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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안 내용 설명이 이번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효율적인 의사 진행을 위해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최근 국회에서 열린 한 상임위 법안소위 현장에서 수석전문위원은 위원장에게 이 같은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소위에 불참하는 의원이 많아 직전 회의에서 설명한 내용을 또다시 설명해야 하는 만큼 회의를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내린 양해인 셈이다.
#지난 3일 열린 A 상임위의 오후 회의에서 위원장은 여야 의원 6명이 참석한 상태에서 회의를 속개했다. 오전 회의 당시 참석한 의원 중 오전에 발언을 마친 의원들이 오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후 회의 속개 당시 참석한 의원들도 자신의 발언 순서가 지나자 곧바로 회의장을 나와 지역구 현장으로 향하는 자신의 차에 몸을 실었다.
여야가 6월 국회에 이어 7월 국회 회기를 결정하며 숨 가쁜 레이스를 벌이고 있지만 의원들의 마음과 몸은 이미 지역구로 향하고 있다. 국정감사와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되면 지역구 관리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만큼 지역구 행사 등을 소화하며 유권자들과 간극을 좁혀야 내년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유에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원은 "여기저기서 지역구 주민한테 인사도 안 하느냐는 협박성 전화를 받다 보면 의정 활동보다는 지역구 행사를 챙기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문제는 다른 일정 때문에 한 행사에서 20~30분만 있다가 자리를 뜨면 '거만해졌다'는 뒷말도 나와 몸이 열 개라도 지역주민들의 입맛을 못 맞출 형편"이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여야 의원에 떨어진 발등의 불=지역구 의원들은 총선이 불과 10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얼굴 알리기에 한창이지만 새누리당 소속 수도권 의원과 새정치연합 소속 호남 지역 의원들의 긴장도는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여당 의원들의 경우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와 국회법 개정안에 따른 당 내홍으로 수도권 민심이 식어가는 상황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지지율이 상승하면서 지역구 활동에 더욱 열을 쏟고 있다. 일부 의원의 경우 이미 국회에서 근무하는 보좌진 중 절반 이상을 지역구 사무실에 내려보냈을 정도다. 의원 자신뿐 아니라 보좌진을 지역의 각종 행사와 경조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각개전투 식 지역구 챙기기에 동참시킨 것이다. 한 보좌관은 통화에서 "수도권 지역은 집권 중반을 넘기면 여당에 불리해진다. 정권 심판론에 수도권 표심이 민감하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여당 의원들이 최근 지역구 일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의원의 상임위 참석은 사실상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라고 설명했다.
호남 지역의 새정연 소속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탈당 이후 무소속으로 당선된 천정배 의원의 '호남발 신당론'이 지역주민 사이에서 회자되면서 호남 민심이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의원실의 보좌관은 "문재인 새정연 대표에 대한 호남 민심이 싸늘해져 호남 의원들 역시 발만 동동거리다 결국 지역구를 찾는 횟수를 늘려가고 있다"며 "더욱이 호남 중진을 개혁의 대상으로 보는 당내 기류가 형성될 것에 대비해 호남 신당론까지 검토해야 할 처지여서 새정연 호남 의원들은 상임위보다 내년 총선에서 살아남느냐가 최대 현안"이라고 토로했다.
◇비례대표 의원도 지역구 올인=전문성을 인정받아 비례대표로 입성한 의원들 역시 재선 욕심을 앞세워 국회보다는 내년 총선 출마 지역으로 무대를 옮긴 지 오래다. 따라서 그동안 자신의 정책 보좌 역할을 해온 보좌관을 떠나보내고 선거 전문 보좌관을 수소문하며 이들을 영입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최근 해임 통보를 받은 한 보좌관은 "의원이 '내년 총선에서 일단 이겨야 하기 때문에 지역구에서 표밭을 다질 보좌관이 올 것이고 내년 총선 이후에 다시 보자'는 통보를 받았다"며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만 올해는 예전보다 그 시기가 좀 일러진 듯하다. 그만큼 의원들이 내년 총선 결과를 예단할 수 없어 조바심을 내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들 비례대표 의원도 출근을 지역 사무실로 한다. 경남 지역에 사무실을 열은 한 비례대표 의원은 "정책 업무에 충실해야 하는 비례대표의원이지만 지금은 적진에서 상대 당 후보를 꺾는 것이 법안 발의 한 개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당내에서도 그동안 편하게 비례대표 생활을 했으니 이번 총선에서는 당에 보답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류가 강하게 형성돼 있어 등 떠밀려 지역구로 내려왔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당내 분위기를 전했다.
지역구가 분구·합구되는 의원들도 좌불안석이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농촌 지역 의원들이 지역구 통폐합을 걱정하며 당직도 고사한 채 지역구로 내려가는 것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한 의원은 "농촌 지역 특성을 감안하지 않은 채 선거구가 조정되면 선거 유세기간 동안 유권자들 절반도 못 만난다"며 "인구수로만 지역구를 정하게 되면 유세를 벌여야 하는 지역이 지리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어 미리미리 유권자를 만나야 승산이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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