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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롯데의 꿈] '보수롯데' 바꾸려던 25년… 아버지와 '문화적 충돌'로 비극 불러

<중>제동 걸린 신동빈의 '뉴롯데' 야망

지난 2001년 12월 당시 부회장이었던 신동빈 현 롯데그룹 회장이 막 개점한 세븐일레븐 천호점을 직접 둘러보고 있다.

지난 2007년 6월 일본 도쿄 신주쿠에서 열린 버커킹 1호점 개점식에서 신동빈(오른쪽) 회장이 박수를 치고 있다.

지난 2012년 롯데칠성음료의 서울장수막걸리 공장을 둘러보는 신동빈(왼쪽) 회장.

지난 3월 신동빈(왼쪽) 롯데그룹 회장이 잠실 롯데월드타워의 100층 돌파 기념 및 안전기원식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중대결정 내릴 때마다 辛총괄회장과 다른 목소리

사업전반 IT시스템 도입·온라인쇼핑몰 등 출범

'젊은 피' 수혈하고 잇단 M&A로 활력 불어넣어

직원들 "조직분위기 개선 기대 컸는데…" 아쉬움


1990년 당시 신동빈 호남석유화학 상무는 롯데그룹에 입사하자마자 수년에 걸쳐 아버지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에게 간청하다시피 했다.

"유통뿐만 아니라 롯데의 모든 사업에 정보기술(IT) 시스템을 적용해야 합니다. 지금 안 하면 늦습니다."

하이텔·나우누리 등 PC통신 서비스가 간신히 싹트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롯데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까지만 해도 신격호 총괄회장은 IT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필요성도 못 느꼈다.

아들은 아버지가 익히 아는 일본 기업의 사례를 총동원해가며 수년간 설득을 계속했다. 당시 판매시점관리시스템(POS)과 전자메일, 사내 인트라넷 등을 엮은 그룹웨어의 적용을 추진하고 있던 '세븐일레븐'이 대표적이었다.

마침내 신격호 총괄회장의 오케이(OK) 사인이 떨어졌고 롯데그룹은 1996년 롯데정보통신을 설립했다. 그룹사의 각종 IT 시스템 구축을 도맡고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역할이었다.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른 부자는 롯데그룹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종종 서로 다른 목소리를 냈다.

1922년생인 신격호 총괄회장은 빈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밑바닥에서부터 사업을 일궜다. 반면 이미 롯데가 일본 재벌의 반열에 들었던 1955년 태어난 신동빈 회장은 도쿄 '귀족학교'인 아오야마가쿠인과 미국 컬럼비아대 MBA에서 학업을 마치고 일본과 영국 런던 금융가인 '시티 오브 런던', 한국을 오가며 전형적인 재벌가 2세로 살아왔다.

언뜻 점잖고 차분해 보이는 신동빈 회장이지만 실제로는 여느 차남들이 그렇듯 보수적이기보다 '개방'적인 쪽에 가까웠다. 신동빈 회장으로서는 '뉴롯데'를 만들려면 국내 기업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문화'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바꾸기 위해 정말 무던히도 노력했다(롯데 그룹 고위 관계자)".

롯데의 주요 임원 집무실과 임직원이 모두 모이는 강당에는 지금도 신격호 총괄회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유통업에도 아이디어와 창의성이 중요하지만 정작 롯데의 조직문화는 제조업처럼 군대식에 상명하복 문화가 강하다는 지적이 이어져왔다.

신동빈 회장은 사람부터 바꿨다.

그런 흐름이 처음으로 감지됐던 때가 지난 2005년이었다. 롯데는 보수적인 문화를 반영하듯 그룹 임원들의 나이가 어느 곳보다 많았다. 50 중반이 넘어도 임원이 되기 힘들었다.

신동빈 회장은 당시 각각 55세, 50세로 롯데 임원들 중 젊은 축이었던 채정병 전무(현 롯데카드 사장)와 황각규 상무(현 롯데 정책본부 사장)를 부사장, 전무로 승진시켰다.

이때 인사에서 계열사 사장단을 대거 교체해 60대 최고경영자(CEO)는 단 세 명만 남겼다. 40대 초중반 상무를 대거 임명했다.



외부 인사도 투입했다. 신세계 출신의 장경작 전 조선호텔 사장을 호텔롯데 사장으로 임명했다. 경쟁사 출신의 CEO를 불러들여 조직에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겠다는 의도였다. 이후에도 젊은 피와 혁신에 초점을 맞춘 인사가 이어졌다.

보다 자유롭고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는 조직 분위기도 필요했다. 신동빈 회장은 수년 전부터 "우리의 경쟁 상대는 신세계·현대가 아니라 아마존·구글·이베이"라고 강조했다. 전 계열사에 '스펙'을 따지지 않는 채용 전형을 도입하도록 지시해 새로운 인재확보에도 나섰다.

이런 상황은 한편으로 사업적 측면에서 "신동빈 회장은 사업과 관련해서는 아주 냉정하고 공격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

제과나 중화학공업에 애착이 깊은 아버지와 달리 신동빈 회장은 금융, IT 등 새로운 세상의 중심이 될 사업에 관심이 컸다.

그는 신격호 총괄회장이 국제통화기금(IMF) 위기에도 꿈쩍하지 않을 만큼 안정적으로 롯데를 키워낸 데 경의를 표했지만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을 항상 되새기며 이를 악물었다.

1999년 부회장 취임 후 신동빈 회장의 행보는 더욱 과감해졌다.

2000년 무선인터넷 전담 마케팅 업체인 '모비도미'와 온라인 쇼핑몰인 롯데닷컴을 출범시키고 대표를 맡았다.

모비도미는 당시부터 국내에도 보급되기 시작한 휴대폰 무선인터넷 사용자들을 겨냥해 온라인 이벤트 등 마케팅을 맡았다. 사업이 지지부진해 3년 만인 2003년 롯데닷컴에 흡수합병됐지만 보수적인 롯데의 경영인으로서는 보기 힘든, 실패를 무릅쓴 도전이었다.

반면 신용카드 사업은 성공을 거뒀다. 롯데는 2002년 동양카드(현 롯데카드)를 인수하며 신용카드 시장에 진출했다. 당시에도 신격호 총괄회장은 "잘 모르는 사업에 무리하게 뛰어들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지만 신동빈 회장이 끈질기게 설득했다.

2006년에는 롯데쇼핑을 한국뿐만 아니라 런던에서도 상장시켰다.

경영권 간섭과 "사업에 실패하면 주주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기업 상장에 부정적이었던 신격호 총괄회장과는 대조적이다.

인수합병(M&A)은 점점 규모가 커져갔다.

2006년 4,667억원에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을 사들인 데 이어 대한화재(현 롯데손해보험, 3,526억원)·두산주류(현 롯데주류·5,030억원) 등을 인수했다. 2010년에는 각각 1조3,000억원, 1조5,000억원을 들여 GS리테일의 백화점·마트 부문과 말레이시아 석유화학업체 '타이탄'을 새 가족으로 들였다. 롯데하이마트(1조2,480억원), 롯데렌탈(약 1조원), 더뉴욕팰리스 호텔(9,500억원)도 잇따라 품에 안았다.

신동빈 회장은 자금조달에도 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 재정위기가 최악의 사태로 치닫기 직전인 2011년에도 미리 마이너스 금리로 전환사채를 발행해 약 1조원의 실탄을 쟁여뒀다. 롯데 관계자는 "일본 노무라증권에서 7년간 금융업계를 직접 겪은 것을 바탕으로 롯데에 선진 경영기법을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례를 찾기 힘든 형제, 그리고 부자간의 경영권 분쟁. 이는 어쩌면 25년 가까이 누적된 문화적 충돌이 고름이 돼 터진 것일지 모른다. 롯데 계열사의 한 전직 CEO는 "신동빈 회장은 그룹이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업과 조직 전반에 걸쳐 새로운 틀을 갖춰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꼈다"며 "그의 마음이 결과적으로 너무 큰 분쟁으로 이어져 본인 스스로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롯데의 한 차장급 직원은 "그동안 신동빈 회장 체제가 굳어질수록 옛날 회사 같은 조직 분위기도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며 "이번 사태로 롯데의 변신에 일정 부분 제동이 걸리고 속도 또한 늦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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