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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탄생 100년] <1부> 시대가 제2, 제3의 정주영을 부른다 <3> 밖에서 벌어 안을 살 찌운다

한국 車산업 지켜낸 美대사와의 비밀담판

"조립생산 지원할테니 독자개발 포기하라"

美 회유·압박에도 '고유모델' 뜻 안굽혀

"처음부터 목표는 세계"… 건설·車·조선서만 5,000억弗 벌어들여


정주영(오른쪽)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 1978년 ''사상 최대 규모 항만공사''로 손꼽히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정주영은 1965년 국내 건설업의 첫 해외진출을 이끌었고 1975년에는 중동에 뛰어들어 건설붐을 일으키며 막대한 오일달러를 벌어들여 우리 경제가 1차 오일쇼크를 극복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사진제공=현대차

오일쇼크로 나라곳간 텅빈 1975년

박정희 대통령 "중동 가보라" 한마디에 주위 반대에도 건설 진출 밀어붙여

'해외서 돈벌어 경제살린다' 사명감… 정부 수출주도 성장과 맞아 떨어져

그의 정신 이을 기업인 지금 어디에…


"정 회장님,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자동차 독자개발을 포기하십시오." 1975년 5월 어느 날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가 완곡한 어조로 정주영 회장에게 말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한국에서는 독자개발이 불가능합니다. 내수 시장도 작고 기술도 없지 않습니까."

스나이더 대사는 솔깃한 제안도 했다. " 독자 모델을 포기한다면 모든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현대가 미국 회사를 선택하기만 하면 유리한 조건으로 조립생산을 지원하겠습니다. 해외수출로 일본도 제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동 건설시장도 측면 지원하겠습니다."

회유와 함께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현대가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으름장까지 놓는 스나이더 대사에게 아산 정주영은 정중하면서도 분명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훗날 아산의 회고. "외국 자동차 조립생산은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속 빈 강정이야.…이것저것 빼면 인건비만 떨어지는 장사지. 장래성이 없어." 정 회장이 고유 모델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은 미국과의 비밀담판은 한국 자동차 산업사의 보이지 않는 분기점이다. 미국의 뜻에 따랐다면 하청생산기지에 머물렀을 수 있다. 우리 고유의 물품을 바깥에 팔아 안을 살찌운다는 정주영의 경영철학이 배에 있는 공업 제품. 그것이 바로 한국산 자동차다.

1975년 여름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을 불렀다. 박 대통령은 대뜸 "중동에 가보라"고 했다. 4차 중동전쟁(1973)으로 촉발된 '오일쇼크'로 돈이 몰리는 아랍 산유국 건설시장에 진출하라는 얘기였다.

기업인에게 좋은 사업기회를 말하는 박 대통령의 속내는 타들어가고 있었다. 국가부도의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 치솟는 유가로 나라 곳간이 비었던 것이다. 1974년 말 외환보유액은 달랑 3,000만달러였다.

박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정주영은 바로 중동 건설시장에 뛰어들었다. '사업규모와 리스크가 너무 커 회사를 망칠 수 있다'는 동생 정인영의 강력한 반대도 무릅썼다.

정주영은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해외에서 돈을 벌어 국민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남달랐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중동에 물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차로 길어오면 되고 더워서 일을 못 한다는데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되지. 건설에 필요한 자갈과 모래는 널렸어. 더욱이 우리나라는 석유파동으로 외화가 바닥나 부도 직전에 있어. 외화를 벌어들일 돌파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해."



정주영, 그의 눈은 항상 더 큰 시장을 바라봤다.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한국 조선의 전통을 강조하며 국제금융을 일으켜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를 지을 때나 독자 자동차 개발을 추진할 때나 내수가 목표는 아니었다.

시작부터 그랬다. 현대건설은 1950년 6·25전쟁 때 미군의 '달러'로 컸다. 정주영은 미군 공병대 중위의 통역을 했던 동생 정인영과 함께 미군을 쫓아다니면서 건설사업을 도맡았다. 외부에서 돈을 벌어오는 구조였던 셈이다.

막사설치 작업을 비롯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묵을 숙소 개선, 유엔군 묘지 단장사업까지 미군 관련 공사는 정주영 형제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전후에도 주한미군으로부터 인천 제1도크 공사와 오산비행장 활주로 포장공사를 맡아 회사를 키울 수 있었다.

개발연대에 기업을 일으킨 창업 1세대 기업인 가운데서도 정주영이 빛나는 이유는 바로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운다'는 경영철학을 평생 지켰다는 점이다. 1982년 1월5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연두 기자회견장.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전경련 국제담당 상무로 정주영 회장을 보좌했던 박정웅 메이텍인터내셔널 대표의 회고다. 정 회장은 기자들에게 전자산업 진출 의향을 밝혔다. 아산의 생각은 단순 명료했다. "내가 전자공업을 한다고 해도 국내 시장이 목표가 아니고 해외 시장이 목표란 말이오."

정부와 유착한다는 비판도 듣기 싫었던 것 같다. 오롯이 내 능력으로 해낸다는 얘기다. 정부로부터 기업을 인수해 덩치를 키우는 경영방식을 아산은 극도로 혐오했다. "내가 중동에 진출한 이유 중 하나는 걸핏하면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였어요. 자동차도 조선도 처음부터 목표가 세계였습니다."

수출주도형 성장 방식을 택한 정부 정책과 정 회장의 일하는 방식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정 회장이 키워낸 건설과 자동차·조선은 없어서는 안 될 수출 주력산업이다.

현대건설부터 보자. 1965년 국내 건설사로는 처음으로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해 해외로 나간 현대건설은 지난해까지 누적 해외 수주액이 1,155억달러에 이른다. 고비 때마다 정주영이 있었다.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0세기 최대 공사로 불리는 9억3,000만달러 규모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해 '중동 신화'을 일으켰다. 수주금액은 당시 우리나라 정부 예산의 4분의1에 이르렀다.

자동차도 정주영이 씨를 뿌렸다. 자동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정주영은 미국의 끈질긴 압력과 회유에도 독자모델 개발을 고수했다. 결과는 어떤가. 현대차만 해도 1976년 첫 수출모델인 포니부터 지금까지 총 2,177만대를 수출했다. 금액으로는 약 2,3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1961년 23억6,000만달러에 불과했던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이 1조1,296억 달러(2012년)까지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수출전략이 주효했다. 정주영 같은 기업인과 정부, 근면한 국민이 삼위일체를 이뤄 이룬 성과지만 돗자리를 펴준다고 해서 누구나 정주영처럼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는 건설·자동차·조선 3대 분야에서만도 최소 5,000억달러 이상을 벌어온 기업이다.

정주영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정주영이 심고 가꿔온 수출기업들이 없었으면 1997년의 외환위기도,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도 극복하기 힘들었지 모른다. 그래서 제2, 제3의 정주영이 더욱 아쉽다. 아산 정주영은 1973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한 국산 포니 자동차를 개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10년 뒤면 현대차의 반장급은 마이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현대가 시장을 만들어갈 것이다."

당시 누구도 이를 믿지 않았으나 시간만 1980년대 후반으로 늦춰졌을 뿐 그의 호언장담은 실현되고 말았다. 수출이 늘어도 낙수효과가 갈수록 떨어지고 서민생활은 고달파지는 오늘날의 현실은 새로운 정주영을 갈망한다. 새로운 아이템으로 수출보국과 일자리 창출을 이룰 수 있는 기업인은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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