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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117> ‘체면치레’


‘면은 세웠네.’ 조직을 이끌던 1등 부서가 겨우 평년작을 하거나, 위기 상황에서 가까스로 치명적인 사태를 모면했을 때 리더들이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위기가 그렇듯 문제의 원인은 조직 내부에 있습니다. 과거의 일하는 방식을 답습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거나,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만 가득하거나 하기 때문이죠. 그런 조직을 가리켜 우리는 ‘관료적’ 또는 ‘관성적’ 이라는 표현을 붙입니다. 변화와 혁신에 대해 매우 저항적이고 새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올라 치면 끌어내는 습성이 배어 있는 겁니다.

이런 조직 안에서는 누구 하나가 우수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체면 치레’ 하는 정도로 열심히 하고, 술자리나 모임 자리에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인화형’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훌륭한 조직원은 스스로 머슴을 자처하거나, 아니면 일부러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낭중지추가 되지 않도록 동료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평범한 사람, 또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조직을 가득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저 문제만 일으키지 않고, 정상적으로 일을 운영해 가면서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영혼과 열정이 없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얼마 전 컴퓨터와 인간의 상호작용(‘Computer and Human Interaction’)이라는 학회가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전 세계에서 컴퓨터 과학, 심리학,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모여 컴퓨터와 인간을 주제로 토론하는 컨퍼런스입니다. 이 학회를 주도하고 관리하는 지인 중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조직 안에서 분석하고 관찰하는 습관이 깊게 밴 나머지 지나치게 염세적(Pessimistic)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고, 외국인들은 아주 정밀하지 않은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도 즐겁고 확신에 찬 태도로 발표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인들 중 상당수가 자신이 하는 일에 별로 자신이 없고 흥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무엇인가 열심히 해도 인정하지 않는 문화, 결과의 평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피동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글로벌 경쟁 사회에서는 체면 치레라는 게 없습니다. 그냥 무엇인가를 독보적으로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극심한 불평등이 있을 뿐입니다.



중남미를 순방하고 돌아온 대통령이 홍보수석을 통해 몇 가지 의지를 발표했습니다. 부패 척결과 사정 뿐만 아니라 창조 경제와 문화 융성 등의 국정 과제를 흔들림 없이 수행해 나가겠다는 겁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고 타당한 지적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창의성과 문화는 사실 불평등에서 나옵니다. 훌륭한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가치를 보상해 주고, 노력하지 않은 이에게는 사회 안전망에서 벗어나지 않을 만큼만 대우하는 게 창의성(Creativity)의 본질입니다. 그렇다고 경쟁 질서로 가자, 완벽한 엘리트 중심 문화로 가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모두가 기본만큼만 하자고 주장하는 문화는 우리를 열패 의식으로 몰고 갈 뿐이라는 점 그리고 하향 평준화를 강요하는 상황일 수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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