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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한반도 안정역할”
입력2003-09-18 00:00:00
수정
2003.09.18 00:00:00
빌 클린턴 2기 정부에서 미 외교정책을 지휘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66) 전 국무장관의 회고록 `마담 세크리터리(Madame Secretary)`가 16일 발매됐다. 회고록에는 체코 이민자의 딸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국무장관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적 삶과 외교 일선을 누빌 당시의 외교비화 등이 담겨 있다.
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했던 그녀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두 차례 만나 나눈 대화와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의 일화 등을 `은둔자의 왕국에서`편에서 소개했다. 전체 526쪽 중 18쪽 분량의 북한 관련 부분을 간추린다.
북미 정상회담 불발 2000년 10월 북한 군부의 2인자인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요청한 김 위원장의 친서를 들고 와 확답을 얻으려고 했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나를 먼저 보내 방문 준비를 하도록 하겠다고 제안하자 조 차수는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함께 온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맹국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김 위원장이 그 방문을 성공적으로 만들기를 원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의회와 전문가 그룹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과의 거래가 국가미사일방어(WMD) 구축 명분을 약화하고, 북한의 악한 지도자를 합법화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 정상회담에 반대했다.
대선 후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는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과 하는 정상회담을 반대할지를 묻자 “그것은 빌 클린턴의 결정이었으며 우리는 한번에 한 명의 최고 행정책임자를 갖는다”고 대답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중동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고민하던 클린턴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미국 방문을 요청했으나 북한측은 국제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이 급박한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외화 때문에 수출, 보상하면 중단” 김 위원장은 평양을 방문한 나에게 “평화적인 통신위성을 발사하기 위해 미사일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나 다른 나라가 그 위성을 북한을 위해 궤도에 올려주는 데 동의한다면 미사일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외화가 절박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시리아와 이란에 미사일을 판매하고 있지만 당신이 보상을 보장해준다면 그것은 중단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내가 북한의 미사일 개발 의도를 거듭 우려하자 김 위원장은 “그것은 외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 주체 프로그램의 일부로 우리 군을 무장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군은 한국의 능력을 우려하지만 한국이 사거리 500㎞의 미사일을 개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우리도 안 할 것”이라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또 “소련의 붕괴, 중국의 개방으로 두 나라와 북한의 군사동맹이 사라졌다”면서 “북한 군은 장비를 현대화하기를 원하지만 만일 충돌이 없다면 무기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즉석에서 의사 결정 평양 방문 이틀째 김 위원장을 만나 북한대표들에게 미사일 문제에 대한 질문 목록을 준 사실을 상기하며 오늘까지 그들이 답을 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은 목록을 달라고 하더니 옆의 전문가들과 상의도 없이 즉석에서 답을 주어 놀랐다.
수출 금지가 새 계약뿐 아니라 기존의 계약에도 적용되는지, 금지 대상에는 미사일 관련 물질, 훈련, 기술을 포함하는지, 미사일수출통제체제(MTCR)에 가입할 의사가 있는지 등의 질문이었는데 차례로 `예스`라고 답했다.
태국식 개방 원해 북한의 개방 의향에 대해 묻자 김 위원장은 `개방`의 개념을 반문한 뒤 “우리는 전통을 유지하는 데 해가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서구식 개방을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시장경제와 사회주의가 혼합된 중국식 개방에는 관심이 없다”며 그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스웨덴 모델`을 꺼냈다. 김 위원장은 “전통적 왕권이 강력하게 유지되면서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을 유지하고 경제도 발전시켜온 태국 모델에 깊은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주한 미군은 한반도 안정 역할” 김 위원장은 주한미군에 대해 “냉전 이후 우리의 입장이 달라졌다. 미군은 이제 안정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것인가를 두고 군부 내 견해가 50 대 50으로 갈려 있으며, 우리의 대화에 대한 나의 결정조차도 반대한 외교부 관리들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협상 후 경기장에서 미사일 카드섹션을 관람할 때 김 위원장은 직접 1998년 발사(대포동)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에게 우리가 한 모든 대화를 공개해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제 3국과 관련해 미묘한 것 빼고는 모두 해도 좋다고 응했다.
“더 많은 주민들이 영어를 배웠으면”김 위원장이 자신의 통역사를 통해 통역 수준이 김대중 대통령의 통역사와 비교해 어떠냐고 물어와 “김 대통령의 통역사는 최고수준이며 김 위원장의 통역사도 마찬가지”라고 답하자 환한 표정을 지었다.
김 위원장은 “더 많은 주민들이 영어를 사용하기를 바라며, 재미동포(코리안 아메리칸)들이 북한에 와서 영어를 가르쳤으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비즈니스 하듯 다뤄야 북한 방문을 끝내고 생각해보니 김 위원장은 무엇보다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라는 최고의 지렛대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조건이 충족되기 전에 북한의 관계 정상화 요구를 들어줘서는 안 된다. 미국이 김 위원장과 직접 대화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고 비즈니스 하듯 접근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 조지 타운대 교수였던 1986년 서울을 방문, 가택연금 중인 김대중씨를 만났다. 당시 김씨는 붓글씨로“어떤 목표라도 현실적으로 접근하면 이룰 수 있다”는 뜻의 글을 써 주었는데 그가 1998년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그 액자를 들고가 서명을 받았다.
대통령이 된 그를 만났을 때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나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처럼 감옥에서 대통령직까지, 불가능할 것 같은 여행을 한 사람들과 같다고 생각했다.
2002년 11월 민간인 신분으로 다시 청와대를 찾았을 당시 김 대통령은 “많은 사람들이 햇볕정책을 실패로 보는 데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며 “모든 것이 그렇게 빨리 변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기반을 놓았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과 얘기하면서 역사는 시간을 대통령의 임기처럼 4년의 단위로 쪼개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역사는 계속해서 흐른다. 이번에는 역사가 북한을 테스트했던 우리의 노력을 쓸어가고, 김대중씨가 꿈을 실현하는 것을 막으면서 흐른다. 내가 떠나기 위해 일어나자 김 대통령은 팔을 뻗었고, 우리는 포옹했다.
<워싱턴=김승일 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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