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한 정유사의 외환 딜링룸. 최근 5거래일 동안 줄곧 오름세를 타고 있는 원ㆍ달러 환율이 이날마저 28원이나 상승하자 외환딜러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모니터만 응시했다. 한 직원은 장 마감 직후 "이거 조마조마해서 살겠느냐"면서 "이런 식으로 변동세가 지속될 경우 헤지니 대응이니 하는 말조차도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푸념했다. 이날 원ㆍ달러 환율이 6거래일 연속 급등하면서 두달여 만에 1,450원대로 진입하자 기업들의 환위험 관리에 또다시 비상이 걸렸다. 기업들은 지난해 가을 이후 계속 오르는 환율에 대응하느라 고생했지만 최근에는 변동폭에 대응하느라 더욱 쩔쩔매는 모습이다. 하지만 자동차ㆍ전자 등 대표적 수출업종은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특히 원ㆍ엔 환율의 급등으로 일본 제품과의 수출경쟁에서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정유ㆍ항공업계 직격탄=원유 도입을 위해 통상 3개월짜리 유전스를 이용하는 정유업계는 최근 원ㆍ달러 환율이 급등세로 돌아서자 "지난해보다 더 큰 악몽이 현실화되고 있다"며 고심하고 있다. SK에너지의 경우 유전스, 장단기 차입금을 포함해 40억달러 규모의 외화부채를 안고 있다. 이중 10억달러가량은 헤지를 해뒀지만 나머지 30억달러는 환위험에 그대로 노출된 상태. 때문에 단순 계산으로도 원ㆍ달러 환율이 1원 변동하면 30억원의 환차손 또는 환차익이 발생하는 구조다. 정유업계 전체가 안고 있는 외화부채는 대략 80억달러 정도다. SK에너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초 1,500원 가까이 올랐다가 연말 1,300원 아래로 떨어졌었고 현재는 연초에 비해 또다시 10%가 올랐다"면서 "이 같은 변동장세에서 과연 누가 적정수준의 헤지를 결정할 수 있겠느냐"고 곤혹스러워 했다. GS칼텍스의 한 관계자는 "경영에는 환율의 변동폭이 줄어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급변동은 곧 불확실성이므로 현재는 경영환경이 몹시 불안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항공업계도 마찬가지다. 달러화 부채 비율이 크고 항공유 대금을 달러로 결제하는 경우가 많아 환변동에 민감하다. 업계에 따르면 대한항공의 경우에만 원ㆍ달러 환율 1원 변동에 20억원이 왔다 갔다 할 정도다. 항공업계의 한 관계자는 "환율 변동폭이 크면 항공사 경영이 어려워지는 것은 상식"이라면서 "무엇보다도 환율 변동폭이 줄어들어야 계획을 세우고 경영을 펼칠 수 있다"고 난감해 했다. ◇석유화학ㆍ철강ㆍ시멘트도 고민=기초원료인 나프타를 절반 이상 해외에서 도입하는 석유화학업종도 최근 급변하는 환율에 대응하느라 고민이다. 유화업종은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해외에 수출해 자체적인 헤징 기능이 있지만 최근 같은 변동세에서는 원료도입 및 수출을 포함한 영업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유화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런 식이라면 제품고급화, 수출비중 확대, 에너지비용 절감 등 어려운 경영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멘트업종도 생산의 주연료로 쓰이는 유연탄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환율이 급변함에 따라 생산단가가 춤을 추고 있다. 철광석ㆍ고철 등 원자재와 유연탄을 수입하는 철강업계도 마찬가지다. 시멘트업계의 한 관계자는 "제품의 특성상 가격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없어 환위험이 곧바로 경영실적에 반영된다"면서 "최근 급락한 건설경기와 함께 환변동이 이중고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자동차ㆍ전자는 '표정 관리'=대표적인 수출업종인 자동차 분야는 최근 원화가치가 급락하면서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현대ㆍ기아차는 지난해 환율 효과로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고 올해 예상한 평균 원ㆍ달러 환율 1,100원에 비해 최근 환율이 20% 이상 상회하자 '불경기 속 그나마 다행'이라는 분위기다. 현대차의 한 관계자는 "원ㆍ달러뿐만 아니라 원ㆍ엔 환율도 급등해 일본차와의 수출경쟁에서도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대ㆍ기아차 측은 원화가치가 10원 떨어질 때마다 매출은 현대차가 1,200억원, 기아차가 800억원 정도 늘어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전자업계도 마찬가지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환율이 10원 상승하면 연간 영업이익이 700억원 개선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엔고 현상으로 경쟁사인 소니 등 일본 전자업계가 고전하고 있어 국내 전자업계는 더욱 유리해졌다. 일본 업계에서는 엔ㆍ달러 환율이 1엔 변동할 때 연간 영업이익이 400억엔(약 6,000억원)씩 변동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업계도 환율 급변동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최근 "환율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면서 "환율 거품이 꺼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편 중소 무역업계는 최근의 환율 급등이 큰 도움은 안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의 한 관계자는 "한국 제조업은 대부분의 원자재와 부품 소재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환율 급등이 당장의 유리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면서 "중소기업들이 환변동에 대응하느라 핵심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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