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출범을 앞둔 2013년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대통령 공약을 토대로 '국정과제 140개'를 발표했다. 국정과제 98번에는 '온실가스 감축 등 기후변화 대응'이 들어가 있다. '배출권거래제 시행(2015년) 관련 제도적 기반 및 역량 강화'를 위해 △배출권거래제 시범사업 추진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 마련 △국가 배출권 할당계획 수립 등이 골자다. 이를 토대로 박근혜 정부는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의 내년 1월1일 시행을 위한 준비와 절차에 착수했다.
물론 '대통령의 선거공약'이라는 이유 탓에 제도시행의 문제점 등을 일각에서 지적했지만 '시행연기'나 '배출전망치 재조정' 등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못했다. 배출권거래제는 별다른 저항 없이 시행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제도 시행 6개월을 앞두고 재계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정부 안팎에서도 "제도강행은 다소 무리"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던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취임 이후에는 "제도시행을 연기하자"는 의견도 강했다. 최 경제부총리가 지경부 장관 시절 높은 수준의 온실가스 감축 프로그램에 반대의견을 냈고 관철시켰던 기억 때문이다. 더욱이 최 경제부총리는 국회의원 시절 "(온실가스 감축은) 정부가 너무 급하게 가고 있다.(2009년 10월30일)" "국익 차원에서 배출권거래제는 도입 논의 자체를 그만둬야 한다.(2010년 11월26일)" "배출권거래제를 영원히 도입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2011년 1월12일)" 등 배출권거래제 도입에 부정적인 의견을 일관되게 피력했다. 기업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취임 직후인 지난 17일 성남시 인력시장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법에는 내년 1월부터 시행하도록 돼 있지만 여러 문제가 노출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점을) 점검해 시행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도 했다. 국회의원이 아닌 경제부총리로서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제도 시행의 연기 가능성이 거론됐지만 최 부총리 역시 '대통령 선거공약'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정부는 결국 배출권거래제는 예정대로 시행하고 업종별 온실가스 배출할당량도 조정할 수 없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신 재계를 달래는 카드로 탄소배출권 가격이 톤당 1만원을 넘어설 때 정부보유 물량을 방출해 기업의 과징금 부담을 톤당 최대 10만원에서 3만원으로 줄이는 대안을 내놨다. 여기에다 논란이 컸던 저탄소차협력금제 역시 시행을 유보하기로 했다.
◇"배출전망치(BAU) 신뢰 떨어져"…산출 과정, 공개 목소리도=재계는 정부의 이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온실가스 배출전망치 산정 자체에 신뢰도가 떨어지고 전망치도 현실과 달리 너무 낮은 상황에서 제도를 강행하는 것은 기업의 신규투자를 옭아매는 부작용을 양산할 것"이라면서 반발의 수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배출권의 업종별 할당에 문제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5월 온실가스 배출권의 업종별 할당계획을 발표했는데 1차 계획기간(2015~2017년) 동안 기업들이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16억4,000만톤으로 제시했다. 재계는 산출의 근거가 되는 BAU에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2009년 추정한 BAU를 근거로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예측한 뒤 이를 기준으로 할당량을 산출했다. 재계는 2009년에 추정한 BAU가 산업성장에 따른 배출 확대를 예상하지 못해 지나치게 과소 책정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2009년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산업계의 투자가 많이 줄었을 때인데 투자가 줄면 자연스럽게 온실가스 배출량도 줄게 돼 있다"고 말했다. 제철소의 신공장 가동, 반도체 업계의 새로운 라인 건설 등이 반영이 안 돼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전경련은 "정부가 1차 계획기간 중 배출량으로 제시한 16억4,000만톤은 업계 추산치보다 2억8,000만톤 낮아 부담금은 그만큼 늘어난다"고 분석했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2013년에도 BAU를 산정해놓고 이를 공개하지 않아 논란을 키우고 있다"며 "BAU 자체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 재계 설득한다지만=부담을 낮추는 식으로 해 배출권거래제 시행을 예정대로 한다는 방침을 정한 정부가 최 경제부총리의 경제5단체 회동을 시작으로 재계 설득작업에 나설 예정이지만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재계가 "제도시행을 연기하고 업종별 할당을 다시 하는 게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물러서지 않고 있는 탓이다.
정부가 내놓은 과징금 완화 대책에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정부는 배출권의 가격이 톤당 1만원을 넘길 경우 시장에 개입해 비축 물량을 풀겠다는 입장이지만 전체 보유 물량이 2,700만톤 수준에 불과해 시장을 진정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앞으로 3년간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배출권은 약 2억8,000만톤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정부 보유 물량은 총수요의 10분의1에 불과하다. 업계 관계자는 "대부분의 기업이 높은 감축량을 맞추기 위해 배출권을 팔기보다는 사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 소진 물량까지 떨어져 수급이 붕괴되면 시장 가격 자체가 형성되지 않아 극심한 혼란이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정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보유 물량이 다 떨어지면 2차 계획기간(2018~2020년)의 물량을 차입해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