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박인수와 이동원이 노래로 부른 ‘향수’로 우리에게 더욱 잘 알려진 시인 정지용. 35년 첫 작품집인 ‘정지용 시집’이 발간되자 “조선의 현대시가 비로소 시작됐다”는 당대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에선 지난 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이른바 월북작가로 규정돼 우리의 공식적인 문학사에서 지워지기도 한 인물이다. KBS 1TV ‘인물 현대사’에서는 11일(금) 오후 10시 정지용 시인의 북한행 미스터리를 되짚어보는 ‘시대에 갖힌 천재 시인: 정지용’편을 방영한다. 남북 분단의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반세기 동안 어둠에 갖혀 있던 그의 진정성과 작품들, 남한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가족들을 조명해 본다.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 동인을 이끌며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정지용.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돋보여 주는 시 작품만 생각하기 쉽지만, 해방 직후 그는 당시 가톨릭 재단의 신문사였던 경향신문의 주간(主幹)으로 사회의 그늘을 날카롭게 고발했다. 시에서는 표현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인식과 민족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직설적인 글들은 첨예한 이념 대립 속에서 수많은 적을 만들게 돼 1년 만에 신문사를 떠나게 된다. 그는 사회 생활을 접고 은둔에 들어가지만, 그에겐 좌익의 꼬리표가 달리며 월북했다는 허위 기사까지 나온다. 그의 방황과 6ㆍ25 중의 행방불명은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하게 만드는 빌미가 됐다. 프로그램은 88년 해금 이후 정 시인 복원작업에 가장 앞장섰던 정지용의 장남 고 정구관씨도 돌이켜본다. 작품의 해금과 명예 회복 모두 가족들이 짐을 떠안아야만 했다. 월북작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수십년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가족들로부터 정지용에 대한 기억을 들어본다. 북에도 남아있지 않다는 그의 흔적을 밟으며 기형적 이념 대립이 낳은 또 하나의 아픈 현대사를 되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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