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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 사망/93년 파란의 삶과 정치역정
입력1997-02-21 00:00:00
수정
1997.02.21 00:00:00
온종훈 기자
◎“중국현대사 물줄기 바꾼 대륙의 별”/1904년 사천성서 출생 16세때 불 유학길/20대초반 공산당 입당·정치활동 본격화/실각재기거듭 77년 집권후 개방불 댕겨모택동과 중국현대사의 양대 거목으로 불려지며 과거 중국황제와 맞먹는 권위를 누린 등소평이 19일 밤 사망함으로써 중국 현대사에 깊이 새겨진 파란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작은 거인」, 「오뚜기영감(불도옹)」, 「중국경제의 총설계사」등 그의 이름앞에 붙어 다니는 현란한 수식어들이 말해주듯 그는 온갖 시련과 좌절을 몸으로 이겨내면서 중국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거인이었다.
1922년 중국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 공산당활동에 참여한 이래 반세기 넘는 기간동안 3차례의 실각을 딛고 재기해 끝내는 중국권부의 최정상에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리면서 「개혁·개방」,「4개 기본원칙」,「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시장경제 건설」등의 구호로 12억인구의 중국대륙을 이끌어 간 그의 생애는 중국 현대사와 영욕을 함께한 것으로 평가된다.
1977년 8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전국대표대회(11대) 1차 중앙위 전체회의(11기 1중전회)에서 당정치국 상무위원 등에 피선된 이래 지난 90년 3월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당중앙군사위 주석, 국무원부총리등을 두루 역임했으나 말년에는 평 공산당원이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정치생명력을 길게 끌고 가는 노련함을 과시했다.
등은 1904년 사천성 광안현 협흥향 패방촌의 「객가인」(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이주한 한족) 사대부 지주집안에서 3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등이 혁명운동과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우리의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당시 반제국주의 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나자 중경에서 프랑스 유학을 준비중이던 등은 학우들과 일본상품배격운동에 가담했었다. 이런 소박한 애국심은 프랑스유학을 거치면서 공산주의로 이어졌다.
식당웨이터등 온갖 일들을 하면서 파리의 제어중학과 샤리중학을 수학한 등은 러시아의 10월혁명과 주은래, 조세담등 진보적 선배들의 영향으로 22년 재구 중국소년공산당에 입당, 24년 정식공산당원의 길을 걷는다.
45년 중일전쟁이 끝나고 국공내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등은 군사전문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48년8월 유백승등과 함께 국민당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던 회하전투는 등이 생전에 내세우던 전투경력이었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가고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다. 등은 건국기념식후 바로 중국의 서남지구인 사천, 귀주, 운남등을 관할하는 서남지국 제1서기로서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이후 등은 당중앙 조직부장을 거치면서 「반당사건」을 해결하는등 중앙무대에서 비중을 한층 높여간다. 또 56년 9월의 8전대회에서 중앙위 정치국원 정치국상무위원 중앙총서기로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등에 이어 53세의 나이로 당서열 제6위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모택동에 의해 주도된 백화제방, 인민공사, 대약진운동등이 계속해서 실패하자 원래가 실용적인 등소평은 모와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유소기, 등소평등의 실용주의 노선이 확대되는 것에 반발한 모택동은 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등은 문혁으로 반혁명분자로 몰려 그해 12월 모든 공직에서 쫓겨난다. 등의 첫 실각이었다.
권력의 정상에서 군림하던 그는 장남이 척추장애자가 되고 자신은 하방운동으로 3년동안 막노동을 하는등 고초를 겪다가 71년 림표의 쿠데타미수사건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 73년 국무원총리로서 복권된다. 복권한 그는 3년만인 76년 강청, 장춘교등의 4인방에 의해 일어난 76년 천안문사건의 책임을 지고, 또 한차례 실각하게 된다.
등의 3차 실각후 후임으로 국무원총리가 된 화국봉이 4인방과 정치투쟁에서 승리하면서 등은 또한번 복권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정권을 잡게된 화는 등에게 손을 내밀게 돼 77년 3중전 회의에서 실각이전의 직위를 회복하고 다시 한번 오뚝이처럼 일어나게 된다.
등은 계속되는 실각과 복권과정에서 눈에 띄게 신중해 진다.
이때문에 화국봉과의 마지막 권력투쟁과정에서는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결국은 화를 권자에서 축출(81년 6월)했으며 명실당부한 중국의 제1인자가 되었을 때도 당주석직은 측권이었던 호요방을 않히고 그 자신은 군사위 주석직만 차지한채 군을 장악하는데만 주력한다.
이후 그는 전임자였던 모택동에 대한 비판작업을 시작, 모시대와의 단절을 선언한다. 특히 문혁의 피해자들을 계속 복권시키면서 자신의 실용노선에 대한 외곽 지원군을 확보하고 호요방을 시켜 삼종인(림표, 강청그룹 추종자, 파벌주의자)의 숙청작업을 벌인다.
그리고 개혁의 여파로 지난 87년 1월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몰아치자 자신의 후계자인 호요방을 실각시키고 88년 4월에는 천안문사태로 오른팔이었던 조자양 총서기까지 실각시킨다. 천안문사태로 두 후계자를 제거한 다음 심신의 타격을 입은 그는 권력의 전면에 부상하지 않으면서 그의 후계자인 강택민을 내세워 수렴첨정하면서 말년을 보낸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후계자인 강의 입지강화와 개혁과 개방노선의 가속화를 위한 상징적인 존재로서 역활을 하면서 베일속의 최고 권력자로 살았다.<온종훈>
◎등소평 연보
▲1904년 8월22일=사천성 광안현 협흥향 패방촌에서 객가인(중원에 살다가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이주한 한족을 일컫는 말) 지주집안 3남1녀중 장남으로 출생, 본명은 등희현
▲1924년=프랑스에 유학중 중국공산당 구주지부 입당
▲1927년=귀국, 국민혁명군 풍옥상부대에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 종사, 등소평으로 개명
▲1931년=강서 영신으로 가 모택동 및 주덕과 합류
▲1933년=강서성당위 서기. 모택동노선을 추종하다 당에서 추방당함(1차실각)
▲1934년=홍성지 총편집 자격으로 대장정참가
▲1940년=현재의 부인인 탁림과 3번째 결혼
▲1945∼49년=국공내전기간동안 유백승과 국민당군 공격, 장강도하작전등을 펼치는등 군사·정치경력 쌓음
▲1952년=정무원 부총리(당시 총리는 주은래)
▲1956년=8대서 중앙위원, 중앙정치국원 및 상무위원, 당총서기에 피선
▲1966년=6월 문혁시작, 8월 국가주석 유소기등과 함께 자본주의자로 몰려 이듬해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돼 강서성서 노동개조등으로 수난기 보냄(2차 실각)
▲1973년=주은래의 도움으로 국무원부총리로 복직, 정치국원직도 회복
▲1976년=청명절·주은래 추도 천안문 군중집회 배후조종자로 몰려 당·정·군 일체의 직위에서 해임(3차 실각)
▲1977년=4인방등이 제거된 후 당중앙공작회의에서 엽검영·이선념·화국봉·허세우의 도움으로 완전복권
▲1980년=화국봉을 당주석·총리직에서 몰아내고 총서기에 자신의 심복 호요방을 기용, 모택동 시대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자신의 체제 확립.
▲1987년=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호요방을 당총서기직에서 해임하고 조자양을 총서기로 기용, 이해 10월 당13전대 및 13기1중전회에서 자신도 중앙위원, 정치국원, 정치국 상무위원직을 사임했으나 당중앙군사위 주석직은 계속 보유.
▲1988년=이붕을 신임총리에 기용
▲1989년=천안문사태후 조자양 등 개혁파 지도자 대거 축출하고 강택민을 당총서기에 기용
▲1989년=13기5중전회에서 당중앙군사위주석직 사임
▲1990년=7기전인대 3차회의에서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직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남.
▲1991년 말∼1992년 2월=남순강화(남부지방 순시하며 행한 연설과 담화)로 개혁·개방의 심화확대를 역설
▲1993년=제8기 전인대회에서 강택민 총서기를 국가주석으로 선출
▲1997년 2월19일=93세로 사망
◎등소평 어록/“나의 죽음이 곧 중국혼의 상실은 아니다”/개혁·개방 전족 여인 걸음으론 못해/늙은이가 변소 혼자점령 안될말/검든 희든 쥐 잘 잡으면 좋은고양이
『개혁·개방은 대담하게 시도해야지 전족한 여인처럼 걸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본 것은 대담하게 시험하고 대담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92.1 남순강화에서)
『계획경제라 하면 사회주의고 시장경제라 하면 자본주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가지 다 수단입니다. 시장경제도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할 수 있습니다』(92.1 남순강화에서)
『국제정세는 세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 냉정하게 관찰하고 우리의 기반을 튼튼히 하며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급해서는 안됩니다』(89.9.4 당중앙 책임동지들과 회의중)
『중국문제에서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안정뿐입니다. 안정된 환경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얻은 성과도 잃게 됩니다』(89.2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회담중)
『어느날 내가 죽으면 중국은 마치 영혼을 잃게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일할수 있으며 정치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지기 바랍니다』(88.9)
『우리의 정치체제개혁의 최종 목표는 세가지입니다. 첫째 사회주의 제도를 공고화하고 둘째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을 발전시키며 마지막으로 사회주의적 민주를 발양하며 많은 인민들의 적극성을 동원하는 것입니다』(86.9.26 야루젤스키 폴란드 국가평의회의장과 회담중)
『우리의 경제개혁을 개괄하자면, 대내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개방하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개방으로 전인민의 적극성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85.8.1 네레레 탄자니아공화국 대통령과 회담중)
『늙은이는 좋지 않습니다. 오줌도 안나오는데 변소를 혼자서 점령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며 자릴 양보해야 합니다. 푸른 색은 쪽에서 나오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청출어람 청어람)란 말이 있습니다. 왜 우리라고 안됩니까』(63년)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식량생산을 늘리는 일입니다. 증산만 된다면 단간풍(개인경영의 농업)이라도 좋습니다. 흑묘(검은 고양이)든 백묘(흰고양이)든 쥐를 잡을 수 있다면 좋은 고양이입니다』(62 당중앙 서기처 회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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