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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2월22일 오전11시 종현성당(현 명동성당) 앞.
일본 순사들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젊은 청년 한 명이 인력거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를 제지하는 차부를 한칼에 절명시킨 후 그 청년은 인력거 안에 타고 있던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을 수차례 공격했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청년은 안창호의 공립협회 소속으로 미국에서 귀국한 23세의 이재명이었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2개월 후였다.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에 공격을 당한 이완용은 명동성당 건너편의 자택으로 급히 옮겨졌다. 폐 등 여러 곳에 치명상을 입은 이완용을 살린 사람은 비서 백정우지조(白井友之助)였다. 백정이 응급조치를 한 후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대수술을 받은 이완용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 공로를 인정받은 백정은 이듬해 경술국치 후 조선황실 사무를 담당하던 궁내부(宮內府)가 이왕직(李王職)으로 개편되자 이완용백작가(伯爵家)의 이사로 부임했다. 순종이 즉위한 후 순정효황후가 20세를 넘자 총독부는 백정에게 황후의 영어 개인교습도 맡겼다. 이렇게 백정은 이완용과 총독부, 황실 등에서 큰 신임을 얻었다.
총독부에서 잘 나가던 백정이 관직을 물러나 증권시장에 뛰어든 것은 그가 41세이던 1920년 7월이다. 백정은 취인소 근처인 황금정(현 을지로) 2정목 199번지에 백정증권취인점을 개업했다. 당시 미두중매점이나 주식취인점은 대표자의 이름으로 인가를 받았다. 대판사립상업학교 출신으로 이재에 밝았던 백정은 개업 초기부터 명치정 증권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십수년 경력의 중매인들을 물리치고 개업한 지 1년 만에 경성주식현물시장 취인원조합의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1932년 인천미두취인소와의 합병으로 조선취인소가 출범할 때는 위원장을 지냈다. 매년 중매점 연간 매매액 시상자 명단에 단골로 등장했으며 취인소와 중매인조합에서 수여하는 각종 포상을 수십여 차례 휩쓸었다.
'조선인사흥신록'은 자동차 광이었던 백정이 경성주식시장의 기린아이며 대담한 상재(商才)라고 소개하고 있다. 1903년 24세의 나이에 조선으로 건너온 백정은 그들의 식민지 증권시장에서 이완용과 총독부·황실의 후원을 등에 업고 큰 수완을 발휘해 성공한 것이었다. 이재명이 24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16년 후인 1926년 이완용도 69세라는 천수를 누리기는 했으나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한일강제병합 당시 한켠에서 두 '조선인'의 사건을 목격했던 일본인 백정우지조만은 1945년 조선이 해방되기 직전까지도 명치정 증권가를 호령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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