB) 분야에서 고급 수수료 수입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지난 6월 국민경제자문회의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6개 금융기관의 인사ㆍ기획담당자 설문에서 “금융기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금융전문인력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응답이 41%를 차지했다. 박현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은행들이 현재 채택하고 있는 전문계약직 제도로는 고급인력에 충분히 보상할 수 없다”며 “연공서열식 인사시스템 개선을 통해 외부인력을 유연하게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쟁국에 비해 여전히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는 ‘정부의 규제’도 보다 큰 폭으로 완화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투자금융 업무와 기업금융 등 향후 은행권에서 수익구조 선진화를 위해 필요한 부분에 대한 규제가 풀려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은행권이 갈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하지만 한국 금융산업은 우선 아시아 지역에서 중심에 선 연후에 글로벌 뱅크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금 이 순간이 ‘운명의 시간’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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