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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사이드] 일 권하는 사회 덫… 강제력 없어 상사 눈치보며 야근 일쑤

가정의 날에 담긴 슬픈 우리 노동 현실<br>사무실 소등 등 통제나서지만 개인 스탠드 구입해 일하기도<br>지점 확대 따른 인력 부족으로 "가정의 날 있으나마나" 토로



올해로 은행원 생활 5년 차를 맞이한 조모(31) 대리. 많은 업무로 인해 대부분 저녁식사를 지점 동료들과 함께한 뒤 야근을 한다. 평일 저녁시간 친구나 애인과 저녁약속을 잡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조 대리에게도 일주일 중 하루 저녁 스케줄을 마음껏 잡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수요일, 이름 하여 '가정의 날'이다.

조 대리가 다니는 은행은 매주 수요일 오후6시30분 모든 직원의 퇴근을 유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조 대리는 대학 동창들이나 입행 동기들과의 약속을 꼭 수요일 저녁에 잡는다.

조 대리는 "다른 날에 할 일이 더 늘어날 때도 있지만 수요일 저녁만큼은 확실한 내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 좋다"며 "주변 동료들은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 먹거나 취미활동∙자기계발을 하는 등 알차게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또는 한 달에 1~2차례 정시 퇴근을 하는 가정의 날은 관공서와 대기업∙은행권 등 우리나라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집단별로 '패밀리 데이' '소통의 날' 등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날 하루만큼은 온전하게 가족 또는 개인의 여가시간을 즐기라는 취지다. 매주 금요일을 '해피 데이'로 정해 정시 퇴근하는 한편 평상시에도 야근이나 주말근무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대웅제약의 한 관계자는 "일과 삶의 균형을 적절하게 갖춘 직원이 행복하고 그래야 회사도 성공한다는 경영철학을 실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정의 날을 적용하고 있는 기업들의 실천의지와 추진방식은 각양각색이다.

예로부터 야근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은행권에서는 일주일에 하루 가정의 날만큼은 엄격히 정시 퇴근을 지키는 편이다.

기업은행의 경우 가정의 날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가 해당 지점 평가에 반영되고 있다. 직원들의 컴퓨터가 꺼진 시간, 지점의 문을 잠그고 보안업체에 이를 알리는 시간 등의 평균을 내 점수화하고 있으며 실제로 오후6시30분이 되면 아예 컴퓨터가 자동으로 종료되기 때문에 정말 급한 일이 없으면 부팅을 다시 하지 않고 있다.

신한∙외환 등 다른 시중은행들도 마찬가지로 각자 적용 시간∙요일에서만 일부 차이가 있을 뿐 시스템을 통제하거나 상급 기관, 노동조합에서 주도적으로 가정의 날 지키기에 나서고 있다.

아예 사무실 불을 강제로 꺼 직원들이 어쩔 수 없게 회사 밖으로 나가게 하는 곳도 많다.



LS산전이나 대웅제약 등 일반 기업은 물론 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와 전국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가정의 날 강제 소등을 실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시스템을 통해 개별 사무실에서 다시 불을 못 켜놓게 하자 경기도 한 지자체에서는 직원들이 하나둘 개인 스탠드를 사다 놓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경기도 분당에 본사를 둔 SK C&C는 가정의 날 서울과 수도권으로 향하는 퇴근버스의 출발시간을 오후7시에서 오후6시30분으로 30분 당겨 직원들의 퇴근을 재촉하고 있다.

가정의 날이 전사 차원이 아닌 사업 부문별, 부서별로 적용되면서 혼선이 빚어지는 경우도 있다. 한 대형 자동차 제조사는 생산공장이나 연구소에서 가정의 날이 시행되는 반면 본사는 부서별 특성에 맞게 자율적으로 운용 중이다. 한 본사의 직원은 "연구소와 협업을 통해 진행할 일이 있는데 가정의 날에는 그쪽 직원들이 모두 퇴근해 업무 진행이 늦어질 때가 종종 있다"고 전했다.

유명무실한 가정의 날에 대한 불만도 있다. 국내 대형 통신서비스 업체의 한 직원은 "부서와 담당업무에 따라 가정의 날을 지키지 못하는 곳도 많다"며 "특히 연차가 낮은 직원들 입장에서는 퇴근하는 데 여전히 눈치가 보인다"고 밝혔다. 삼성그룹 금융계열사의 한 직원은 "평사원협의회에서 가정의 날 정시 퇴근 여부를 자체 조사하는데 강제력이 거의 없다"고 토로했다.

회사별 가정의 날이 조금씩 다른 모습이지만 일단 해당 기업 직원들은 이를 반기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닌 퇴근을 회사가 나서 종용하니 나쁠 게 없다는 것. 특히 내 일이 끝나도 직장 상사 눈치에 바로 집에 가지 못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가정의 날만한 게 없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정의 날에 대해 꼭 곱게 볼 수만은 없다고 지적한다. 야근이 미덕이고 오래 일하는 게 습관이 된 대한민국의 힘든 삶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가정의 날이라는 것이다.

대형 은행에 다니는 김모(35)씨는 "은행들이 앞다퉈 지점 확대 경쟁에 나서면서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야근이 많아지는 것 같다"며 "가정의 날을 거꾸로 생각하면 일주일에 하루만 가정과 함께하라는 소리 같아서 씁쓸하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박모(33)씨는 "가정의 날은 우리나라 기업 인력운용의 한계와 업무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상징한다"며 "일과 시간 이후는 당연히 나와 가족이 함께 할 시간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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