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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생전 명칭은 영락태왕"

국제학술회의서 연구논문 발표<br>고구려사 다각도로 조명 예정

"광개토대왕의 생전의 정식 명칭은 '영락태왕'이었다." "광개토대왕 재위 당시 중국과 동북아시아에는 수많은 나라가 공존하고 있었고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문화적으로 아주 풍성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광개토대왕은 외교전략을 통해 고구려 전성기의 기초를 구축할 수 있었다."

광개토왕 서거 1,600주년을 맞아 16~17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국제학술회의에서 외국 학자들이 발표할 연구논문의 주요 내용이다. 중국ㆍ대만ㆍ일본 세 나라의 주요 학자들은 '고구려 광개토왕과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 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 광개토왕과 고구려사를 다각도로 조명할 예정이다.

중국 베이징대 중국고대사 연구중심(센터)의 뤄신(羅新) 교수는 '고구려 왕호제도(王號制度)에 관한 몇 가지 견해'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문헌자료와 광개토대왕비를 토대로 고구려의 왕호제도를 분석했다.

뤄 교수에 따르면 고구려 왕족과 지배층이 사용한 언어는 고대 만주-퉁구스어에 비교적 가까우며 알타이(Altaic)언어 범주에 속해 있거나 그와 인접해 있다. 뤄 교수는 "알타이 계통의 전통적인 정치명호(政治名號)는 이름(王名)과 칭호(官稱.title)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면서 고구려는 최고지도자를 알타이 계통에서 수령을 뜻하는 '가(aka/akan)'로 칭했고 후한(後漢) 중후기부터 중국식 명칭인 '왕'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또 광개토왕의 연호로 알려진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 생전의 왕명이었으며 태왕(太王)은 칭호였다고 주장했다. "광개토왕이 즉위할 때 '영락태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영락태왕'은 생전의 정식 칭호였다"는 것이다.



리밍런(李明仁) 대만 국립 자이(嘉義)대 교수는 광개토왕 재위 전후 당시의 국제정세를 '세력균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중국의 중원과 동북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병렬적으로 공존하고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문화적으로 풍성한 발전을 이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또 중원에 존재한 고구려 성씨들인 여(餘)·고(高)·왕(王)씨, 후연(後燕)과 북연(北燕) 등의 왕조에서 활약한 부여 왕자 여울(餘蔚), 고구려계 모용운(慕容雲ㆍ高雲) 등도 새롭게 조명했다.

이노우에 아오키(井上直樹) 일본 교토부립대 교수는 '광개토왕의 대외관계와 영락 5년 대거란전(對契丹戰)'이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대거란전을 중심으로 광개토왕의 대외전략을 살펴봤다. 그는 광개토왕이 거란의 한 갈래인 패려(稗麗)와 전쟁을 벌인 것은 남방 세력인 백제 등과의 전투에 앞서 배후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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