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항생제 안듣는 슈퍼박테리아 '박테리오파지'가 박멸시킬까

박테리오파지가 병원성 세균을 공격하고 있다. 포크처럼 생긴 단백질로 세균 표면에 들러붙은 후 용해 효소를 방출해 세균의 세포벽을 괴멸시킨다.

항생제 사용이 확대되면서 약물에 내성이 생긴 병원성 세균도 늘어나고 있다. 항생제로 사멸시킬 수 없는 이들 세균은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의학계에서는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를 해법으로 꼽는다.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을 숙주로 삼아 증식하는 바이러스로 증식과정에서 세균을 괴멸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특히 세균 외의 인체 세포는 공격하지 않아 위해성도 거의 없다. 과연 박테리오파지가 차세대 천연 항생제로서 기존 항생제를 무력화시키는 슈퍼박테리아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지난 2004년 한 환자가 미국 텍사스주 러벅에 위치한 환부치료센터(WCC)를 찾았다. 당시 그의 다리는 괴사가 일어나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WCC 센터장인 랜디 월코트 박사의 검사 결과 포도상구균 감염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세균이 피부조직을 먹어치우고 있었던 것. '세균 먹는 바이러스' 1915년 발견 한때 천연항생제 사용
"인체 유해 돌연변이 우려" FDA등 규제로 연구 본격화 안돼
초음파치료기 개발·세포벽 용해 효소 연구 등 최근 재조명
이렇게 원인이 확인됐지만 치료는 쉽지 않았다. 감염된 포도상구균이 항생제에 내성을 갖고 있어 그 어떤 항생제도 약효를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개월간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괴사는 계속 진행됐으며 다리 절단 외에는 환자를 살릴 방법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3주 후 환자는 자신의 두발로 WCC를 걸어나갔다. 괴사는 멈췄으며 환부에는 새살이 돋았다. 매년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항생제 내성 세균에 감염돼 숨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례는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과연 무엇이 이 기적을 일으켰을까. 월코트 박사가 찾아낸 신비의 치료제는 바로 ‘박테리오파지’였다. 세균을 먹고 사는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는 영국의 세균학자 프레더릭 트워트와 프랑스의 펠릭스 데렐이 각각 1915년과 1917년에 독립적으로 발견한 바이러스다. 일반적으로 바이러스는 세포를 숙주로 한다. 크기는 세균, 즉 박테리아의 500~600분의1 정도다. 세균이 수박이라면 바이러스는 좁쌀만 하다고 할 수 있다. 박테리오파지가 보통의 바이러스와 다른 점은 오직 세균만을 먹이로 삼아 증식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분비되는 효소가 세균의 세포벽을 용해시켜 사멸에 이르게 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을 잡아먹는 살균 바이러스인 것이다. 이 같은 살균능력에 힘입어 박테리오파지는 1920년대부터 천연 항생제로 널리 쓰였다. 하지만 전성시대는 길지 않았다. 1940년대 초반 항생제인 페니실린이 대량 보급되면서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박테리오파지 요법의 시술이 복잡하다는 것도 퇴출을 앞당긴 요인이 됐다. 각 세균마다 치료제가 되는 박테리오파지의 종류가 달라지는데 하나의 환부에만 100여종 이상의 세균이 서식할 수 있어 환자별로 세균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에 맞춤화된 박테리오파지를 찾아 혼합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 현재 박테리오파지를 치료제로 쓰는 곳은 의료시설이 열악한 일부 동유럽 국가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듯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박테리오파지가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박테리오파지가 인류의 과도한 항생제 사용에 따른 결과물인 항생제 내성 세균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줄 최적의 치료제라는 이유에서다. 이는 기존 항생제와 달리 세균들이 결코 내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 기인한다. 실제 박테리오파지는 그 자체가 생명체여서 자신의 먹잇감인 세균을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진화한다. 세균이 박테리오파지에 내성을 갖게 되면 그것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아 스스로 변화하는 것. 이 때문에 더 강한 항생제를 개발하지 않고도 항생제 내성 세균에 대응할 수 있다. 법적 규제로 인한 연구의 한계 이 같은 박테리오파지의 효과는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박테리오파지 연구의 메카로 불리는 그루지야의 게오르그엘리아바연구소에서만 1923년부터 지금까지 수백만명의 난치성 세균 감염 환자들을 완치시켰으며 이에 대한 100편 이상의 논문이 국제학회에 발표됐다. 여타 동유럽 국가 의학자들이 발표한 연구논문에서도 박테리오파지 요법은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황색 포도상구균, 대장균 등의 세균 감염 환자를 80~90% 완치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에는 영국의 생명공학기업 바이오컨트롤이 항생제 내성 녹농균에 감염된 환자들을 대상으로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시행했는데 실험 대상자 중 50%의 증세가 호전됐다. 이는 일반적인 치료법을 제공 받은 환자들의 증세 호전비율 20%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치다. 이것만 보면 지금 당장 박테리오파지를 항생제 내성 세균의 치료에 투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아직도 박테리오파지 연구는 본격화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을 위시한 각국의 규제기관들이 의약품으로서 박테리오파지의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해 임상실험 승인조차 쉽게 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박테리오파지의 진화를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진화과정에서 자칫 인체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돌연변이 출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대형 제약사들이 박테리오파지의 효용성에 주목하면서도 연구개발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것도 이 같은 현실적 한계에 기인한다. 박테리오파지 초음파 치료기 물론 박테리오파지 옹호론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FDA의 우려는 기우라고 말한다. 박테리오파지는 평범한 물 한 방울에 5,000만마리가 들어 있고 인체 내에도 수십억마리가 살고 있을 만큼 흔한 바이러스지만 지금껏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체에 위해를 가한 사례가 단 1건도 없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 특히 월코트 박사는 박테리오파지가 2006년 FDA의 승인을 얻어 햄버거 패티, 코울슬로 등 인스턴트 식품의 세균 오염 방지용 첨가물로 이미 활용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동일한 물질을 놓고 식품첨가물로는 안전하지만 의약품으로 쓰면 위험하다는 FDA의 발상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FDA의 맹점을 파고든 끝에 월코트 박사는 2년 전 공식적인 박테리오파지 연구의 첫발을 내디뎠다. 박테리오파지 혼합물에 대한 식품첨가물 사용을 허가 받은 미국 생명공학기업 인트라리틱스와 연합해 이 회사가 사전연구를 마친 8종의 박테리오파지에 한해 FDA의 임상실험 승인을 받아낸 것. 세균 감염성 다리 궤양 환자 39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실험에서 연구팀은 치료제로서 박테리오파지의 안전성을 확인했다. 실험기간 중 심각한 부작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연구팀은 현재 100~20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효능분석에 초점을 맞춘 2단계 임상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휴대형 박테리오파지 초음파치료기 개발도 완료했다. 이 초음파치료기는 식염수와 혼합한 박테리오파지를 살포하는 동시에 초음파를 발사해 괴사된 조직을 제거함으로써 박테리오파지가 환부 깊숙이 침투하도록 도와준다. 박테리오파지 효소에 대한 연구 박테리오파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에는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이를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미국 록펠러대학의 생물학자 빈센트 피셰티 박사의 박테리오파지 효소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는 박테리오파지 자체를 치료제로 쓰는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박테리오파지로부터 세균의 세포벽을 용해시키는 효소를 추출해 항생제를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박테리오파지가 지닌 살균 능력의 토대가 세포벽 용해 효소에 있다면 이 효소만으로도 훌륭한 항생제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피셰티 박사는 이미 다양한 박테리오파지 연구를 통해 리신(lysine)이라는 세포벽 용해 효소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이를 추출ㆍ배양해 약품으로 만드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박테리오파지와 관련한 비합리적 규제를 피해가면서도 많은 환자들이 박테리오파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다만 리신은 효능 측면에서 박테리오파지 자체보다 떨어진다는 게 과제다. 이처럼 박테리오파지가 차세대 항생제로서 현실 무대에 데뷔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크고 작은 장벽이 산재해 있다. FDA가 입장을 선회하지 않는 한 관련 연구가 가속화될 여지도 크지 않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 연구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박테리오파지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