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0월11일] 츠빙글리 권홍우 가난에 찌든 거리에는 거지와 도둑이 넘쳤다. 돈벌이라고는 용병으로 팔리는 길뿐. 자식을 장님으로 만들어 동냥에 내모는 부모도 있었다. 국민소득 4만달러가 넘는 부자 나라 스위스의 16세기 사회상이다. 스위스가 빈곤에서 벗어난 계기는 종교개혁과 병행된 사회개혁.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시발점이다. 1484년 루터보다 7주 늦게 태어난 1세대 종교개혁가인 츠빙글리의 사상적 토대는 인본주의. ‘우신예찬(愚神禮讚)’을 지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의 서신교류를 통해 타락한 종교로부터 억압 받는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에 교회갱신과 사회개혁운동을 일으켰다. 온몸을 던져 흑사병 환자들을 돌본 덕에 신망을 얻은 츠빙글리는 개혁의 시초를 용병과 숙박업 금지에서 찾았다. 재정적 수입원을 차단하는 고육책을 동원해 도덕성 회복을 꾀한 셈이다. 대신 강제성 세금인 십일조헌금 등 세율을 인하해 세부담을 경감시켰다. 용병 대체산업으로 시계업과 방직업도 키웠다. 츠빙글리는 예배도 돈이 많이 드는 의식 대신 설교 중심으로 바꿨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예배의식 차이가 이때 생겼다. 미국에서 건너온 한국 장로교의 뿌리도 츠빙글리다. 개혁은 스위스 각 지방으로 퍼졌지만 산림자치주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지가 척박해 용병 외에는 돈벌이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생활필수품 공급을 끊으며 개혁과 개종을 강요했다. 산림자치주들의 선택은 전쟁. 1531년 10월11일, 취리히 남방에서 일어난 카펠 전투에서 신교 군대는 가톨릭군에 패하고 츠빙글리도 전사했다. 4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츠빙글리의 사상은 캘빈을 거쳐 땀 흘려 일하는 청교도적 윤리관을 낳고 자본주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입력시간 : 2006/10/10 17:46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