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사들이 본격적으로 주총시즌에 돌입함에 따라 기관투자가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특히 ‘주주이익 극대화’를 내세워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선언한 자산운용사들은 경영권 분쟁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선뜻 어느 한 쪽을 편들기도 어려워 극히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A펀드는 ‘찬성’, B펀드는 ‘반대’=27일 자산운용업계에 따르면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ㆍKCC 등 범현대가가 대립 중인 현대상선의 정관개정과 관련해 유리자산운용은 동일사안에 대해 펀드별로 ‘찬성’과 ‘반대’표를 나눠 행사하기로 했다. 유리코스피200인덱스 등의 4개 펀드가 보유한 1만5,590주의 의결권으로는 정관개정에 찬성했지만 유리제우스주식형 사모펀드1호의 479만주 의결권으로는 반대표를 던진 것. 이중 유리제우스주식형은 이해당사자인 KCC가 100% 지분을 소유한 이른바 ‘사모단독펀드’다. 유리자산운용으로서는 이해당사자인 KCC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미래에셋운용은 부자간 표 대결이 예상되는 동아제약 경영권 분쟁의 ‘칼 자루’를 쥐면서 고민이 심각한 상황이다. 보유지분이 8.42%에 달해 강신호 회장 측(6.94%)과 강문석 대표측 지분(14.71%)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경영권 향방이 결정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미래에셋이 제3자인 한미약품(6.27%) 측에 주식을 넘길 것이란 소문이 돌자 회사 측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며 서둘러 진화작업에 나서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이에 따라 미래에셋은 공시마감일인 주총 5일 전까지 내부절차에 따라 행사내역을 결정하되 이전까지는 일절 행사방향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주주이익 극대화 판단 어려워=이처럼 자산 운용사들이 고민에 빠진 것은 경영권 분쟁이나 그룹 내 집안싸움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주주이익 극대화’라는 잣대로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재동 한국투자신탁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은 “장기투자자 관점에서 주주권리를 침해할 사안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되 이와 무관한 사안에 대해서는 휘말리지 않으려는 것이 운용사들의 속내”라고 말했다. 운용사들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일반 주주들의 찬반비율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는 이른바 ‘새도우 보팅’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울러 자산운용사들의 기업의 눈치를 보지않을 수 없는 구조도 운용사의 고민을 깊게 한다는 분석도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자산운용사들이 내놓는 MMFㆍ사모펀드 등 주요 고객이 재벌기업이어서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며 “ 주총에서 무조건 펀드수익자 입장만 반영하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 기관은 아예 초기부터 경영참여를 목표로 기업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다. 샘표식품과 우리투자증권 PEF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샘표식품의 2대주주인 우리투자증권의 PEF인 ‘마르스 1호’는 27일 샘표식품을 상대로 주주명부열람을 요구하는 실질주주명부 열람등사 가처분신청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하면서 경영권 분쟁 참가의사를 또 한번 명확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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