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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날 5,000억弗 시대 열었다] <수필공모/우수상> 19년 된 티와 10년 된 청바지

이은혜 재페루한국학교 교사

정리를 하자 싶으면 늘 난감해진다. 무얼 버려야 할지. 무얼 갖고 가야 할지 결정 못하고 미적거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큰 맘 먹고 버려보자 싶다. 아… 회색 면 티가 나왔다. 이민 나갈 준비를 하며 수원 남문 백화점에서 산 것이다. 모자가 달리고 박스 티인데 어찌나 편하고 맘에 드는지 첫 날엔 아예 입고 잤었다. 좀 낡은 티가 나는 게 더 정감 가고 짠한 맘까지 일으킨다. 이민 생활 초창기에 누구나 덤벼보는 ‘알마센’을 했다. 작은 가게라고 볼 수 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이니 대화가 제대로 안돼 답답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손님들과 친하게 지내며 정을 주려고 했을 때 그들이 모두 내 가게에서 좀도둑 노릇을 하며 물건을 하나씩 버릇처럼 훔쳐간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아주버니네, 우리 가족, 시누, 시부모와 한 집에서 사는 아르헨티나 생활은 조선시대 시집살이가 연상될 정도였다. 잠을 못 자 칭얼거리는 아이를 업고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보았다. 시골에서 자란 내가 늘 보던 북두칠성 대신 남십자성이 보인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한국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면 버릇처럼 티를 만지작거리며 가곡을 불렀었다. 차츰 가게손님들을 다루는 법도 익히며 씩씩해져갈 즈음 달러파동이 났다.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올랐다. 마침 시아버지와 남편이 산타페 주의 ‘세레스’라는 곳에서 양봉을 시작하기로 해 가게를 접었다. 양봉을 시작한 뒤로도 고생은 계속됐다. 창고 안에 텐트를 치고 침대 대신 빈 벌통을 깔고 시아버지와 남편과 아들과 한 텐트에서 지냈다. 화장실 대용으로 들판에 삽으로 흙을 퍼내고 널빤지 두개를 얹어 놓았지만 볼 일보러 갔다가 몇 번 뱀과 맞닥뜨리고 난 뒤엔 도저히 갈 엄두가 안나 심한 변비로 고생해야 했다. 바닥에 쏟은 음식국물에 몰린 개미떼에 무릎 깊이까지 빠져 급성 알레르기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었다. 하늘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농사는 하기 싫다며 남편은 페루 재이주를 결정했다. 부업으로 교민 상대 비디오 가게를 아파트 거실에 차려서 장사를 했다. 김치, 고추장 된장을 담가 팔았다. 그 와중에도 은혜를 베푼 이들에게 수없는 배신을 당했지만 가족에 대해 갖는 희망이 있었기에 늘 꿋꿋하게 잘 지냈다. 하지만 배우자의 배신은 너무 열심히 살았던 대가에 찬물을 끼얹었다. 내 마지막 보루인 가정이 흔들리니 살기 싫었다. 죽기를 원하던 나는 맨 발로 절벽 끝에서 센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임신 5개월이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왜, 무엇 때문에, 여기서 내가 이러고 있을까? 돌아가자. 한국에 가면 내가 편히 살 수 있는 공기와 따스함을 주는 내 핏줄이 있지 않은가. 남편이 용서를 구했다. 용서가 안됐지만 아이들을 버리고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나 하나 희생하고 살면 여럿이 행복한데…’ 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엄마와 아내 자리에 있기로 했다. 옷 정리를 다 끝내고 19년의 역사를 가진 회색 면 티를 입어본다. 그리고 아르헨티나를 떠나며 사 입은 10년 된 청바지를 꺼내 입는다. 구석에서 먼지 쌓여 있던 이젤을 꺼내고 유화물감들을 꺼낸다. 나무 팔레트에 먼저 갈색과 진초록을 짰다. 숲 배경을 먼저 그려본다. 고동색과 노랑색, 빨간 단풍 가지를 표현해본다. 온 산에 열매가 가득하다. 알록달록 번지는 산과 들이 감동이다. 그리다 노란 은행잎 물감과 자주 단풍이 바지에 묻어버렸다. 이왕 버린 김에 붓에 물감을 잔뜩 묻혀 바지에 쓱쓱 문질렀다. 화판과 청바지에 단풍이 들었다. 고향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가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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