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을 자고 있던 토끼가 이제 정신을 차리고 뛰려고 하지만 이미 거북이는 결승점에 다 왔다.” 인텔과 마이크론의 낸드플래시 합작사 설립을 두고 국내 반도체업계 고위관계자가 한 말이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인텔과 마이크론의 합작법인 설립 등의 견제가 단기적으로는 시장점유율 하락 등 악재로 나타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낸드플래시의 시장확대와 가격 안정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한국업체들에 오히려 긍정적인 작용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가 낙관론이다. 반면 비관론까지는 아니라 해도 경계론도 만만찮다. 시장 주도권을 빼앗기고 절치부심한 일본계 반도체 연합과 미국계 반도체 연합이 본격적으로 삼성전자ㆍ하이닉스 등 국내업체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언제 다시 토끼와 거북이의 신세가 뒤바뀔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한ㆍ미ㆍ일 3국을 축으로 한 반도체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한국(삼성전자) 잡아라”=인텔과 마이크론의 합작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이미 지난 90년대 후반 D램 가격 급락으로 한차례 구조조정의 한파를 겪었던 미국 반도체업계로서는 다가오고 있는 기술구조조정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뭉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차세대 메모리로 떠오르고 있는 낸드플래시가 부족한 아킬레스건을 가진 인텔과 마이크론 입장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합작투자이다. 여기에다 애플이라는 거대 수요처는 두 회사의 합작을 서두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인텔과 마이크론의 목표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대우증권의 분석에 따르면 인텔과 마이크론의 투자금액(초기 24억달러, 추가 28억달러) 규모라면 영업활동ㆍ현금흐름ㆍ차입 등을 고려할 때 월 4만장 규모의 300㎜ 라인을 3~4개 증설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현재 세계 플래시 메모리 생산설비 월 64만장(8인치 환산)의 절반 정도이며 2008년 예상 기준 25% 수준에 달한다. 올해 삼성전자의 낸드플래시 점유율이 57%, 하이닉스가 16%인 점을 감안할 때 인텔ㆍ마이크론의 투자는 도시바(21%)는 물론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기에다 인텔의 AMD도 독일의 인피니언과 플래시 메모리 사업에 뛰어들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미국ㆍ유럽업체들의 낸드플래시 공략은 시간이 갈수록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이 먼저 움직였다=히타치와 도시바ㆍ마쓰시타ㆍNECㆍ르네사스 등 일본의 반도체 5개사는 공동으로 차세대 반도체 공장을 설립, 히노마루(일본의 국기) 반도체의 부활을 외치고 있다. 이들 5개 업체는 지난주 최대 2,000억엔(2조원)을 투자, 세계 최고 수준의 시스템 LSI공장을 짓기로 합의했다. 신공장에서는 이르면 2007년부터 각사에서 하청받은 세계 최첨단 시스템LSI(대규모 집적회로)를 생산할 예정이다. 일본 반도체업계의 한 관계자는 “가격경쟁력을 강화해 대규모 설비투자를 계속하는 한국업체들에 대항하겠다”며 “생산 부문에서 비용을 최소화하고 경영자원을 신형 LSI 개발이나 설계ㆍ투자 쪽에 집중시켜 반도체 강국의 명성을 되찾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도전에 국내 반도체 전문가들은 현실화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우선 투자규모가 경쟁력을 확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데다 여전히 삼성전자나 인텔 등 선두 기업들의 기술보다는 1∼2년 뒤지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두려운 수준은 아니다”=미국과 일본이 자국 기업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도전하고 있는 상황을 국내업체들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의 경우 역으로 낸드플래시 부문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인텔 고유 영역인 비메모리 분야를 적극 육성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퀄컴 등과 파운드리 계약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비메모리 반도체 제조공정 등에 대한 기술습득 차원으로 풀이된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는 단기적으로는 선도 업체로서 가격인하라는 카드로 미국과 일본업체들의 역습을 견제할 수도 있다. 애플을 등에 업은 미국업체의 낸드플래시 공략에 있어서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새로운 어플리케이션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소니ㆍ닌텐도ㆍ세가와 같은 게임기업체와 대형 디지털가전 업체들을 수요처로 두고 있어 애플을 중심으로 한 미국업체들의 공세에 호락호락 당할 상황은 아니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도 “MP3뿐만 아니라 게임기가 낸드플래시의 새로운 어플리케이션이 될 것”이라며 “게임산업에서 깜짝 놀랄 수준의 낸드플래시 수요가 창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업체의 합종연횡에 대해서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등 국내업체들은 기술격차에 따라 쉽게 국내업체의 시장점유율이 잠식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5개사가 2007년께 양산에 들어가는 65나노 회로 공정의 경우 삼성전자는 이미 양산라인에 적용하고 있거나 조만간 적용할 예정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업체들의 도전에 국내업체들은 시장선점 효과와 1년 정도의 기술격차로 충분히 따돌릴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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