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3.6%로 당초 예상치를 크게 밑돌았고 지난 2010년(6.2%)에 비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더구나 1월 무역수지는 20억달러 가까운 적자를 냈고 유럽의 경제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수출은 제한적인 성장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어두운 전망도 많다. 국내 경제에는 비상등이 커졌고 펀더멘털(기초체력)도 그만큼 나빠질 수 있다는 얘기인데 당연히 뒤따르는 수순은 원화가치 하락(환율상승)이다.
그런데 원화는 도리어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원ㆍ달러 환율은 지난해 말 1,159원으로 마감한 뒤 새해 들어서는 딱 7차례 오르는 데 그쳤다. 2일 현재 원ㆍ달러 환율은 지난해 말보다 41원20전이나 떨어졌다. 외국인의 자금유입이 늘어나고 있는 게 주된 이유다. 그렇다면 외국인들은 도대체 왜 원화를 찾는 것일까.
①달러캐리ㆍ유로캐리 동시 진행
원화강세는 무엇보다도 풍부한 글로벌 자금의 영향이 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새해 첫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현재의 초저금리 기조를 1년 연장한 오는 2014년 말까지 유지한 데 이어 3차 양적완화 가능성을 내비쳤다. FRB의 발표 이후 달러화에 투자됐던 자금들의 이동이 더 빨라지고 있고 자연스럽게 달러화 가치는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지난해 12월 4,890억유로를 낮은 금리로 유럽의 은행들에 대출한 데 이어 이달 말부터 2차 장기대출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로 했다. 글로벌 시장의 풍부한 자금들이 한국이나 신흥국가로 몰리는 것인데, '달러캐리'와 '유로캐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②둔감해진 안전자산 선호도
글로벌 자금의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약해진 것도 이유다. 미국의 기업실적이 제한적이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고 유럽 일부 국가들이 국채발행에 성공하면서 위기감을 떨어뜨리면서 경기 상황에 이제 둔감해진 결과다. 안전자산 선호도가 낮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풍부한 글로벌 유동자금은 저평가돼 높은 수익률을 안길 수 있는 원화와 신흥국 통화 등으로 투자의 방향을 틀고 있다. 윤세민 부산은행 외환딜러는 "FRB의 조치로 글로벌 달러의 가치가 꺾이고 있는데다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도도 떨어져 상대적으로 위험자산으로 여겨지는 유로화나 신흥국 금융시장이 각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③강해진 원화의 체력
글로벌 금융시장의 작은 이슈에도 변동폭이 극심했던 원화의 체력이 강해진 것도 외국자금을 끌어들이는 요인이다. 실제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원화가치는 달러당 1,151원80전으로 한 해 전보다 17원(1.5%) 떨어지는 데 그쳤다. 원화 변동성도 상당히 줄었다. 2010년 달러당 원화가치의 전일 대비 평균 변동률은 0.6%로 주요20개국(G20) 15개 통화 중 네 번째로 높았지만 지난해에는 0.51%로 8위를 기록했다. 유로화(0.55%)보다도 변동률이 낮았다. 비교적 경제의 기초여건이 양호한 가운데 자본유출입 변동 완화방안 도입, 일본·중국과의 통화스와프 규모 확대 등으로 외부 충격에 대한 대응능력이 높아진 탓이다.
④상대적으로 나은 한국경제 펀더멘털
글로벌 경기침체로 수출이 둔화되고 소비와 설비투자가 감소하는 등 좋지 않은 신호는 많지만 한국경제는 그래도 미국이나 유로존 등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펀더멘털이 양호하다. 더구나 주식시장은 물론 채권시장에서의 환금성이 높아 외국 투자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시장이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1월 무역수지는 계절적인 요인으로 적자를 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흑자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상대적으로 펀더멘털이 양호한 우리 자본시장으로 외국인 자금 유입이 지속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⑤부각된 원화의 안정성
원화의 안정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투자를 해도 원금까지 까먹을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얘기다. 이는 원화채권의 수요가 꾸준한 데서 나타난다. 지난해 외국인이 보유한 국채 잔액이 61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 외국인의 국채 보유 비중은 15.6%로 2010년에 비해 2.3%포인트 늘었고 외국인의 원화채권 매수행렬은 1월에도 이어졌다. 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외국인의 원화채권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원화를 바라보는 외국 투자가의 시각이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정부정책이 물가에 초점을 맞추면서 환율하락을 용인하지 않겠느냐는 시장의 기대감도 작용하고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