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한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은 동원증권 사장에서 옛 주택은행장에 취임한 직후 "장부상 흑자는 의미가 없다. 수천억원의 적자를 내더라도 부실 자산을 떨어내겠다"고 깜짝 선언했다.
김 전 행장의 말처럼 주택은행은 그해 1998년 5,218억원의 대손충당금을 쌓으며 2,913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하지만 월급은 1원을 받는 대신 주택은행 40만주를 스톡옵션으로 받겠다는 파격 행보에서 볼 수 있듯 김 전 행장은 자신감이 있었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의도적인 적자는 해외투자가들의 신뢰를 얻어 주택은행을 매수 1순위 종목으로 탈바꿈시켰다. 주가는 은행주 가운데 가장 높은 가격대를 기록했다.
탄력을 받은 김 전 행장은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대형 시중은행인 ING베어링과의 전략적 제휴마저 성사시켰다. ING와의 협상을 통해 국민·주택은행이 합병해도 제휴를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끌어냈고 통합 이후 1주당 4만원이던 주가를 재임 기간 중 9만원까지 끌어올렸다.
김 전 행장은 통합 국민은행 총자산이 200조원대로 커지자 해외 진출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는 중국 현지인을 채용해 중국 본토인을 대상으로 한 영업을 구상하고 대만·싱가포르계 은행과의 제휴로 씨티은행과 같은 현지 은행을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 내정자는 자타가 인정하는 '김정태의 사람'이었다. 윤 내정자는 삼일회계법인 부대표로 있던 지난 2002년 통합 국민은행호가 출범할 당시 김 전 행장으로부터 삼고초려로 국민은행에 합류한 인물이다. 그 누구보다 '장사꾼' 김 전 행장의 리더십과 성공담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는 얘기다. 심지어 정통 KB맨이 아니라는 점도 유사하다. 김 전 행장은 증권업에서, 윤 내정자는 회계업에서 잔뼈가 굵은 인재다. 당시 KB 안팎에서는 윤 내정자를 스스럼없이 '포스트 김정태'라 불렀다.
KB 안팎에서는 윤 내정자가 선배(김 전 행장)와 유사한 경영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조심스럽게 내다보고 있다.
윤 내정자는 우선 국민은행 영업망 회복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윤 내정자가 회장과 행장을 당분간(최소 1∼2년) 겸임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도 조직 안정과 영업망 회복을 위해 본인이 몸소 뛰겠다는 의지의 일환이다.
하지만 중장기 차원에서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 첫 비전은 김정태 전 행장이 꿈꿨던 '글로벌 톱 50'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2금융권 강화를 통한 그룹 포트폴리오의 다변화를 집중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관측된다. 그룹 내 은행의 비중이 여전히 80%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시장 충격에도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은 LIG손해보험 인수가 급하다. KB금융은 당장 LIG손보 인수 승인이 늦어질수록 28일부터 하루 1억원이 넘는 이자를 물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금융위원회가 "KB지배 구조나 경영능력으로 LIG손보를 인수할 수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며 KB금융의 빠른 인수를 꺼려 하는 분위기이지만 결국은 승인할 가능성이 높다.
LIG 인수가 기왕에 추진되던 일이라면 미래 성장산업으로 꼽히는 생명보험산업을 어떻게 키울지도 주목된다.
그룹 안팎에서는 좀처럼 시너지를 내지 못하는 KB생명을 키우기 위해 생보사 인수 작업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계 관계자는 "규모의 경쟁 없이는 시장에 반향을 일으키기 어렵다"고 전망한다. KB생명의 3·4분기 총자산 7조5,534억원, 당기순이익은 60억원이다. 자산 규모만 KB캐피탈(3조8,146억원)의 두 배에 달하지만 당기순이익은 28%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다. 현재 시장에는 KDB생명·동양생명·ING생명 등이 매물로 나와 있다.
매각 작업이 진행 중인 우리은행 인수와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는 해외사업 확장을 위한 해외 은행 인수합병(M&A)도 예상되는 시나리오 중 하나다. 김 전 행장 때부터 소매금융으로 특화됐던 KB가 질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은행 및 해외 은행 인수는 필요한 작업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소매금융으로 특화된 KB금융이 우리은행을 인수하면 기업 금융에서 균형 있는 포트폴리오를 세울 수 있다는 평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우리은행 매각 작업이 불발돼 추후 다시 추진될 경우 KB는 가장 강력한 인수 후보가 될 것으로 보인다.
KB금융 내부에서는 '조직문화 대수술 작업' 또한 선행돼야 할 필수 과제라고 설명한다. 회장·행장 겸임이 확실시되면서 사장직 부활은 필수 과제다. 윤 내정자의 과제 중 하나로 후계자 양성과 지배 구조 개편을 꼽는 만큼 어떤 인물이 차기 사장직에 자리하는지도 관심거리다. 아울러 김 전 행장은 2002년 6단계(행원-계장-대리-과장-차장-부점장)의 직급체계를 현재의 L1~L4 4단계로 축소하고 본부 조직을 절반으로 줄이는 내용의 조직 개편을 실시한 바 있는데 윤 내정자 또한 유사한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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