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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8월29일] 셰이스의 반란


[오늘의 경제소사/8월29일] 셰이스의 반란 권홍우 편집위원 1786년 8월29일, 매사추세츠 펠헴 마을. 농부들이 떼지어 법원으로 몰려갔다. 가혹한 세금과 채무자 재판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평화적 시위는 대규모 농민반란으로 번지고 종국에는 미국 헌법을 낳았다. 주동자는 대니얼 셰이스. 독립전쟁 영웅이었으나 봉급은 물론 참전수당을 받지 못해 빈농으로 전락한 마당에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가구당 20파운드(요즘 가치 약 230만원)의 인두세를 부과하자 봉기를 이끌었다. 과도한 세금이 매겨진 이유는 주정부도 가난했던 탓. 독립전쟁 비용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재정적자를 메우려 농민을 짜냈다. 패전 영국이 보복조치로 단행한 경제봉쇄도 경제난을 가중시켰다. 농부들을 더욱 궁지로 내몬 것은 상인과 금융업자들의 대출금 상환 채근. 채권자들의 압력을 받은 주정부가 재판을 통해 빚을 갚지 못하는 농부들의 집은 물론 농기구까지 압류하자 쌓인 분노가 터져 농민반란군은 순식간에 1,800명선으로 불어났다. 일부는 경제난 탈출을 위해 영국의 지배로 돌아가자는 주장까지 앞세웠다. 농민군은 1787년 2월 상인들의 자금으로 조직된 4,400여명의 진압군이 쏜 대포 두 방에 9명의 사망자를 낸 채 산산이 흩어졌지만 소기의 성과를 이뤘다. 주마다 반란의 파급을 막기 위해 세금 경감, 채무 변제 등의 후속 조치를 내놓았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주모자들도 사면을 받았다.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반성은 미국 헌법 제정(1787년)과 연방정부의 탄생(1789년)으로 이어졌다. 셰이스 반란이 신생국가의 성격을 13개 독립주의 느슨한 동맹체에서 연방국가로 탈바꿈시킨 셈이다. 반란이 자양분 역할을 했기 때문일까.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이런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입력시간 : 2007/08/2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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