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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청구권 총액 '줄다리기'

처음엔 '8억달러' 대 '5천만달러' 놓고 한일 대치

한일회담에서 핵심사안인 청구권 금액이 구체적으로 거론된 것은 제6차 회담이었다. 사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박정희 장군은 경제재건을 위해 대일관계 타결을 통한 자금과 기술 도입이 절실하다고 보고 한일회담에 강한 열의를 보였고, 그즈음 일본도 케네디-이케다 수뇌회담을 계기로 한일회담 재개 요구에 응하기로 방침을 정한 터여서 6차회담은 비교적 밝은 전망 속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종전의 5차회담까지 그랬던 것처럼 1961년 10월20일 6차회담이 개시된이후 11차례에 걸친 청구권 위원회에도 불구, 한국측이 요구한 8개 항목을 중심으로한 실무논의는 양측의 현격한 이견으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한일 양측은 실무교섭과는 별도의 정치적 일괄타결을 모색하게 된다. 6차회담이 개시된 그 다음 달인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은 케네디 미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 방문 길에 도쿄(東京)에 기착해 이케다 수상과 정상회담을갖고 조기 타결의 돌파구를 열었다. 박 의장이 일본이 성의를 갖고 청구권 문제에 임한다면 법률적인 근거가 있는청구권 만을 요구하고 정치적인 배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일본 정부가 `경제협력방식'을 제시한 것도 이 무렵이며 당시 이케다 정권은 청구권 실무교섭에서는 철저한 법률론과 증거논쟁으로 한국측의 요구를 묵살하고 정치적 절충에서 일본이 공업제품의 형태로 한국에 일정액을 제공하는 형태로 청구권 협상을 타결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일괄타결을 위한 첫 대일 특사가 당시 김유택 경제기획원 장관이다. 그의 임무는 청구권 문제의 정치적인 타결 가능성을 모색하는 한편 대체적인 청구권 금액의 윤곽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우리측은 8억달러를 요구한 반면 일본 측은 5천만달러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 다음 해인 1962년 3월의 한일외상회담부터 같은 해 11월의 김종필-오히라 회담에 이르기까지 청구권을 둘러싼 정치적 절충과정에서는 실무차원의 토의는 유보되고 청구권 자금의 총액과 명목에 관해 일괄 타결하는 방식이 논의됐다. 그러나 일본의 태도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3월 외상회담에 앞서 일본의 대장성은 1천700만달러, 외무성은 7천만달러를 청구권 자금으로 상정해 이케다 수상에게 제출했던 것으로 이번 문서공개 결과 드러났다. 최덕신 외무장관과 고사카 일 외상간의 회담은 청구권 금액의 조정은 커녕 공방만 전개한 채 불발로 끝났다. 성과라고 한다면 한일 양측이 청구권 금액으로 7억달러와 7천만달러를 공식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1962년 7월 참의원 선거 승리로 재선한 이케다 수상은 한일회담 조기타결 의지를 다짐하면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을 등용했고 회담 타결을위한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른 바 `오히라 구상'이다. 골격은 청구권은 개인의 청구권에 한정하되 여기에무상공여, 유상의 경제협력을 추가함으로써 총액에서 한국의 요구에 접근하는 대신청구권 `명목'은 포기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된 1962년 8월 차기 정치회담을 위한 예비절충에서 일본측은 `7억달러 대 7천만달러'의 금액차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국측이 청구권 명목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한국측은 `청구권의 테두리 안에서의 순수변제 3억달러 플러스 무상3억달러' 안을 제시했으나, 일본측은 청구권 명목이 사용된다면 7천만달러를 넘을수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예비절충에서 양국의 제시액은 5억달러 대 1억7천만달러까지 좁혀졌으나 더 이상 축소되지 않았고, 최종 담판은 고위 레벨의 정치회담으로 격상되는 방안이 채택됐다. 문제의 김종필(金鍾泌) 정부부장과 오히라 외상간의 회담이 구상된 게 이 때다. 1962년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친 김-오히라 회동에서 일본측이 한국에 제공할 금액으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이라는 메모가작성됐다. 그러나 자금 제공의 명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는 점이 눈에띈다. 이를 두고 한국 정부는 이 금액을 청구권 자금 또는 사실상의 배상으로 설명하는 반면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자금 또는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하는 아전인수가 빚어진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김-오히라 메모의 금액을 토대로 1965년 6월22일 최종 합의된 청구권 금액은 `무상 3억달러, 장기처리 차관 2억달러, 민간신용 제공 3억달러'로 확정됐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정부 수립직후부터 대일 강화조약에 한국이 전승국의 일원으로 참여한다는 입장을 갖고 이를 위한 실무 준비작업을 거쳐 작성한 1949년의 `대일배상 요구조서'의 배상금액과 비교해보면 청구권 금액이 얼마나 초라한 금액인지 알 수 있다. 이 조서는 일본에게 지금(地金), 지은(地銀), 문화재, 선박 등의 현물반환과 더불어 총액 310억엔(당시 환율기준으로 20억달러 수준)에 이르는 배상과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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